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숲의 머리를 이고 문을 닫는 저녁의 오솔길에는
연두빛 느릎나무 잎새에 부는 풋풋한 바람을 가르고
방금 누군가 지나간듯 하다.
숲 속에 고여있는 고요한 외침을 딛고
침묵으로 이어진 길의 한쪽 끝에는
오래 전의 기억 한 자락인 양,
불그스레 젖어가는 눈(眼)을 닮은 노을이 걸렸다.
그리움의 세계에서 길을 잃은 한 외로운 영혼이
부시시 공기를 흔드는 소리.
나무들은 팔을 내둘러 처연한 바람막이 시늉을 하고
다람쥐 한 마리가 숲 속 길을 가로 질러
짙은 그늘 사이로 몸을 숨길 때,
홀현히 밝아지는 숲의 어깨를 타고
부드러운 신음소리가 시냇물로 흐른다.
바위 틈새 점점이 얼룩진 물굽이가
아련히 잊혀진 기다림을 다시 부르고,
속삭임으로 튀어오르는 물방울들은
건조하게 말라붙은 세상의 굳은 가슴을 툭툭 친다.
그 소리에,
오래 전의 상처들이 새롭게 뜨거운 피를 흘리고
죽음으로 향하던 땅 위의 낡은 언어들은 놀란 새들처럼
하늘로 비상한다.
쓸쓸한 도처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나무들의 두런거림.
' 누군가 우리들의 평온한 고요를 시기하고 있어...'
숲 속의 오솔길은 이제 더욱,
영롱한 밝음을 어둑한 사방에 뿌리고
몽유의 흔적 같은 길잃은 발자국은
자기도 모르게 숲으로 이어진 거대한 입구 앞에 머무른다.
눈물로 밝아진 길의 한 가운데 인화(印畵)된 긴 그림자가
자기는 더 이상 허물어진 육신의 껍질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