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캘거리 시눅검도관의 낭만검객입니다.
오래 간만에 여러분께 인사올림니다.
오늘의 검객열전 주인공은 야뇌 백동수입니다. 조금은 생소한 인물인데요. 한번 찬찬히 어떤분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저번에 제가 황진이라는 인물을 검객열전에서 다루면서 활쏘기에 대하여 말씀 드린적이 있는데요. 활쏘기는 조선의 주력
무기체제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지형상 산성에 의지하여 적은 병력으로 큰적을 물리치는데 효과적이여서 고대로 부터 발전해온 전술적 무기술 이였죠.
또한 조선의 각궁은 그 파괴력과 스피드 그리고 사정거리에 이르기까지 가히 전세계에 대적할 활이 없을정도로 최고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임진, 병자 양란을 거치며 활쏘기에 전적으로 의지하여서는 한계가 있음을 뼈저리게 느낌니다. 이는 야전에서 근접전을 벌이는 상황이 되면
활쏘기에만 익숙한 조선군이 창칼운용에 미숙해서 매번 적에게 당하기 일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일본군이 칼을 빼들고 돌격을 감행할때는 조총에서
느끼는 공포감 보다도 더 큰 공포감에 사로잡혀 도망가기 바빴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자 이에 대한 반성차원에서 조선에서는 새로운 병영체제와 함께 단병접전용 무예를 병사들에게 집중 교육시킴니다. 이런
분위기하에 동양최고의 무예서가 출간되는데요. 그 무예서가 바로 무예도보통지이죠. 백동수는 바로 이 무예도보통지 간행팀의 무예감독이였습니다.
백동수는 정조의 명에 따라 당시 각 병영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이던 창술, 칼쓰기를 통합하고 이를 무예도보통지로 기록한후 다시 각 병영에 보급하는
역할을 했던거죠. 이는 백동수가 당대 최고의 무인이였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병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로 장용영이라는 친위 군영을 만드는 데요. 지금으로 말하면 청와대
특별경호사단이였던거죠. 백동수는 이 장용영의 초관으로 병사들의 무술교관이기도 했습니다.
조선 최고의 무인으로 추앙 받던 백동수의 말년은 그리 행복한것이 아닌데요. 정조의 죽음 후 장용영이 해체되는 것을 보면서 그도 쓸쓸히
초야에 뭍이게 됩니다.
사족: 백동수가 그리도 애써서 이루어 놓은 무예도보통지의 각 무예들은 지금 그 전승의 맥이 끊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무예단체들이 무예도보통지를 보고 복원한 본국검법은 그 모습이 전부 제 각각입니다.
시눅검도회는 비영리 검도동호회로 매주 금요일, 일요일 저녁 7:30에 YWCA에서 수련을 합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
기다리겠습니다.
낭만검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