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아들들(2)_역사기행
선조가 낳은 아들 13명 중에서 나쁜 짓 골라가면서 한 아들 트리오는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이다. 이 세 명의 왕자는 남의 재산, 남의 여자 빼앗는 것은 늘 하는 일상사 중에 하나였고 걸핏하면 무죄한 백성 잡아다 때리는 것도 다반사로 매 맞다 죽은 사람도 많이 있다. 순화군은 보통 한 해 10명 정도 때려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악당 트리오 중에서는 정원군을 으뜸으로 치고 있다.
선조실록에 보면 순화군이 죽었을 때 기록이 있다. 순화군의 이름은 이보(李)) 인데 “성질이 패망(悖妄)하여 술만 마시면 행패를 부렸으며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 비록 임해군(臨海君)이나 정원군(定遠君)의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도성의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 호환(虎患)을 피하듯이 하였다.” 무고한 사람을 일년에 10명씩 죽여도 임해군이나 정원군이 행패 부리는 것 보다 낫다고 했으니 그 두 사람은 얼마나 나쁜 짓을 했을까?
임해군과 순화군은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에게 포로가 되었다 부산에서 풀려났다. 두 사람은 일년 이상 포로생활을 했는데 그 동안 두 사람 때문에 조선군이 작전을 원활하게 펼칠 수 없었던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임해군과 순화군의 성격이 난폭해지고 정신이상자처럼 감정변화가 심하고 예절도 예의도 모르고 왕자라는 신분도 망각한 채 온갖 나쁜 짓은 골고루 한 것은 포로생활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 때문이라는 동정론도 있으나 그 보다는 타고난 천성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반역자와 한 패가 된 왕자들-
왕자로 태어났으면 젖 떼면서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는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학문을 즐겨 하던 세종이나 문종 같은 왕이 있어 왕자를 비롯해 왕족들을 전문적으로 교육시키는 종학(宗學)이라는 기관이 있어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음에도 하는 짓이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한 왕자 트리오는 타고난 천성이라고 밖에는 설명 할 수가 없다.
전쟁이 벌어지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려가며 적과 싸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적과 내통하는 반역자가 생긴다. 적에게 점령 당한 곳에서 피난 하지 못해 적 치하에서 살던가 포로가 되는 경우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의에 의해 적과 내통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지면 새를 잡겠다”고 전쟁이라는 혼란기에 한 밑천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돈에 눈이 어두워 공동체의 안녕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때문에 서슴지 않고 적과 내통하는 것인데 임진왜란 때도 이런 부류들이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자 일부 상인들이 관청 몰래 물건을 갖고 적진을 왕래 했다. 밀거래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취했는데 적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것은 이적행위로 전시에는 어느 나라던지 이적행위는 즉결 처분한다. 포도청에서도 왜적들과 내통해 밀무역하는 잠상들을 체포하려고 기찰포교를 풀어 탐문수사를 했다. 포도청 기찰에 이덕룡이라는 자가 걸려 들었다.
지금의 경찰청에 해당하는 포도청은 좌 포도청, 우 포도청이 있었다. 좌 포도청은 서울의 동부, 남부, 중부 및 경기좌도를 담당했고 서울 서부, 북부 및 경기우도는 우 포도청에서 관할 했다. 이덕룡을 잡아 들인 곳은 우 포도청이었다. 심문 결과 이덕룡은 노비였다.
좌 포도청에서 이덕룡을 심문하며 여죄를 추궁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임해군이 나타났다. 난폭하고 사납기로 소문난 임해군이 포도청에 나타나자 군졸들은 물론 포도군관들도 긴장했다. 포도대장은 못마땅했으나 왕자가 나타나 찾는다는데 무시할 수는 없어 할 수 없이 임해군을 만났다. “무슨 일로 소생을 찾으십니까?” 임해군은 다짜고짜 이덕룡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덕룡은 이적행위와 기밀을 누설한 간첩입니다” 순간 임해군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좌 포도청에도 이적행위와 간첩 혐의로 체포된 자들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좌 포도청에는 임해군과 정원군이 나타나 포도대장에게 잠상을 석방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아무리 사납고 포악한 왕자들이 와서 죄인을 석방하라고 멱살을 잡아도 국사범을 석방 할 수는 없었다. 포도대장은 이런 사실을 사헌부에 보고했다.
아무리 지각 없고 사리판단 능력이 떨어진다 해도 왕자라는 자들이 수사기관에 나타나 반역자를 석방하라고 청탁을 넣고 공무집행 방해를 하는 것은 국가기강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사헌부에서는 선조에게 보고를 올렸다. “국가 기밀 누설이 어떤 죄입니까? 마땅히 엄벌로 다스려야 합니다. 두 왕자의 직첩을 회수하고 관계자를 법에 따라 처벌 하십시오.” 그러나 선조에 입에서 나온 말은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이 인간으로서 상도를 벗어난 악행을 하고 돌아다닌 이면에는 자식들 잘못을 엄격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미온적으로 대하는 선조의 애매모호한 태도도 작용했다.
-정원군에게 봉변 당한 하원군 부인-
선조는 덕흥군의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장남이 하원군이다. 그 아래로 선조보다 4살 위 누나가 있고 2살 많은 차남 하릉군이 있고 막내 하성군이 곧 선조다. 하원군은 정유재란 나던 해 죽었다. 선조의 아들 말썽꾸러기 트리오 중에서도 악명 높은 정원군은 새문동(塞門洞) 에 살았는데 한자로 읽을 때는 색문동이다. 색(塞)은 막을 색인데 문을 막은 동네란 뜻이다.
새문동에 대해서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흔적도 없는 서대문의 원래 이름은 돈의문인데 총독부에서 전차길 만든다고 헐어버렸다.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할 때 도성을 세웠는데 풍수지리상 돈의문을 폐쇄하는 게 좋다 해서 돈의문을 폐쇄하고 태종 때 공신인 이숙번이 사는 동네에 문을 세웠으니 서전문(西箭門)이라고 한다.
이숙번은 1차, 2차 왕자의 난에 큰 공을 세워 태종이 신뢰하는 공신으로 권세가 대단했다. 서전문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시끄럽자 문을 막아 버렸다. 그래서 막힌 문이라 해서 색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세종 때 서전문은 폐쇄되고 돈의문 자리에 다시 문을 세워 사람들은 새로 세운 돈의문을 새문(新門) 이라고 불렀다. 세종 때부터 새문이 아직도 새문으로 새문안 교회도 있고 그 일대에는 새문 혹은 신문(新門)이라는 이름이 많이 있다.
정원군이 살던 색문동은 그 후 새문동으로 음이 변했는데 ‘새문동에 왕기가 서렸다’는 말이 있는데 사람 구실 못하는 왕자가 사는 집에 무슨 왕기가 서렸겠는가. 나중에 정원군 아들 능양군이 쿠데타 일으켜 왕(인조)이 된 후에 말 만들어 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소리에 불과하다.
선조 35년 9월에 생긴 일이다. 정원군의 노비들 몇 명이 길거리에서 창녀들을 데리고 희롱하면서 지나갔다. 그들이 우연히 하원군 집 앞을 지나가는데 하원군 집 노비들이 한 마디 했다. “이봐, 뭐 하는 짓들인가, 대낮부터. 여기가 누구 집 인줄 아는가? 조용히 지나가라구.” 그 말에 정원군 집 노비들이 발끈했다. “너희들이 뭔데 까불어.” 정원군 노비들은 주인을 닮아 경우도 없고 염치도 없는 안하무인이었다. 노비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이 벌어져 치고 받고 터지고 난리가 났는데 사납고 거친 정원군 노비들에게 하원군 노비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그러자 하녀들이 주인 마님, 하원군 부인에게 사실을 알렸다. 하원군은 선조의 큰형으로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 신주도 하원집에서 모시고 있어 보통 왕족하고는 차원이 다른 왕족이다.
하원군 부인이 나섰다. 선조의 형수이자 정원군의 큰 어머니다. 하원군 부인은 “내가 나서면 노비들이 싸움을 그치겠지” 라는 마음으로 대문 밖으로 나가 싸우는 노비들을 타일렀다. 그러나 안하무인인 정원군 노비들은 하원군 부인을 납치해 정원군 집으로 끌고 와 감금했다.
모친이 정원군 집에 감금 되었다는 말을 들은 하원군 아들들이 정원군이 사는 새문동으로 달려가 모친을 구하려 했으나 정원군 노비들은 “열쇠가 없다”고 딴청을 부렸다. 얼마 후 정원군이 돌아왔다. 하원군 아들들은 사촌인 정원군에게 열쇠로 문을 열라고 요구했으나 정원군은 “감히 어디 와서 문을 열라고 하는가”라고 화를 내다 날이 밝을 무렵 문을 열어주었다.
정원군 노비들의 행패는 선조에게 보고 되었으나 노비들은 처벌 받지 않았다. 처벌은커녕 불러다 조사도 하지 않았다. 사관은 이 때 일에 대해 기록하기를 “노비들을 추문하지도 못했으니 다른 일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 왕자들의 폐단이 극도에 이르러 모든 원망이 왕에게 모이니 한탄스럽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자식을 의롭게 키우려 한 것이다.”
정원군에 대해 “신중하고 효성과 우애가 남 달라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이런 평가는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이 쿠데타 일으켜 왕(인조)이 된 후의 평가다. 정원군이 인간적으로 동정 받는 것은 아들 능창군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것이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아들이 먼저 죽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슬픔이다.
능창군은 광해군 때 역적으로 몰려 교동으로 귀양 갔다 죽었다. 아들 능창군이 죽자 정원군은 술로 세월을 보내다 화병으로 39세 한창 나이에 죽었다. 그는 개망나니 같은 인생을 살았으나 아들이 쿠데타로 왕이 되어 왕으로 추존 되었으니 원종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