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거리 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캐나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많은 한인사회들이 '부족주의'적 양상을 띱니다. 부족주의의 폐해를 논하기전에 저는 개인적으로 그것이 어떤 민족출신의 이민사회이던 양적으로 성장하기전에 필연적으로 거치는 단계라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염려하는것은 한인부족이 스스로 고립되거나 혹은 타 부족을 자극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로스엔젤레스 흑인 폭동시 발생한 한흑갈등이겠지요. 그외 지금 캘거리 한인사회 내부에서 떠도는 가십, 비방, 사기등은 작은 공동체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수 밖에 없는 조그만 현상정도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런류의 '부족단위' 문제는 한국인이 공동체를 구성하며 살고 싶어하는한 존재할것이고 한인회나 교회가 사실 이런 문제들의 진원지이면서 동시에 해결자임을 자처하는 모습이 저에겐 썩 좋아 보이진 않습니다.
부족문제를 진정 해결하고 싶으시면 부족이 해체되길
기다리면 됩니다. 한인부족해체의 가능한 두가지 방법은 (1) 캐나다 주류사회로 동화되거나 (2) 부족보다 더 큰
공동체로 진화하는 것입니다. 인도나 중국이민 사회는 동화가 그리 쉬운게 아님을 보여줍니다. 공동체의 가장작은 단위는 가족입니다. 한인의 수가
많지 않은 작은 도시에선 한인사회가 다들 가족같다고 합니다. 저도 한인가족수가 몇가구되지 않는 작은 도시에서 육년을 산적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가 있지만 가족같았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더 많은 한인의 유입은 가족같은 한인사회를 붕괴시키고 좀더 각박한 부족공동체를
가져오겠지요. 좀 힘들지만 참고 기다리면 독립된 경제권을 형성할수 있을 만한 수십만 인구의 한인사회가 만들어 지겠지요. 이런
거대규모의 한인사회는 이미 뉴욕, 로스엔젤레스 그리고 좀 작지만 토론토에 형성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김창한씨가 주장한대로 언어의 장벽으로인해 한인 공동체안에 구속되고 부족주의적 교회문화가 그런 문제들을 재생산해내고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겠지요. 부족울타리안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은 보호의 댓가로 부족내 갈등이 강요될거구요. 여하간 갈등의 원죄를 제공하는
단체/교회에 힘을 모아주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김창한씨의 생각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민사회에서 한인교회(=사교클럽?)의
역활에 대해 매우 회의적입니다만 언어 문제로 굳이 한인교회가 따로 있어야한다면 작고 낮은 교회여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큰 문제는 일반적으로 대형교회/목사가 만들지요.
☞ 김창한 님께서 남기신 글
이민자, 부족주의 그리고 도편추방
-김창한 (한인연합교회/ 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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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싸가지 없는 한국인 이민자들
이민과 관련된 웹사이트에 떠돌아다니는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담론의 주류는 “한국 이민자들이 왜 그렇게 싸가지가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난은 지나치면 한국 이민자들의 본류인 한국에 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즉 한국 이민자들이 싸가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민생활이 오래된 분일수록 한국에 대한 짙은 향수만큼이나 한국의 부패상과 정치적 혼란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이민 이후에 고정된 한국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자신의 과거 이미지 또는 자신의 과거사지요.
2. 왜 오리엔탈리즘인가?
이러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 형성의 근원을 저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말은 올해 타계한 아랍계 영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의 책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통해서 대중화된 말입니다. 이것은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관한 것”으로서, 간단히 말하면,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경험과 지식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과 지식이 고착될 경우에 나타나는 문제는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기는커녕 왜곡시킨다는데 있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은 이러한 고착이 하나의 서구 문화를 형성하여 동양을 평가하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서양이 있기 전에는 동양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땅 (earth)에 서양과 동양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그런 인식의 지도(map)가 그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서양이라는 것은 서구인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 (we)의 범주에 들어간다면, 동양은 오직 인식의 대상인 또는 사물인 “그들” (they)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결과는 동양을 지나치게 신비화시키거나 폄하시킨다는 것입니다. 동양이라는 것은 오직 서양인의 시각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며칠 전 제가 구한 책 중에 Warren I. Cohen이라는 학자가 쓴 동아시아 역사 [East Asia at the Center]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학자가 쓰긴 했지만 서구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동양자체의 문화사를 바라보자는 의도를 제목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요즘 양식있는 학자들 사이에서 “극동” (Far East)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 것도 바로 극동의 지리적 위치가 서구의 최 동쪽에 있다는 인식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달에서 본 지구는 동도 없고 서도 없는 지구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국경선도 없는 둥근 땅 덩어리일 뿐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고 있는 지도 위에 나타난 영토는 작위적으로 형성된 것이고, 이러한 작위적 형성이 우리 마음에 까지 자리잡아 우리의 인식을 지배합니다.
3. 이민자들은 오리엔탈리즘의 선교사?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을 이민자들과 연결시켜야 할까요? 그것은 이민자들이 서구세계에 이민을 오면서 서구적 시각을 갖고 한국인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그들이 한국이이었고, 지금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며, 한국인에 대한 평가가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각의 기저에는 바로 오리엔탈리스트들이 동양을 바라보는 시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평가가 객관적 기준을 갖고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것과 주워들은 지식의 누더기를 기워 만든 상태로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거울에 반사된 자기 얼굴의 이미지를 타자, 즉 서구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에 대한 인식 또는 해석은 이미지의 굴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굴절은 한국인에 대한 부정성 (negativity)을 의미합니다. 가령 이런 것들입니다.
한국인은 버르장머리가 없다.
성급하다.
한국인끼리 사기 처먹는다.
한국인들은 중국인들과 달리 단합은커녕 못 잡아 먹어 난리다.
그래서 한국인이 사는 지역은 가급적 피하고 상종을 하지 마라.
이렇게 부정적인 평가가 나온 이유는 한국인 자체가 생래적으로 “나쁜 종” (spices)이기 때문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국사회가 썩어빠졌고 그런 썩어 빠진 사회에 살다가 이민 온 사람들이 저질들이라면, 한국은 벌써 망해야 했고, 한국인이 사는 이민지 역시 한국인의 범죄 소굴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도대체 한국인의 심성이니 한국인의 정서 같은 것이 실체적으로 존재하기는 한가요? “빨리 빨리”의 인류학이란 말이 가능한가요? 이것은 한국인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민과 제국의 산물로 산업화된 서구에서 여유작작하는 이미지의 반사 이미지 (mirror image)로서의 한국인일 뿐입니다.
그러면 이런 부정적 담론이 이민사회에서 왜 그렇게 힘을 발휘할까요? 그것은
우리는 은연중 한국인과 한국인 이민자를 평가할 때, 이민지에서 경험한 서구적 시각에 물들어 (?)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문화일 뿐입니다.
고정적인 것이란 없습니다. 기원전에 이미 중국인들이 백인들과 접촉을 했고, 현재의 찬란한 음식문화를 자랑하는 중국 음식은 바로 아랍과 인도
문화의 영향하에 형성된 것들입니다. 잘 아시듯이 현대의 한국의 김치는 근세기에 고추가 도입되면서 가능한 것입니다. 한국 짜장면과 짬뽕은
중국음식이 아니라 한국인의 창조적인 음식입니다. 문화는 영원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전통과 문화는 계속
발명(invent 또는 reinvent)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이러이러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는 고정된 시각으로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평가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현재의 이민지에서 한국인과 이민자 자신에 대한 고정된 평가는 새로운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을 전하는
선교사들입니다.
4. 이민자와 부족주의 (tribalism)
그런데 이러한 신종 오리엔탈리즘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이민지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의 특수한 상황과도 연결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한국인 이민지의 특수한 상황을 저는 “부족주의” (tribalism)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부족사회는 자체에서 자급자족을 충족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물교환 같은 것은 사냥하거나 농사 지은 다음의 잉여물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민지도 마찬가집니다. 이민자들이 가장 먼저 직면하는 장애가 언어소통의 문제입니다. 다른 언어를 가진 부족들과의 물물교환을 위해 최소한의 언어를 필요로 하듯이, 부족적 이민지에서도 최소한의 언어면 가능합니다. 왠만하면 자체에서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인 이민지의 가상 공간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는 배타적인 공간)에만 삶의 터전들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 공간의 경계선은 바로 한국어입니다. 단도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민자들의 대부분이 한국인을 상대로 주로 거래를 한다는 것입니다. CN드림이나 주간씨티의 광고를 보면 대충 이해를 하실 것입니다. 미용, 보험, 식당, 부동산, 식품점, 교회 (일종의 상품으로 본다면) 등은 현대 부족 사회에 필요한 필수품들입니다. 저는 이런 상품들에 대한 가치 평가를 결코 하지 않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상품거래에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의 가능성입니다.
5. 생존의 언어 (survival language)가 주류인 사회
이런 한정된 상황에서 야기되는 문제는 부족사회 내에서 일어나는 갈등 (strife)입니다. 한정된 공간 (한인공동체라는 가상공간)에 부족한 물자 (한정된 사업공간)는 부족 내의 갈등을 증폭시킵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은 바로 생존의 언어입니다. 사람들마다 정보에 굶주려 있습니다. 새로운 정보 사냥에 열심입니다. 문제는 이런 정보 역시 사실에 근거하기 보다는 근거없는 소문일 가능성이 많아 이민지를 들썩이는 “사기 “ (fraud)의 진원지가 됩니다.
생존의 언어는 두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긍정적인 측면: 이민지는 가능성의 장입니다. 한국에서 누리는 혈연,
지연, 학연을 떠나 실력과 성실로 승부하는 새로운 “유토피아” (이 말이 갖는 이중성에 주목하십시오.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교차로)를 형성할 수 있는 곳입니다.
둘째, 부정적인
측면: 삶의 여유보다는 생존이 당면과제이다 보니 문화가 부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이 있고 직업이 확실한 이들은 골프나 치며 한없이 여유로운
곳이지만, 직업 없이 향토 fund에 목숨을 걸고 있는 분은 한없이 불안한 곳입니다. 삶의 진진한 성찰은 사치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생존의 언어의 두 성격을 객관적으로 보고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즉 생존의 언어를 부정적으로만 보기 보다는 이런 생존의 언어들을 특수한 문화의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적 인식이 필요합니다.
6. 교회라는 회색지대
종교를 갖고 있는 분이건 그렇지 않은 분이건, 이민지에서 교회 (북미에서 소수 불교를 제외하고는 절대 다수가 기독교회)가 갖고 있는 조직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민문화를 형성하는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핵심적 구조가 제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하는 이민자 정착 서비스나 바자회 등을 통해서 지역사회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현 교회는 [하나님/하느님-교회-이민자]의 구조, 즉 이민자들이 선교의 대상으로만 간주되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역으로 이것은 [하나님/하느님-이민자-교회]의 구조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신과 이민자를 연결시키는 봉사의 기능을 해야 하는데 교회는 오직 이민자를 끌어 모으는 데만 주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7. 부족 사회의 축소판으로서의 교회
그러니까 교회가 이민자를 위한 봉사 조직이 아니라 이민자가 허덕이는 생존의 언어를 동일하게 복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민지에서 신규이민자 유입이 줄어들면 정체현상을 빚듯이 교회 역시 동일한 정체 현상을 경험하지요. 여기까지는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 역시 게토화되었거나 새로운 형태의 부족사회라는 점입니다. 부족사회에서 추방 (ostracism)을 당하면 죽음을 의미합니다. 즉 그 부족 사회를 벗어나면, 추방자는 야수들이 들끓은 정글에 헤메거나 낯선 이방 부족들에 의해 살해 당할 수 있습니다 (언어라는 장벽의 정글에 내팽겨쳐짐).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이민사회에서 장사라도 하려면 큰 교회에 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같은 부족끼리 사주고 팔아줘서 자급자족을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교회는 생존이 제 일 명제인 이민사회의 축소판이지요. 큰 교회에서 집사나 장로가 되면 사업에 보다 더 안정적인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서러운 이민사회에서 자신의 서러움을 대리만족시켜 줄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구요. 그러니까 여러분 중에 절대로 불교도나 몰몬교도나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도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런 사실이 발각 (?)되면 장사 때려 쳐야 합니다. 아예 추방을 예상하고 이민사회와 관련이 없는 커피 전문점이나 gas station을 운영하는 것이 속 편하겠지요.
8. 다시 오리엔탈리즘으로
이러한 이민사회가 갖는 특수성 때문에 한국인끼리의 부정적인 이야기가 난무합니다. 사회가 워낙 작아서 잘되면 쉽게 시기의 대상이 되고, 못된 소문은 진위 (眞僞)에 상관없이 순식간에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찍혔다간 살아남기 힘들지요. 그래서 이러한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끼리끼리 모임도 만들고(지나치면 패거리 문화를 형성함), 무슨 선거에 후보로 나와 명망을 쌓으려는 눈물겨운 일도 벌어지지요.
하지만, 이런 노력은 개인적인 영달을 위한 고분분투일 뿐입니다. 우선 이민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이러한 노력은 말로만 떠든다고 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한 것입니다. 이민자 각자가 가족주의, 부족주의를 초월하여 이 부족이 갖는 배타성을 극복하여 다른 부족들과도 교류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하는 것이지요. 이런 극복의 중심에는 캘거리로 보면, CN드림이나 열린마당과 같은 좋은 인터넷 웹사이트의 봉사기능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캘거리 한인회와 같은 범 조직체나 큰 교회들이 해야 하겠지요. 교인 수십 명에 허덕이는 교회나 무슨 무슨 향우회니 무슨 무슨 동창회니 하는 또래 집단은 제 앞길도 차리기 힘드니 힘있는 조직에게 큰 기대를 걸어야 하는데, 낙관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