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운의 "몸"의 기억
우리의 몸은 삶의 기억을 간직한다.
몸이야말로
뇌의 기능보다 더 분명하게 삶의 과거를 축적한다.
마치 몸으로 흡수되면 배출되지 않은 수은과 납처럼
우리 몸의 구석구석에는 과거의
기억이 고통스럽게 저장되어 있다.
시내 운의 이 시는
”몸”이라는 현상이 빚어내는 세 인생의 몸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에 자기 정체성을 이어온 몸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경제적 풍요가 주는 과잉과 잉여를 걷어내고
인간 실존의
직접성으로 들어간다.
하나.
인생의 황혼 길에도 노동이 짓누르는 노인의
주름에
담긴 기억
둘.
병든 사람의 몸에 간직된 고통과 외로움의
기억.
셋.
인생을 하직하고 마지막 잔존물인 뼛가루에 담겨 있을 말 못할 기억.
이 세편의 드라마 속에 나타나는 기억의 이야기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삶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망각한다.
인생의 막장이 내게는 해당되지 않은 것처럼
나의 삶 자체가 물상화된다.
내가 일구어 놓은 직업적 성취에 갇히고
내가 만들어 놓은 집이라는 공간에 안주한다.
노인은 누구의 주목도 없이 그렇게 담배연기처럼 스러져 갈 터인데
2006년 5월 7일 새벽
죽어버린들
시신이
타다 남은 뼛가루가 강물에 뿌려진들
너는 나의 타자이니
바람처럼 나에게서 사라지고 말 터인데….
땀 냄새 절은
수건에
윤기 잃은 주름살에
낙엽의 잔해처럼 묻힐 병들은 몸에
허망하게 날리는 뼛가루에
시인은 기억을 더듬는다.
이는
타인의 몸 속에
내가 들어가 함께 느끼고자 하는 (empathy)
애상을 덧없다 하지 말자는 몸부림일까?
몸의 기억을 함께 나누고 느낄 때
인생의 의미를 위한 기준이 형성되는 것일까?
”생존”이라는 삶의 과잉과 잉여에서
결핍과 버려짐이라는 “삶”의 최대의 소외인
나이들고 찌든 노인.
병든 몸
몸의 뼛가루에서
기억을 더듬는
시인의 마음은 도대체 무엇일까?
왜 시인은 이런 소외된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이것은 잔인하다.
자신의
뇌 (腦) 고문 (torture)이다.
이런 타자의 삶이 주는 기억의 고문에
시인은 들어가 있다.
시타르타가 본
生老病死
예수가 본 갈릴리의 병들고 귀신들린 인생들.
恨이 낙엽처럼 쌓여 巫의 씻김굿을 갈구하는 혼백들
이는
과잉과
잉여로 넘치는 번쩍거리는 네온간판을 걷고
삶의 실존으로 들어가라는 경고음.
우리의 삶의 의미는 미리 구조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잊고 싶은 기억의 현실.
거기에 정직하게 참여할 수 있는 용기
바로 시인은 그것을 노래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 시내
운 님께서 남기신 글
삭신이 쑤셔 대도
등짐지고 태연한 노동의 표정
땀 냄새 쩔은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아 내며
거친 삶에 닳고 닳은
윤기 잃은 주름살 사이로
죽음의 그림자 처럼 기어드는
담배 연기에 가리운
초연(超然)한 표정은
병들어 누은 낙엽의 잔해
수많은 이별을 간직한 사연
재회를 기약 못 하는
수척해진 겨울나무 상수내기
매서운 칼 바람 껴안고
임종을 채비하는
잎새의 체념어린 숨결
그 갸날픈 숨결 끝자리에 매달린 미련
아쉬운 잔 기침에 묻어나는 표정은
얼크러진 실타래를
죽어서야 풀어 내듯
평생을 응어리져 맺혔던 한(恨)
망자의 희고 고운 뼈가루
흐르는 강물에
울음 섞어 뿌릴때
희뿌연 물 안개 사이로
어른 거리는 희노애락의 표정
얼기 설기 엉키어
밀려와 안길때
잿빛 하늘에 어른대는 친근했던 표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