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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짧은 (생각이) 소견
작성자 종교     게시물번호 -3742 작성일 2006-06-26 06:11 조회수 757

강현님의 글에 다른 댓글이 없어서 저의 소견을 답니다. 특별한 것은 없고, 원론적인 것들입니다. 토론을 위한 소재이며, 완결된 의견도 아닙니다. 오랜 만에 나오시는 것같아서 인사 겸 글을 올렸습니다.


1. 종교 전문가 집단
강현님께서 종교 전문가 집단의 권력에 대해서 잘 지적하셨습니다.


성서가 기독교인의 신앙을 위한 경전인지는 모르지만, 성서에 대한 평가를 목사나 신학자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어느 누구든, 심지어 반기독교인이나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성서비평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야 합니다.

 

언어학자 촘스키를 보고 "정치" 전문가들이 당신의 전문분야가 언어학인데 왜 정치에 대해 아마추어적인 발언을 하느냐는 비판에 대해 촘스키는 단호히 자신이 정치에 대해서 비전문가로서 발언을 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촘스키의 이런 “행각”은 그의 수십년 간의 정치적 발언이 유의미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학문에 보수와 진보가 있는가?
이 질문은 애매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학문에서 진보니 보수니 하는 그런 학문성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I know of no such thing as liberal or conservative biblical scholarship). 학문의 세계에서 학문의 엄밀성 (academic rigor)이 있을 뿐이지 무슨 뚱딴지 같은 보수니 진보니 하는 편가르기가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이 입장에 동의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판사회학에서 본다면, 어느 누구도 사회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본다면, 분명히 보수냐 진보냐 하는 두 진영이 사회적 현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상호 불침투의 원리를 누가 주도하느냐, 즉 진보니 보수니 하는 편가르기를 누가 주도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학문 공동체는 연구와 비평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발전되는 것인데, 특정 신학적 이념을 고수하기 위해 “반동적” 조직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바로 학문의 침해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보수니 진보라는 입장은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설득력있게 연구를 제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보수 근본주의의 위험은 자기들의 입장의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절대화한다는데 있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대결구도에서는 학문적 대화나 건전한 비평은 사라지고 권력행사만 남게 될 것입니다.

3. 교회 권력은 피할 수 있는가?
저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종교가 정치나 다른 사회 집단이 그들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의 측면에서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집단이 형성되는 순간 자기 조직 유지 (maintenance)는 불가피합니다. 이는 범죄 (crime)의 경우를 들어도 마찬가집니다. 범죄자와 경찰은 공생관계입니다. 범죄가 계속 발생해야 경찰 조직은 더욱 더 견고히 유지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찰조직은 새로운 fund나 project를 따기 위해서 또는 예산 삭감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종교 조직 역시 성스런 집단이 아니라 문화의 한 현상으로서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 권력을 침해하는 대상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 이론은 기독교의 자기 조직 유지의 한 양상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 우주 기원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인 대안이론을 제시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기존의, 전통적으로 믿어 온 기독교의 “독점적 세계관”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의 표현이 바로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 이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 같은 과학의 “이단자”들이 근절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합리적인 기독교 꼴통 얼트라 보수 주의자들의 황당무개한 논리가 아니라 자신들이 누린 믿음의 아성을 지키기 위한 합리적인 노력과 권력행사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4. 불가피한 문화적 현상: 반공주의나 창조과학은 시대의 산물
사람이 인도에 태어나면 힌두교인이, 사우디아라비아에 태어나면 무슬림이 될 확률이 거의 100%에 가깝듯, 반공주의와 창조과학은 시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socially and culturally constructed). 반공주의는 한국전쟁과 박정희의 전체주의 권력이 빚어낸 산물이듯, 창조과학은 근대성의 반응으로 나타난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이나 현대의 세속적 계몽주의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창조과학과 그 아류인 지적 설계 (기독교 권내에서만 한정한다면) 이론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신존재증명이나 창조자 신에 대한 주제는 근대적 계몽주의가 나오지 않았더라도 많이 운위되던 것이었습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 되는 실재 (reality)를 묻고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인간 존재의 근원을 신에 두고, 불교인들이 우주의 법에 묻고, 유교인들이 하늘의 법도에 두는 것은 근원을 묻는 인간의 궁극적 실재를 향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근원에의 질문은 단순히 인간 기원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인간됨과 삶의 의미를 묻는 탐구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자유로운 탐구의식이 특정 신념으로 절대화 될 때, 인간의 자유로운 탐구는 중단되고 말 것입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에 대해서 학자들이 우려를 보내는 것은 그들의 신념이 잘 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보수적 신념을 절대화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회나 지적 설계니 하는 것 역시, 과학적 지식의 힘을 빌어 기존의 신념을 절대화하려는 의도 때문에 우려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이론에 대한 주장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학계에서 이런 류의 주장들을 과학의 이단 (heresy)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단적 주장이 기존에 확립된 이론을 더욱더 정교화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5. 실존적 고뇌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을 묻습니다. 즉 신의 존재를 고민합니다.
이를 믿음없다고 하시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는 시지프스처럼 매일 신을 묻습니다. 삶의 의미를 묻습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의심합니다.
저의 의심은 질문이고
해답을 향한 몸부림이고
신과 대화하는 방식입니다.

신의 창조의미는 무엇인가?
참으로 지적인 존재가 이 세상을 설계했다면, 그 설계자의 참 의도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평등한 대접을 받고
샬롬이라는 평화의 인사를 하고
정의가 살고,
사랑이 넘치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참으로 지적인 존재가 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우리 인간도 지성적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권력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하지 말고,
서로 존중하는 지성적 공동체,
그런 모습이 왜 교회는 없는 것일까?

아마도 신은 지적인 존재가 아니었거나
그런 신을 믿는 인간이 잘못 되었거나
둘 중의 하나는 아닌지…?

기독교회가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이론을 주장하려거든
먼저 기본 바탕을 닦아야 하지 않을까요?
다양한 비평이 수용되는 교회.
대학에서 교양과목 정도의 수준이라도 수용되는 교회
포이어바하
맑스
프로이트의 원전이 읽혀지기도 하는 교회
그런 교회가 다수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면,
지적 설계이론은 사실로 증명될 수 있을 것같다고
저는 “믿습니다.”
대학에서 배우는 교양 과목수준이나
아니면 자연스럽게 강의되는 개론서 정도의 내용을
교회에선
침묵을 강요당하는 때에
도대체 지적 설계이론의
현실적 설득력이 어느 정도 있을까요?

지적인 하나님은 기독교인이라는 군중 속에서
외로움을 타고 있는지 모릅니다.
바람타는 섬처럼…




☞ 강현 님께서 남기신 글


저는 종교담론을 주제로 이야기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이 분야에 문외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토론 마당에서 별로 재는 것이 없는 무모한 성격인지라 또 자판을 두들겨 대고 있습니다. 너그럽게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작년 봄엔가 한 교포신문에 소설 Da Vinci Code에 대한 일부 종교계의 반응을 주제로 한 칼럼을 쓰면서 저는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신 구약에 나와 있는 모든 기록들을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만 올바른 믿음이라는 생각은 자신을 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시에는 제가 ‘히브리경전’ 이나 ‘기독교경전’ 이 아닌 신 구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용어가 기독교의 주관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특히 구약이라는 용어는 유대교에 대한 모욕이라는 어느 분의 의견을 제가 받아들인 뒤로는 가급적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제가 기독교 신자이니 만큼 신약이나 성서라는 용어사용 마저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성서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문서가 아니라 성서기자마다의 주관적인 고백 언어로 구성된 일종의 고백문학이라는 데는 종교학자들 사이에 별 이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백 언어가 계시의 성격을 가지든 교훈의 의미를 가지든 그것도 독자의 주관적 선택의 영역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여담이지만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전문가집단(여기서는 신학자 또는 목회자들)의 해당분야에 대한 무소불위의 권위를 믿지 않는 저 자신의 일종의 결벽증에도 연유가 있습니다. 저는 학문을 하건 진리를 탐구하건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이 전문가의 권위에 학적 정당성을 무작정 의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문가 집단이란 연구 소산물의 단계단계마다 이에 대한 기득권과 이해관계, 계보이익 그리고 명예 때문에 학문적 솔직함이 때때로 구속 받을 경우가 있습니다. 고급지식이 점점 대중화 돼 가고 있는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과거에는 이런 정지상태를 돌파하고 새 지평으로 논의를 끌어갈 수 있는 통로가 분야에 따라서는 매우 제한적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목사님들도 주지하시다시피 한국의 상당수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미국 남부의 일부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성서해석에 대한 저와 같은 의견에 전혀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동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런 주장 자체를 적대시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분들은 고백언어로 된 성서를 환기독법이나 문학적 음미가 아닌 일종의 인식론적(?) 방법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Biblical Literalism이라는 그들만의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 일종의 사전적 해석입니다. 저는 가끔 그분 들이 혹시 성서를 조선시대의 승정원일기나 국회속기록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만의 Biblical Literalism이란 고증학 해석학 번역학 같은 실증과정의 기본도구조차 미리 해석된 성서기록의 문자적 정당성을 증명하는데 봉사할 것을 강요합니다. 제 부족한 소견으로는 본말이 전도된 매우 황당하고 이상하기 짝이 없는 해석 방법입니다.

 

거꾸로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과 관련된 어떤 주제들에 대해서는 또 멋대로 성서기록의 역사적 과학적 사실성을 먼저 고백하고 이 고백에 준거하여 이론을 창조해 나갑니다.

 

이제 질문의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보수 기독교의 성경 읽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꺼낸 이유는 현재 북미에서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는 지적설계이론(Intelligent Design)에 대한 개인적인 의문 때문입니다. 기독교 우파가 적극 밀고 있는 이 이론 역시 앞서 언급한 ‘이상한 성서해석 방법’과 기본적 궤는 같이하고 있지만 근본주의가 고수하고 있는 문자주의에서는 거의 이단이라 할 정도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적설계이론을 공인된 과학이론화 하려는 미국 보수 기독교계의 노력은 필사적 입니다. 이미 지난 해 12 월 문제가 됐던 펜실베니아 주에서 법원이 이 이론에 대한 교육금지 판결을 내린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이론을 사립학교는 물론 공립학교의 교과교재 내용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자연주의에 입각한 자연과학 연구방법론의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한 초자연적인 지적존재를 설계자로 가정하고 있는 이 주장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론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달리 부를 말도 마땅치 않으니 그냥 이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서해석에 있어서 창조론과의 분명한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지적설계이론(Intelligent Design)이란 진화론에 대항하기 위해 보수 기독교 진영의 일부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새로 만들어 낸 약간 세련된 형태의 창조론이라는 과학자들의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동안 說話에 불과한 창세기에 과학을 꿰어 맞추려 한 기존 창조과학회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들의 주장이 학계나 언론계에서 더 이상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 우스개거리로 전락한 것 과 때를 맞추어 슬그머니 등장한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론의 주장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보도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그 쪽의 주장을 원문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Critics of the theory of intelligent design often assert that it is simply a re-packaged version of creationism, and that it began after the Supreme Court struck down the teaching of creationism in Edwards v. Aguillard in 1987. In reality, the idea of intelligent design reaches back to Socrates and Plato, and the term “intelligent design” as an alternative to blind evolution was used as early as 1897. More recently, discoveries in physics, astronomy, information theory, biochemistry, genetics, and related disciplines during the past several decades provided the impetus for scientists and philosophers of science to develop modern design theory. Many of the central ideas for the theory of intelligent design were already being articulated by scientists and philosophers of science by the early 1980s, well before the Edwards v. Aguillard decision

 

이 글은 지적설계이론 주장자들 중의 한 사람인 Dr. Witt, Jonathan이라는 사람이 쓴 논문 The Origin of Intelligent Design (부제 A brief history of the scientific theory of intelligent design)의 서문입니다.  보시다시피 그는 지적설계이론이 단순히 창조론을 재포장한 것이 아니며, 법원이 창조론 교육을 금지한 1987년 이전인 1980년대 초반에 지적설계이론 내부의 많은 중심이론들이 이미 정리돼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Dr. Witt의 반론에?불구하고 이 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연방대법원에서 ‘창조론추방’결정이 난 직후인 1990년 대 초반입니다. 여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은 건 펜실베니아 주 법원의 금지 판결로 세상이 시끄러웠던 작년 12월입니다.

 

본인들은 자신들이 창조론의 후예가 아니라고 공개선언하고 있고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며 창조론을 믿고 있는 기독교 우파는 지적설계이론을 목을 메고 지지하고 있으니 뭐가 뭔지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기원이야 어찌됐든 지적설계이론은 진화론에 대적하는 기독교 우파의 새 무기로써 현재 미국 시애틀과 워싱턴 DC 두 곳에 연구소를 두고 있는 Discovery Institute 라는 조직에 의해 유포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조직이 연구소인지 종교단체인지 아니면 비주류 과학자들의 동아리인지 잘 가늠이 안됩니다. Center for Science and Culture 라는 재미있는 로고를 가지고 있는 이 단체의 홈피 한 Section(Academic Freedom)에 주목할 만한 수상쩍은 글귀들이 있어 옮겨 봅니다.

 

Across America, the freedom of scientists, teachers, and students to question Darwin is coming under increasing attack by what can only be called Darwinian fundamentalists. These self-appointed defenders of the theory of evolution are waging a malicious campaign to demonize and blacklist anyone who disagrees with them.

 

Free speech and academic freedom are cherished principles in America. They are too important to be sacrificed to the intolerant demands of extremists on any issue.

 

“‘다윈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과학자 교사 학생들이 진화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자유마저 갈수록 자심한 공격을 받고 있으며, 이들은 자기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마녀사냥 하는데 혈안이 돼있다” 는 과격한 문장에서 보듯이 이들은 과학자 조직이라기 보다는 패러다임 전쟁을 선포하고 있는 투쟁적 종교단체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문장에서는 한층 극우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 “학문과 표현의 자유는 어떤 이유로도 포기될 수 없는 미국의 원리적 가치”라는 이 주장은 미국 극우파의 논리와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극우세력과 조직적으로 연계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문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의 표현이 금기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수정헌법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미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다원성 때문에 증오와 차별을 선전하는 표현을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적설계이론이 표현제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자연과학분야에서 공인된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과학의 정론 중 하나로 선택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마치 자유로운 표현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탄압을 받고 있는 것처럼 왜곡된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欲駭?별 상관도 없는, 증오와 차별 선전방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사회적 제한’을 표현자유탄압이라는 개념과 연계시키는 것으로 볼 때 이들이 어떤 이념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되기도 합니다. .         

 

중요한 것은 창조론이건 지적설계이론이건 히브리경전의 창조설화를 바탕으로 한 종교적 주장일 뿐이지 실증이 가능한 과학이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국이 神政국가(그것도 기독교 근본주의나 복음주의에 입각한)를 선포하고 과학방법론의 패러다임을 중세기식으로 되돌려 놓지 않는 한 이 종교적 주장을 교육교과교재로 채택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미 과학자들은 창조론이건 지적설계이론이건 이들과 더 이상 쓸데없는 논쟁도 아닌 논쟁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미리 전제했다시피 두 이론은 특정 종교의 당파적 문헌해석 방법론에서 비롯된 ‘상상의 나래’에 불과합니다. 

 

북미사회의 합리적 다수는 이런 종류의 상상의 나래를 정론으로 공인해 줄 것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는 미국Christian Fundamentalist들과 일부 Evangelist들을 Moron 이라고 부릅니다. 몇 해전 캐나다 연방 수상비서실의 고위당국자가 공개석상에서 부시를 가리켜 Moron이라고 조롱했다 해서 양국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된 적도 있습니다.

 

Moron 이라는 단어는 이미 본래의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 ‘종교신앙과 같은 지극히 주관적인 고백적 가치를 일반적 진리로 착각하고 다른 주관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타인들에게 강요하는 유치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착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이들의 행위가 ‘인지상태에서 행하는 고의적 잘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제 생각에 대한 반론이 아니라(반론은 이미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많이 들었습니다) 창조론을 성서무오의 입장에서 믿고 계신 분들이 지적설계이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북미에서는 이 이론으로 말미암아 보수 기독교 내부의 일부 근본주의자들과 수정론자들 사이에 싸움박질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성서 해석에 있어서 고전적 문자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측의 눈에는 창조주를 설계자로 격하시키고, 그 설계자로서의 신의 존재마저 ‘불가지’라는 입장아래 이론내부에 정론으로 포함시키지 않은 이 무엄한 수정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아직 심각한 대립의 양상이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한국의 대부분의 보수 기독교인들도 그 흔들림 없이 충성스러운 신앙으로 미루어 미국의 정통근본주의자(지적설계이론 지지자들과 개념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제가 임시로 만들어 낸 비공식 용어입니다)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적설계이론이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공세에 굴복한 비겁한 변절이론이라고 비난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저는 아직까지 한국의 보수기독교인들 중 근본주의적 시각에서 이 지적설계이론이 ‘성경말씀’을 무엄할 정도로 일탈한 것에 대해 격렬히 비난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성서무오설에 입각한 기존의 창조론을 포기하고 스스로 수정이론임을 선포한 이 지적설계이론을 새 정론으로 채택할 의사가 있는 것인지 여부가 매우 궁금합니다.

스스로 정통보수라고 생각하시는 목사님들이나 교우님들의 답변을 기대합니다.

 

추신:

 

• 사실 이 문제는 전문가이신 ‘종교’님에게 개인적으로 조언을 구할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목사님들에게 공개질문 드립니다. 현장에서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목사님들의 생동감 있고 진지한 견해를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이 질문은 곧 모국의 대표적 진보교단(요새는 진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가 쑥쓰러울 정도로 보수화되고 있지만)인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님들께도 이 교단의 총회 게시판을 통해 드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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