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님,
댓글 감사합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비굴이 아니라 타인이 하는 것을 인정하는 능력이며, 타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여유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기 생각이 고정되어 완고해지기 쉬운데, 저 또한 그렇게 되지 않나 늘 긴장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나의 ism을 이야기하기 전에 현대는 다원성의 사회라는 것입니다. 이런 다원성의 사회에 대한 하나의 반응을 종교다원주의라고 볼 수 있겠지요. "내"가 종교다원주의를 인정하건 하지 않건 간에 다원성은 우리의 삶의 중요한 실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종교적 다원성에 대해서 종교학적 성찰이나 발언을 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유일성을 부정한다거나 어느 특정 종교를 절대시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학은 여러 종교적 실재들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인데, 이마저도 교회에서 수용되지 않은 것은 다른 종교를 배타적으로 볼 때만이 기독교의
독특성을 증거할 수 있다는 오해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삶에 대해서 곧은 지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대쪽같은 신념과 타협하지 않은 의리,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존중해야 하는 삶의 가치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본인에게만 적용되어야 만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고백 (confession)의 언어라고 합니다. 유교인들이 경의 삶을 실천하여 선비의 겸양을 보이거나 불교인들이 보시를 통해서 많은 공덕을 쌓는 모습이나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지조와 의리의 종교적 실천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조와 의리가 다른 종교를 배척해서는 안되겠지요. 오히려 나와 다른 이런 삶의 실재를 보면서 경탄하는 마음으로 자기 종교에 더욱 충실하면 됩니다. 이것을 다원 사회에서 종교삶이라고 명명해도 될 것입니다. 또는 이것을 자기 종교의 객관화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자기 종교에 대해서 객관화를 시키지 못하면 종교적 독단주의 (dogmatism)가 됩니다. 이런 독단주의는 기독교는 물론 불교, 유교나 다른 종교에서도 수없이 나타납니다. 힌두교 안에서도 불가촉천민 (the Untouchable)에게 행하는 테러리즘이 횡횡하는 것도 종교적 독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투적 근본주의 (militant fundamentalism)는 기독교에서 뿐만아니라 유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에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겠지요.
하늘님이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예수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은 바로 그런 독단적 해설과 설교가 주를 이루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실은 한국 개신교의 발명이 아니라 사투리였습니다. 옛날에 지역에 따라 하느님, 한울님, 하나님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었는데, 하나님으로 투표하여 결정되자 여기에다가 기독교에서 유일신 관념을 강하게 투영시킨 결과가 현재 통용되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종교와 정치가 결합되는 형태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둘째 문제로 치고, 유대교 안에서 개혁적인 유대교의 목소리가 적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더구나 나찌의 홀로코스트 이후에 형성된 유대철학적 반성이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은 이 현실은 미국에서 평화와 화해의 신학을 지향하는 집단이 주류가 되지 못하고 현실과 맞물리고 있군요. 원효스님의 화쟁, 원융회통 사상이 기독교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화해의 신학"으로 번안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삶의 과정 속에서 실천되는 아름다움을 보고 싶습니다.
제가 가장 중요한 단어 세 단어를 고른다면
사랑 (love), 정의 (justice), 평화 (peace)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화두는 평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푸른 하늘만큼이나 텅비어 채울 빔이 있다면, 평화는 오지 않을까요?
May peace (of Christ and Buddha) be with you!
(그리스도와 부처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저의 신앙고백입니다.
☞ 하늘 님께서 남기신 글
제가 하늘을 필명으로 좋아하는 것은
하늘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늘이야말로 빔과 채움의 공간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한 빈듯한 채워짐, 또는 채웠지만 비어있는 하늘이
나의 삶에 투영되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종교님의 다양성에 대한 관점과 신념은 참으로 언제나
놀라울 뿐입니다.
스스로 깊은 확신과 앎에 대한 치열한 분투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종교 다원주의라는 것이 기독교의 유일신주의에 정면 배치되어
웬만한 교회 彭?【??인정되지 않는 풍토에서 늘 주위를 의식할 수 밖에 없었던 그간의 삶을 돌이켜 볼 때
종교님의 일관되고 깊이 있으며 정돈된 시각이 제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지표가 되는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 가운데 끊임없이 샘솟는 여러 가지 의문들과
질문들에 대해서 지적 갈급함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님과 같이 종교학을 공부하거나 또는 신학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절망할 때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통상의 목회자들로부터는 이와같은
다양하고 풍부한 해석과 명쾌하고 조리있는 말씀을
듣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약에 대한 수많은 의문, 특히
'그들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는 주요
논지를 동의할 수 없을 때, 근래의 레바논 침공과 관련하여
벌어진 참상들을 보면서 가나안 정복기의 수많은 참상들이
오버랩 되는 가운데 더욱 반감은 깊어졌습니다.
아무도 이에 대한 나의 의문에 답을 주지 않더군요.
예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데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설교 내용을 반추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전혀 다른 존재 같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종교님..
앞으로도 더 많은 종교님의 다양한 글들을 읽으면
아마도 답은 찾아지겠지하는 막연한 생각도 해봅니다.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하늘 한가운데서.
☞ 종교 님께서 남기신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