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아랑곳 하지않는
침울한 방랑은
빈 들에 가득 차있고
그리하여,
나를 나 아닌 존재로 인식시키는
걸음걸이만 유령처럼 가로 지르는
창백한 벌판
그 한 구석
외로운 산 등성이 아래,
언어가 비워진 집들의
서글픈 지붕 위로
힘겹게 모인 햇빛
그것을 몰래 훔치려 하는
또 다른 나를 뛰어 넘으면,
묵묵(默默)한 들녘의 끝에서
수 많은 죽음들이 관통해 버린
투명한 가슴을 만난다
방황하던 영혼은
가느다란 경련으로
최후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정처없이 헤매이던 마음도
이제는 변색치 않을 광채로
보듬은 영원 속에 뿌리 내린다
눈물어린 먼 하늘엔
봄을 찾는 매 한 마리
아까부터 담담한 원을 그리고,
나는
비로소 이제야 죽음이 두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