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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감상] 할증된 거리에서 / 허영숙
작성자 안희선     게시물번호 -1672 작성일 2005-08-18 10:50 조회수 1279
 

할증된 거리에서 / 허영숙


따뜻한 불빛이 있는 쪽으로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는
어둠만 곱으로 남았다
중앙선만 선명한 자정이 넘은 거리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
할증된 사연을 안고 떠다니는 사람들 속으로
가로등이 뱉는 황색 불빛이 섞인다
준비도 안된 가슴 안으로
초단위로 들어와 앉는
낮이 저질러 놓은 하루의 풍경들
돌아보면 늘 서럽기만 한 시간이
지나온 길 뒤에 버려지듯 서있다
색깔을 잃어버린 신호등
연신 노란 불만 깜박인다
시작과 멈춤의 잣대가 없으니
알아서 가란 소리다
파란불이 주는 익숙한 편안에 길들여진 나는
이 무책임한 경계에서
어쩌라는 것인지
망설임이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차들은 휙휙 제한 속도를 넘기며 지나가고 있다






11060a.jpg


경북 포항 출생
<시마을> 동인
<시마을> 2004년 10월의 최우수작가
시마을 작품선집 <섬속의 산>, <가을이 있는 풍경>
<꽃 피어야 하는 이유>
동인시집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등




 

* 허영숙님의 시편들을 읽다 보면, 시인에겐 시인답게 살아야 할
고뇌가 있는 것인가 하는 오래된 질문을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세속世俗의 부단한 마모로 부터 자신의 정체성
正體性을 지키려는 욕구가 있고, 또한 그 안에서 실존으로서의 자아를
탐색하고 정립하고자 하는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게 되는 것이리라.

이같은 '존재의 확인'을 위한 집요한 추적은 시인에 있어,
시를 쓰게하는 가장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자아와 시적 대상
詩的 對象과의 치열한 대결의 구도를 통하여, 또한 선명한 이미지의
생동감을 통하여 추구하는 각성覺性의 정신을 향하고 있다.

시,'할증된 거리'에서 소재로 등장하는 '색깔을 잃어버린 신호등'은
곧 시인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무미無味한 현실을 일컬음이다.
끊임없이 편안함에 맴도는 것으로 유지되는 현실적 자아의 숨막히는
섭동攝動이 던지는 뼈 아픈 성찰을 지적하는 동시에, 그것으로 부터의
일탈을 시사한다. 그 일탈이란 무책임한 신호등 앞에서 망설이는
것으로써, 편안함에 익숙해진 일상 속에서 스스로의 삶의 위치와
방향성을 다시 가늠해 보는 일이다.

그러나 본연本然의 자아를 확인하려는 시인의 갈망은 부단한 현실의
무미한 폭력 앞에서 막막한 좌절과 조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제한 속도를 넘기며 휙휙 지나는 차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바로 그것에 현실적 삶의 애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버릴 수 없는 꿈의 지속적인 갈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인 역설亦說로,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려는 알레고리가 선명하다.

맹목적인 현실의 부정없이 그 안에서 있는 그대로, 자아를 비추어보는
시적 감각이 예리하면서도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느껴진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이 한데 어우러진다는 건,
이 詩人이 지닌 매력이자 장점이다.

무릇 시는 과장되지 않은 표현으로 깊은 내용을 담았을 때,
더욱 큰 시적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시의 형상화란 켤코 손쉬운 작업이 아니다.

시인의 정채로운 시세계에 부러움을 표表하며,
앞으로도 허영숙님의 정련한 건필을 기원해 본다.





-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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