덕향 이명희 시인/평론가 / 한국문인협회 알버타 지부
줄거리- 19세기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에 의혹을 갖은 고흐의 친구는 고흐가 죽은 지 1년 후, 자기의 아들 아르망에게 고흐의 죽음을 추적해 보라고 한다. 아르망은 6주간의 계획을 갖고 고흐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는데, 고흐가 머물렀던 여관집에서 그를 지켜봤던 여관집 딸 ‘아들린’을 만나 고흐 생전의 이야기를 듣던 중 그녀도 고흐의 죽음은 미심쩍어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흐를 치료하던 의사의 딸이 고흐의 여인 ‘마그리트’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길로 마그리트를 만나러 갔지만 그녀의 하녀한테 푸대접을 받고, 마그리트의 아버지 ‘가셰’ 또한 만나지 못했다. 동네 남자들이 술을 먹다가 아르망의 행동을 수상히 여겨, 시비가 붙고 한바탕 싸움이 있었다. 아르망은 고흐가 죽은 방에서 잠을 청한다. 악몽을 꾼 아르망은 고흐의 죽음에 대해 더욱 의혹을 품게 된다. 아르망은 마그리트와 고흐가 배를 타고 즐겼다는 곳에 가서 뱃사공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미궁에 빠진 아르망은 고흐가 죽은 언덕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마그리트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녀는 고흐의 예술성을 인정하여 고흐 사후에도 무덤에 꽃을 바치는 것이라고 했다. 아르망은 처음엔 고흐가 친구 르네한테 타살 당한 게 아닐까 의혹을 품었었다. 그리고 가셰와 고흐의 다툼으로 가셰도 의심했지만, ‘가셰’ 박사를 만나 이야기를 듣던 중 고흐가 동생 ‘태오’로부터 그림 재료를 후원받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의혹이 풀리면서, 고흐가 자살한 결정적인 이유는 심한 자책감과 우울증이었음을 알게 된다. 싸움의 전말은 화가가 되고 싶어 했던 가셰가 고흐의 그림을 카피하자 고흐가 사기꾼이라 말했고, 화가 난 가셰는 고흐에게 동생이 힘든 줄도 모르고 파렴치하게 도움을 받는 무력한 인간이라고 모욕했다. 대못으로 상처를 받은 고흐가 그 길로 자괴감에 빠져 자살했던 것이다.
실증주의적 풀이- [고흐, 당신은 왜 죽었나요?] 세기적인 화가의 일생을 추적하기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다. 아르망이 고흐의 죽음을 추적한 방법은 콩트가 주장한 실증주의적 해법에서 볼 수 있다.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관찰이나 증명 가능한 지식만을 인정하는 인식론”을 말할 수 있는데, 아르망이 고흐가 그림 작업을 했던 8년간을 추적하고자, 그곳에서 한 사람, 두 사람을 만나면서 고흐와의 관계며, 고흐와 나눈 대화나 인간관계를 정확한 근거로 삼아 고흐가 타살이 아니라 자살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아르망이 의혹을 갖은 인물로는 첫 번째 가셰 박사였다. 가셰 박사는 딸 마그리트가 고흐에게 관심을 두고, 고흐 또한 마그리트와 자주 만나자, 딸에게 고흐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마그리트의 아버지는 가문 있는 집의 귀한 딸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정신 병력이 있는 고흐와 만나는 게 못마땅해 고흐와 다투던 중 홧김에 고흐를 쏜 게 아니냐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두 번째 의심 인물은 고흐의 친구 르네였다. 르네는 번번이 고흐를 무시하고 장난이 심했기 때문에 장난하던 중 실수로 고흐를 쏜 게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이런 아르망의 추측이 거의 일치된다고 믿었을 때 추측을 뒤엎게 된 결정적 단서를 얻게 된다. 우연히 마그리트를 고흐가 자살한 장소에서 만나 고흐와 마그리트의 관계를 알고 된 것이다. 그녀가 날마다 고흐의 무덤에 꽃을 갖다 놓은 것은 사랑하는 남자를 그리워해서라기보다, 고흐의 예술성을 존경했기에 꽃을 헌정한 것이다. 사랑하는 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고흐가 그려 준 그녀의 초상화가 같은 자리에 40년이나 걸려 있었다는 것은 그를 특별한 화가로 인정하는 증명이다. 가셰 또한 고흐를 딸의 남자로 여기기보다 고흐를 통해 자신의 꿈을 키웠던 사람이었기에 그림을 배우는 친구일 뿐이지, 경쟁의 대상도 미움의 대상도 아니었다. 단지, 건강을 염려했던 의사였으며, 취미를 나누던 친구였다.
실증이란 증명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아르망은 반신반의하던 중,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확실한 증거를 찾아냈다. 콩트의 방법론적 일원론은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로 사회현상도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여 인과법칙을 발견한 예라고 본다.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을 고흐를 친구 우편배달부와 그의 아들 아르망이 고흐의 죽음을 추적하는 노력이 없었다면 결코, 세계 미술사에 공적을 남긴 화가로, 인상파주의 천재 화가로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해석주의적 풀이- [고흐를 사랑하는 사람들] 고흐의 죽음이 타살임을 의심했던 것은 총알 맞은 부분이 복부를 향하여 스스로 쏜 위치라고는 믿기가 어려웠고, 총알을 맞고 피를 흘리는 고흐를 여관방에 방치했던 가셰 박사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사였음에도 즉시 총알을 빼는 처치를 하지 않고,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셰 박사가 고흐가 죽기 전에 지나치게 다투었던 것으로 보아 마그리트와 고흐의 교제를 반대하면서 홧김에 총을 쏜 것이라는 추측이 불가피했다. 두 번째 용의자로 늘 고흐를 무시하는 르네의 과도한 장난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지 않았을까 의심해 보았다. 자존감이 낮고, 궁핍하여 삶의 의욕조차 없는 고흐를 르네가 무시하면서 싸움이 붙었을 것이라는 추리다. 우리는 흔히 자신감이 없을 때 상대의 말 한마디로 지옥과 천국을 오간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해석주의는 실증주의와 반대로 구체적으로 명확한 자료 없이 대상의 질적 측면에 주목한 연구 방법이고 사회 과학적 접근법의 하나”이기에 나는 고흐의 심리적인 것에 주목했었다. 아르망은 자신이 직접 복부에 총을 가하는 포즈를 취해보기도 한다. 또한 고흐가 환히 웃는 날보다 늘 우울증과 광기 어린 모습이었고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는 것에 주목해 볼 수도 있다.
법은 명확한 증거나 근거에서 효력이 발생한다. 전해오는 비화에는 영화에서 창녀에게 자른 귀를 손에 쥐여 준 것과는 다르게, 귀를 자른 이유가 여러 정황으로 들려온다. 고흐의 자화상을 보고 ‘실제 귀와 다르다’는 동료의 말에 분노하며 그 자리에서 귀를 잘라 보여 주며 “어디가 다르냐!”고 화를 냈다는 말도 있다. 해석주의가 “사회현상의 체계적인 경험적 탐구를 가리키는 양적연구와 달리, 대상의 질적 측면의 연구”라면 죽은 사람의 사인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국과수에 부검을 맡겨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 고흐가 유명 인물도 아니었고, 큰 도시가 아닌 조그마한 동네에서 사회적으로 그만한 검증 제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매스컴에 오를 만큼 비중이 큰 사건이 아닌 이상, 인간의 목숨은 파리 목숨처럼 존재감이 없다. 사건마다 피해자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는 한 묻혀버리는 사건, 미제사건이 그 예이다. 고흐의 사인은 해석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하기엔 그의 신분이 사회적으로 비중이 작았다.
비판이론적 풀이- [세상이 고흐를 바라보는 시선] 상류층이 아닌 빈곤층이었던 고흐는 8년간 주목받지 못했고, 광기 있는 사나이, 정신병자 등의 온갖 멸시를 받으면서도 예술의 혼을 불살랐다. 그의 생전에 단 한 개의 작품만이 팔렸다고 하는데,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을 빌려 말하자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산업사회에서 서구적 계몽과 이성주의의 왜곡된 실현에 대항해서” 말하자면, 고흐가 빛을 보지 못한 것은 인간들의 지나친 선입견과 사회 분위기에서 몰아간 인간 질시, 무관심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냐는 생각이다. 또한 “헤겔적 의미의 변증법적 역사관을 통해 현대를 스스로 소외된 개인들의 갈등의 역사로, 승인되지 않은 지배 형태로 파악한다.” 그 시대의 신분 차이와 경제적 차이는 많은 예술인들을 무시하고 저지했다. 그들은 일반 노동자보다 낮은 계층 생활로 창작활동이 힘들었다. 그때도 귀족 신분은 남아 있었고 상공 상인들과 일부 중산층은 그럭저럭 행복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나 인지도가 약한 그림쟁이는 알아주지 않았다. 원래, 고흐는 중산층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자랐지만, 부모의 사랑은 받지 못한 걸로 알고 있다. 사랑보다는 어머니의 냉소로 자존감이 낮았고, 아버지가 목사라 엄격한 명령 지시로 목사 직분 시험을 치르려 했지만 턱이 높아, 선교사로 전환했다. 선교사직도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해고당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흐의 내면에 자괴감, 자존감, 열등감 등의 비참한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그런 감정들이 우울증으로 오면서 모든 일에 예민한 광기를 보이기도 했다. 그에게 물질적으로 지원했던 사람은 오로지 혈육인 동생 태오와 정신적 지원을 한 우편배달부 아르망 롤랭 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가능성이 없고 거기다 성격까지 원만하지 않은 병적인 사람을 예술가로 기대하고 후원하기란 쉽지 않다. 사회는 냉정하다. 산업사회의 인정머리 없는 잣대는 인간의 능력을 신분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는 것은 로또의 기적을 바라는 것만큼 힘들다. 비약하자면, 산업주의의 왜곡된 경제구조나 신분 구조는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을 지배하는 수직구조이고, 소외된 개인의 갈등은 현시대까지 이어져 왔다.
포스트모더니즘적 풀이- [영화로 만든 고흐의 예술세계] 반 고흐의 죽음을 미스터리로 보고 21세기의 눈높이에 맞춰 세계 최초로 유화 제작했다는 것은 큰 이슈다. 지금까지의 애니메이션과 다르게 10년을 기획했으며 107명의 아티스트가 5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든, 미술적 영화예술로 상품화한 것이다. 강렬한 색채가 고흐를 상징하듯이, 충분히 관객을 끌어들일 만한 작품이었다. ‘하워드 베커’의 [예술 세계]가 충분히 발휘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지식과 수단에 기반 하여 협력적으로 활동하고 조직화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유화 기법으로 이 영화를 만화영화라고 칭할 수 없는 게 예술영화로 구분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흐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현대 시점에서 Loving Vincent라는 영화로 재구성하였고, 전시회를 통해 많은 관람객을 유치했으며, 그 외의 예술인들 미술. 음악. 문학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시너지효과를 주었기 때문이다.
베커 선생이 얘기한 ‘핵심 인력’과 ‘보조 인력’이 시대적 배경 및 각 나라의 상황에 따라 노동 분업 방식이 달라진 경우이다. 내가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예술은 사회나 경제나 정치의 구속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예술이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만일 고흐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비굴하게 살았다면, 그런 독창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가난하고 비참하여 미술 재료를 살 수 없어 동생에게 도움은 받았을망정, 변칙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때도 얼마든지, 상업적인 그림을 그려 돈을 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나체사진이나 극장용 사진 등 고흐는 정신적, 물질적으로 피폐했지만 자기의 예술이 후세대에 ‘별이 빛나는 밤’이 되길 마음속으로 염원했을지 모른다. 혹자는 고흐의 죽음을 가벼이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 예술영화를 보면서, 고흐는 죽음조차도 독창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만의 장소인 누런 밀밭의 언덕에서 자살한 아름다운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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