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소설 연구」(4)
삼일운동 이후부터 광복이전까지 한인 영어소설 1
박영호
머리글
1910년대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초기 미주 한인 소설은 고국의 언어로만 줄곧 표현되어 왔으나, 삼일운동 이후인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차츰 소설의 내용이나 형식 등에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드디어 1920년대 말에는 현지어인 영문으로 표현된 소설이 등장하게 된다
이로써 미주 한인 소설은 표현 언어에서도 현지 영어 문장까지도 포함하게 되어 명실공히 미주 한인 이민 문학으로서의 완전한 형태를 이루게 되고, 아울러 미국 문학의 일부인 아시안 미국인 문학(Asian- American Literature)이나 한국계 미국인 문학(Korean-American Literature)이라는 하나의 미국 소수민족 문학(Ethnic minority American Literature)의; 하나로 자리잡기 시작 했다.
미주에서 한인에 의해 최초로 쓰인 영문 소설은 1928 년에 유 일한에 의해서 쓰여진 <When I was a boy in Korea>(내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이라고 할 수 있고, 이어서 1930년대에 들어서서 강 용흘에 의해 본격적인 소설인 ‘The Grass Roof‘(草堂. 1931년)와 <Eest Goes Wast > (동양인 서양에 가다. 1937년) 등이 쓰였는데, 이러한 영문 소설은 한인 국문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한 지 이십여 년 만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보단 때 늦은 감이 있지만, 이러한 점은 영문 소설을 쓸 수 있는 완전한 현지 영문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이만한 시간이 필요하게 된 점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고 본다. 그래도 이러한 시기에 벌써 한인에 의해서 영문소설이 쓰여 발표되었다는 점은 획기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영문 소설은 우리의 문화나 문학을 현지의 언어를 통해서 현지인들에게 소개했다는 점에서 우선 문학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겠고, 강 용흘의 <초당> 등에서는 그러한 문학사적인 가치를 넘어서서 소설적인 미학적 가치까지도 확실하게 지니고 있어서, 그 시대의 미국문학의 특색이나 경향에 전혀 관계없이 현지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어, 이름난 문학상 수상과 함께 많은 찬사를 받았다, 이런 연유로 이 작품은 다시 십 여개 국어로 번역 출판이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도 국내 소설에서 조차도 없었던 사실로 특기할만한 일이다.
이 두분 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1950년대의 백 인덕과 1960년대의 김 은국과 김 용익 인데, 이 분들 역시 모두 한인 일세 작가들이고 모두가 한결같이 고국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따라서 1930년대부터 1960 년대까지의 재미 한인 1세들이나 다름없는 재미 한인 작가들(Korean writer in America)의 작품은 표현만 영문일 뿐 내용은 고국에 대한 이야기들 이고, 1980 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이민 1.5세나 2, 3세들의 한국계 미국인 작가(Korean- American Writer)들의 작품과는 성격이 크게 다른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초기 한인 영문 소설들에 대한 연구는 부분적으로 꾸준하게 이어져 왔고, 근래에 와서는 보다 큰 관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강 용흘이나 김 은국, 김 용익 등의 작품에 대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연구 발표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들 한인 영문 소설들이 지니고 있는 그 특별한 가치나 문학사적인 공적 등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만족스러운 것만은 아니고, 실제 그 작품들이 지닌 문학적 가치와 함께 우리문학과 문화를 현지에 소개한 그 공적에 비하면 그 평가는 아직도 미흡한 편이다.
사실 1980 년대부터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 필요성이 제창되어 오던 세계화 운동이 이제 문화나 문학의 세계화에까지도 확대되어 노벨상 수상 등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기대에 접근할 수 있는 전진기지나 제일선으로서의 재외 동포문학에 대한 활용은 그만 두고라도, 재외 동포문학에 대한 바른 인식이나 바른 가치 규정에 조차도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재외 동포문학의 특별한 가치나 그 특색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 일으킬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재외 문학에 대한 보다 총체적이고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선 같은 영문 소설이라도 작자의 세대에 따라 따르고 시대에 따라 다르다. 다시 말하면 한인에 의해 쓰인 같은 영문 소설이라도 내용에 따라서는 한국 소설일 수도 있고, 한국 소설이면서 미국 소설일 수도 있고, 또한 순 미국 소설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 미주 한인 영문 소설에 대한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 연구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주 한인 영문 소설에 대한 연구에는 지금까지 그 누구에 앞서 유 선모 교수(경기대 영문학)가 그의 연구저서 <미국 소수민족 문학의 이해,한국계 편> 을 통해서 비교적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시작이고 이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보다 체계적인 연구나 정리가 이루어져야 하리라 믿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선 이들 한인 영문 소설에 대한 국적 문제다.
다시 말하면 우선 영문으로 쓰인 재미 한인 영문 소설을 우리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한 의견은 모두가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오히려 언급을 꺼려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지만,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영문 소설을 손쉽게 한국 문학이 아니라고 단정해 버리는 극히 패쇠적이고 보수적인 견해에 대한 문제다.
얼마 전 유럽 모 국가에 체류하면서 고국 모 문예 잡지에 체류기를 발표한 중견 문인도 일찍이 1934 년에 벌써 그곳 언어로 번역 소개된 강 용흘의 영문 소설을 보고 놀라와 하고 특기 할만한 사실이라고 소개하면서도, 이를 엄밀히 따지면 우리 민족문학이 아니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에 필자는 섭섭함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점은 실제 재외 동포문학 연구에 직접 참여한 분들 조차도 마찬가지여서, 재외 동포 문학의 특성이나 그 가치는 인정하면서도 한국 문학에 과감히 포함시키려는 국적문제에는 지극히 소극적이다.
예를 들면 강 용흘 작가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논술을 펼친 김 욱동 교수(서강대 인문학부) 조차도 그의 저서 <강 용흘 그의 삶과 문학>(서울대학 출판부 2004년)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그의 의견은, 그 어느 쪽에서도 밀침을 당하는 이들의 문학에 대해 ‘서얼문학’ 이라는 항목이라도 하나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미주한인 영문 소설의 그 특수한 성격에 대한 표현일 수는 있지만, 이는 재외동포 문학 이 지니고 있는 그 특별한 가치를 지나치게 폄하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국내 문학과 똑 같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재외 동포문학’이나 아니면 ‘한인 해외 문학’ 또는 ‘한인 이민문학’ 등으로 본국의 문학과 구분할 수 있고, 이렇게 사실적으로 성격을 구분하고 보면, 이들의 작품이 자연스럽게 한국문학에 포함되어지는 결론에 이르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문학이란 문자라고 하는 형태를 통해서 표현된 것이고, 영어는 외국어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래도 내용이 한국적인 우리의 것이라면 표현 방법에 관계없이 우리의 문학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은 나만의 지론은 아닐 것이다.
물론 독자가 현지인이니까 라는 표현도 있을 수 있지만, 이는 ‘우리 문학을 영문으로 번역해 놓았다면 그것은 한국 문학인가 아니면 다른 나라 문학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해 보면 더욱 이해가 쉬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내용이 순수한 우리의 것만이 아닌 소설도 있을 수 있어서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초기 영문 소설 작가들은 모두가 체류자나 다름없는 1세들이고, 한국인 사고 방식이나 한국인 정서로 한국적인 것을 표현한 것이니 이는 마땅히 한국 소설로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문학의 영역 확대나 세계화를 위해서라도 마땅한 것이고, 이에 대한 이의를 제시하려면 적어도 “왜 한국 문학에 포함시키면 안 되는가? “에 대한 답변으로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 이외의 보다 합당하고 구체적인 이유들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현지 미국인들이 이러한 문학을 미국 소수민족 문학이라고 구분해서 그들의 문학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키고 있는 점에서도 설명이 되고 있다. 물론 현대 미국문학이란 여러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다문화 사회 라고 하는 특수한 형태에서 이루어진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이러한 미주 한인 소설을 두고 그들은 소수 민족 소설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을 두고 미국 소설이 아니라고 표현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우리 한국 문학자들은 이를 두고 우리 문학이 아니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으니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문학의 세계화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우리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것만이 세계화가 아니다. 이러한 재외 동포 문학의 가치 있는 작품을 찾아, 이를 보급하고 이를 전진 기지로 삼아 우리 문학의 영역을 확대 발전 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 문학의 세계화의 한 지름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000년 노벨 수상자인 중국인 가오싱젠은 그의 대표작인 ‘영혼의 산’이 1990년 대만에서 출간되었으나 관심이 없었고, 다음해 스웨덴에서 그리고 1995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어 프랑스의 시민 자격으로 노벨상을 받았고, 레종 도뇌르 최고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프랑스인으로 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이러한 점은 이민 1.5세이며 미국 시민권자인 이 칭래가 모 잡지사와의 대담에서, 자신은 본국 작가에 앞서 노벨상을 수상하고 싶다고 말 했는데 이러한 말은 꽤 설득력이 있고, 그는 한국말에 서툴고 미국에서 자란 미국 시민이나 다름 없지만,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다면 그 업적은 다분히 한국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국적에 관계없이 한국인이고, 그의 작품 세계가 순수한 미국문학으로서는 빛을 보기가 힘들고, 소수 민족 작가로서, 그리고 그가 지금 까지 써오고 있는 것처럼 이중국적자나 이중 문화나 이민의 삶 등을 다룬 소수민족 소설로서 빛을 볼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이다.
따라서 이러한 재외동포 작가나 그들의 소설이 지니고 있는 우리 문학의 세계화에 대한 그 특별한 구실과 가치를 우리는 새롭게 인식해야 하며, 우리 문학의 세계화 일선에 나가있는 현지어로 쓰여진 우리의 재외 동포 문학이 보다 시급히 우리문학에 포함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소설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회성이 강한 한인 영문 소설에 대한 비평은 과거나 현재의 현상에 대한 규명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미래에 연계되어 나타나게 될 새로운 가치를 예견할 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시대가 바뀌고 있는데도 유독 우리만이 우리 것만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자세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미국 소수민족 문학에 대한 이해
사실 유 일한이나 강 용흘이 작품을 발표했던 1930 년대에도 미국에 소수민족 문학이란 형태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미국 문학이란 철저하게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앵글로 색슨 계통의 백인에 의해서 장악되고 있었고, 이외의 여성이나 흑인은 물론 외국인들의 작품은 거의가 무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1930년대에 쓰인 강 용흘의 작품이 미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미국 문단에서 상당히 권위가 있는 구겐하임(Guggenheim Award) 상까지 받았던 점은 정말 특기할만한 일이다.
그런대도 실제 그 시대 미국 주류문단에서는 그를 지속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사실 그 당시 그의 이름은 미국문단 그 어디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구체적 사실은 김 동욱 교수가 ‘강용흘, 그의 삶과 문학’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미국 그 어느 문학사전이나 기록물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다만 1988년에야 비로소 컬럼비아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컬럼비아 미국 문학사 >에서 처음으로 소개되고 있고, 이어서 1990년 미국 <히스 문학 앤솔로니>에 드디어 그의 작품이 수록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기록물로는 2002년에 출간된 <미국문학 백과사전 >(하퍼코린스 출판사)에 그의 이름이 등재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그의 작품의 가치와는 상관없이 그의 작품이 전통적인 미국의 주류 문학으로 인정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1980 년대부터 소수민족 문학이란 형태가 인정되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연구와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강 용흘의 경우만이 아니고 흑인 작가나 히스페닉 작가 등 모든 소수민족 작가들은 한결같이 이잔에는 철저히 소외 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풍토에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대전 이후인 1950 년대부터 유태인들을 필두로 한 소수민족 문학 활동이 활발하게 표면화 되기 시작 하면서부터 이고, 특히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1965년에 제정된 새로운 이민법으로 인해, 1968년부터 이민이 대량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이후로 전통적인 현지의 소수 민족인 아메리칸 흑인과 아시안 계까지 합세하여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경제 정치적인 측면에서 성공을 거두고 막강한 힘(Ethnic power group) 을 결집한 유태인들이 문학활동에서도 힘을 발휘하여 빛을 보게 됨으로써 소수민족 문학이란 형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태인 문학활동의 그 대표적인 작가는 1978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사무엘 벨로(Samuel Bellow)와 함께 버나드 맬러모드( Berard Malamud)와, 필립 로스(Philip Roth)등으로 이들이 견인차 노릇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유럽에서 오랜 세월 동안 다듬어온 그들의 전통적인 정서와 언어적인 아름다움을 현대의 신대륙에 옮겨와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로 유태계에 의해서 형성되어 왔던 소수 민족 문학활동이 1980 년대부터는 기타 많은 소수민족 작가들의 활동으로 더욱 활발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많은 원주민 흑인 작가들의 두드러진 활동은 이색적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아메리카 흑인 문학은 일찍이 1930-40 년대부터 미국 남부지방에서 하나의 집단문학 형식으로 발생하여 그 맥을 현대에까지 이어온 것으로, 이들의 작품 소재는 전통적인 백인문학과는 조금 다르게 주로 미국 독립정신에서 비롯된 자유와 평등 사상 같은 극히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민주 사상과 인간의 존엄성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꾸준하게 가치가 인정되어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들은 부단히 차별과 학대 속에 살았으며, 195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민권 운동 등을 통해서 힘을 얻어 비로소 1980 년대부터 미국의 건국 이념과도 같은 평등과 자유에 대한 그들의 노력이 이제는 모든 소수민족은 물론 미국 전 사회에 하나의 기본이 되는 정신과 이념으로 자리잡아가기 시작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흑인 문학의 초석이라 할 수 있는 초기의 남부 흑인 문학 형성에 큰 공적을 남긴 작가로는 <Native son> 을 발표한 리차드 라잇 (Richard Wright)과 1952년에 <Invisible man>을 발표한 랄프 일리슨(Ralph EIlison,)등이 있고, 1980년대 들어서면서 수 많은 흑인 작가들의 등장을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작가가 앨리스 워커(Alice Walker)와 토니 모리슨(Tony Morrison)이다. 앨리스 워커는 1982년에 <The Color of pople> 를 발표해서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풀리쳐 (Pulitzer)문학상을 수상했고, 토니 매리슨은 1988년에 <Beloved>를 발표해서 역시 퓨리쳐 상을 수상했고, 이어서 아프리카 아메리칸 문학자로서는 최초로 노벨상(1994년)을 수상했다. 이외에 이쉬멜 리드(Ishmael Reed)와 트레이 엘리스 (Trey Ellis), 그리고 존 와이드 맨(john Wide man)등 많은 흑인작가들이 있다.
우선 이러한 소수민족 문학 운동은 먼저 교육과 사회적인 면에서 등장하기 시작 했는데, 이전까지는 WASP(white-Anglo Saxon Protestant)라고 해서 미국 주류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미국의 전통적인 언어, 가치, 행동양식, 생활양식 등의 수용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일종의 동화론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해 로버트 파크(Robert Park. 1950)등은 동화 작업(Acculturation process)의 그 구체적 단계적 방법 까지도 제시하여 모든 인종이 미국사회에 동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밀튼 고든(Milton Gordon.)등은 이는 문화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구조적으로는 불합리하다는 점 등을 제시하고 보다 바람직한 동화운동의 필요성을 역설 하였다. 결국 멜팅 팟(Melting Pot)이라고 하는 비교적 합리적인 동화론이 제시되어 이른바 모든 문화나 언어도 하나로 화합하여 새로운 하나의 문화를 창조해 내자는 운동이 대두 되었다. 그러나 이는 얼핏 보면 아주 그럴싸한 자유 평등사상 같지만, 이도 엄밀히 따지면 다수인 백인사회에 동화 흡수되어 버리고, 소수민족 집단(Racial Minority)은 구조적으론 고립될 수 밖에 없는 모순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80 년대에 나타난 아브람슨(Abramson)의 다원주의(Pluralism)는 양상을 크게 달리하여 나타난다. 이는 소수민족의 문화나 언어도 미국의 문화와 언어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를 보존하고 병행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주장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민족 집단간 차이는 편견과 차별이 아닌 평등과 자율이라는 생각으로 시작 되었으나, 사실 초기의 이 다원주의는 다만 문화적인 동화로 민족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는 결과만을 달성했을 뿐, 권리라고 하는 정치적 기득권만은 양보하지 않으려는 이중적 구조라고 할 수 있는 불평등적 다원론(unequalitarian Pluralism)으로 모순점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평등적 다원론(Equalitarian Pluralism)으로 소수 집단들이 문화적 구조적인 면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권력까지도 평등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는 유태인들이 민족 동원론(Ethinic Mobilization Theory)이라고 하는 이념으로 무조건 동화하려 노력하지 않고, 그들만의 혈통과 유대교라고 하는 신앙과 그들의 고유한 언어를 바탕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며, 동족 서로의 유대와 단결력으로 경쟁력을 지닌 일종의 ‘보호된 집단 적소’(Protected Niches)등을 형성하여 힘을 발휘하고 정치적 권리까지도 완전히 지니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민 1세들은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고, 이를 교육에 투자하여 2세들로 하여금 현지에 적응하여 정치적 힘까지도 지니게 되는 자연동화 방식이 대두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노력으로 유태인들은 뉴욕을 중심으로 한 그들만의 집단 세력이 형성되었고, 또한 이러한 결과가 실질적으로 미국 사회에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이 많은 연구와 통계로 입증이 되자, 현지 정책 입안자들도 결국 소수민족의 힘을 인정하고 그들이 지향하는 문화 언어 보존에 동조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1950 년대부터 끈질기게 이어온 흑인들의 민권 운동과 흑인 문학자와 소수 민족 문학자들이 이 땅 위에 끈질기게 펼쳐온 평등과 자유 사상 등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도 일찍이 1900년대에 벌써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농장경영에서 경제적인 결집력을 보여 주었고, 배트남인들도 월남 패망 이후 미국 정부가 마련한 여러 지역에 분산 수용되었으나, 그들은 1970년대 오랜지 카운티의 가든 글로브 한곳으로 모여 살면서 그들대로의 민족 공동체(Ethnic Community)를 형성했고, 코리아 타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소수 민족집단이 현지에 동화 적응되어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동족간의 연대와 협력을 도모할 수 있는 지리적인 민족 기반(Ethnic Base)를 형성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나아가서 이제 모든 소수 민족들은 서로 병행해서 일종의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서로가 협력해서 완전한 권리 행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WASP(white-Anglo Saxon Protestant)라고 하는 종전의 일방적이고 거의 강압적인 동화 정책으로 규격화 된 단일문화(Mono-Cultural Pattern)에서, 이제는 모든 소수 민족이 그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자기들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누릴 수 있는 다문화 주의 (Multiculturalism)속에 살게 되었다. 이는 바로 스테인 글래스(Stain Glass)문화나 모자익 문화(Mosaic Culture)나 또는 샐러드 볼 문화(Salad Bowl Culture)로 표현 되기도 한다. 이는 종전 백인 위주의 일방적 동화론에 대한 소수민족을 위한 다원주의론 (Pluralism)의 빛나는 승리이며, 자유 평등 사상을 기본으로 하는 미국 건국이념이 실현된 것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많은 아시안계 문학자들의 활동이 돋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중국계의 작가 맥신 홍 킹스톤(Maxine Hong Kingston)을 비롯해서 애미 탠(Amy Tan), 그리고 인도의 바라티 모캐리(Barati Mukerjee )와 필립핀계의 제시카 해지돔(Jessica Hagedom )등이다. 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현지의 삶과 함께 자신들의 고국이 지니고 있는 신비하고 깊이 있는 정신 세계나 고유한 문화를 표현함으로써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인 작가 역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작가가 이창래 (1967-Chang Rae Lee. 예일대 교수)이고, 차 학경(1951-1982 Theresa Hak Kyung Cha 작고), 수잔 최(1969- Susan Choi ) 김 난영(1926-1987 Ronyoung Kim), 캐티 송(Cahty Song 1955-)노라 옥자 캘리(Nora Okja Kally )등도 미국 문단에 널리 알려진 작가들이다.
이들은 모두가 각각 중국계 아메리칸, 한국계 아메리칸 등의 소수 민족 국가별로 분류되어 각각 소수 민족 작가로 불려지고 있다. 이처럼 현 미국 문단에는 소수민족 문학의 열풍이 불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소수민족에게는 다시 없이 좋은 현상이며 각 소수 민족 문학이 크게 부흥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 셈이라 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미국의 소수민족 문학의 열풍에 편승하여 우리의 문화나 문학을 현지인에게 알리고. 우리의 문학을 통해서 우리의 고유한 민족혼까지도 깃든 이중문화의 꽃을 이 땅에 피워 우리문학이 깃들인 새로운 세계 문화 창조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문학의 세계화의 길이고, 우리의 문학과 문화를 보다 글로벌적으로 계승 발전 시켜갈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우리 문학의 가치를 우리만이 그대로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타민족에게도 알리고 이의 검증을 통해서 타민족에게 인정 받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2)미주한인 영문 소설의 성격
앞서 말한 것처럼 미주 한인 영문소설은 국문 소설과는 또 크게 다르고, 같은 영문 소설이라도 소설이 쓰인 시대나 소설을 쓴 작자의 세대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영문소설의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란 힘들고, 작자의 이민 신분이나 소설이 쓰인 시대별로 나타나는 특색을 통해서 소설의 성격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한국계 미국인들이 쓴 작품을 통칭해서 한국계 미국인 문학 (Korean American Literature)이라고 하고 있으나, 이는 내용적으로는 크게 두 형태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우선 재미 한인 작가(Korean Writer in America)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룹이 그 하나인데, 이는 한국인 의식으로 한국적인 내용을 단지 영문으로만 쓴 작가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1930 년대로부터 1960 년대 사이의 작가들인 유 일한, 강 용흘, 백인덕, 김은국, 김 용익 등 이민 일세 작가들이 이에 해당하는 작가들이다.
이들이 쓴 영문 소설은 모두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회상을 자전적 소설로 엮은 것들로 한국적인 이야기를 한국적인 정서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거의가 다 미국 소설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한국 소설이라는 표현이 타당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또 다른 하나의 그룹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 (Korean American Writer) 라고 하는 그룹으로, 이들은 이민 1.5세나 이민 2, 3세 들로 거의가 다 미국 시민권자들 이어서 이들의 의식 구조는 모두가 고국쪽보다는 미국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1980 년대 이후로 등장하는 작가들로 이들의 영문 소설에서는 1세들의 이야기들과는 다르게, 과거가 아닌 현재의 삶과 함께 자신에 관계된 현실적인 문제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며, 주로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표현되고,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불안과 갈등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특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한국계 미국 작가들은 이 창래, 차 학경, 노라 옥자 캘러 등이 대표적인 작가들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소설이 쓰인 시대에 따라 내용을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시대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한인 영문 소설이 유 일한과 강 용흘에 의해서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한 1930 년대를 제1기라 할 수 있고, 이 시기의 두 작가는 앞서 말한 ‘재미 한국 작가 군’에 속하는 1세대 작가들이다. 이들의 작품 세게는 고국에 대한 회상을 자전적 소설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고, 작품의 주제가 또한 고국에 대한 향수와 애정을 바탕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이러한 점은 결국 주체성에 대한 자각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그들의 관심이 여전히 구세계에 머물러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1950 년대의 백 인덕과 1960년대의 김 은국과 김 용익을 한 시대로 묶어 1960년대를 미주 한인 영문 소설의 제2기로 볼 수 있다. 이들 역시 제 1기의 시대와 같이 모두 이민 1세나 다름 없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의식의 세계 역시 고국에 바탕을 둔 한국적 사고에서 표현되고 있고, 30년대의 작품의 경향과 같이 과거의 회상 내용을 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특히 김 은국은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써서 전쟁문학이라는 본국의 시대적인 문학과도 연계되어 있고, 김 용익은 오히려 더 철저하게 한국적인 토속의 정서를 표현 하고 있는 점은 이색적이다.
다만 30년대의 비교적 단일한 회상의 형태에서 벗어나, 1960 년대는 차츰 보다 소설적인 표현 방법과 주제가 나타나고 있는 점이 특색인데, 백인덕의 페미니즘이나 김 은국의 전쟁과 신앙을 통한 인간의 양심 세계에 대한 표현 등이 그렇다. 이러한 새 세계나 새로운 사상에 대한 도전은 30년대 강 용흘의 <초>이나 <동양인 서양에 가다> 등에서 나타난 아메리카 드림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도 있는 것으로, 이러한 요소들이 이민 문학으로서 그리고 미국문학에 접근해 가는 요소들로 차츰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제 3기는 1980년대부터 등장한 이민 1.5세나 이민 2, 3세들에 의해서 나타난 영문 소설 들로 많은 젊은 신 세대 작가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한국계 미국 자가들이다. 이들은 우선 현지의 삶에서 오는 부모들과의 갈등이나 현지사회에 대한 소외감 등에서 이야기가 표현되는 것이 특색이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고 갈등과 좌절을 맛보고, 그러한 과정에서 차츰 이중 문화인으로 조화되어가는 등 다양한 현지의 삶의 모습이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핵심을 이루고 있고, 특히 다행스러운 점은 미국의 문화적 경향이 글로벌적인 다문화주의를 지향하고 있어서, 현재는 이들이 종전의 인종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된 점이 이들 작품 세계에 영향을 많이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 1기의 작품이 재미 한인 영문 소설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면, 제 2기는 이의 확인이라 할 수 있고, 제 3기인 이 시기는 미주 한인 영문 소설이 크게 빛을 보게 된 일종의 정착기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작가의 세대에 따른 구분인데, 우선 이민 1세라 함은 한국에서 성장과 교육을 마치고 이민을 온 사람들이나, 한동안 미주에 체류한 사람들의 신분을 일컫는 세대로, 1930 년대부터 -60년대의 모든 작가들이 바로 이 이민 1세대에 속하는 작가들이다. 이들의 의식 구조는 이곳에서 상당 기간을 거주해도 여전히 고국의 의식구조를 지닌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 세계는 표현만 영어로 되어 있을 뿐 내용은 과거에 몸담고 살았던 고국의 이야기들이다. 따라서 작품의 주제 의식도 대체로 향수나 조국애 등이어서, 개인적인 표현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집단의식이 많이 표현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다음으로 이민 1.5세가 있는데, 이들은 교육을 마치기 이전인 어린 시절에 부모를 따라 이민 온 세대들로, 이민 세대들 중에서 가장 애매하고 불편한 의식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세대다. 이들은 고국에서 태어났으나 주요 교육을 미국에서 마쳐 영어에 거의 불편을 느끼지 않지만, 그들에게는 부모와의 관계 등 이민 1세와 달리 양면으로 불편과 갈등을 느낀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 세계에서 이러한 문화에 대한 갈등과 함께 민족 정체성의 (Ethnical identity)문가 심각하게 대두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미국 시민권자 들이고, 그들의 의식 구조는 한국인이라기 보다는 보다 미국적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이 창래(hang Ra Lee)와 차 학경(Theresa Hak Kyung) 등이다.
다음은 이민 2세들인데 이들은 이민 1세들의 자녀들로 완전한 미국시민으로 영어에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는 대신에 한국어에 불편을 느끼고(특히1910년대 하와이 이민자들의 자녀들 모두가) 1세들과 의사 소통에 불편을 느낀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1970년대 이후의 1.5세나 2세들은 부모들의 모국어에 대한 관심으로 모국어를 많이 익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작품 세계는 1.5세 들 보다는 더욱 더 미국적이라고 할 수 있고 내용 또한 더욱 다양하게 나타나는 점이 특색이다. 따라서 현지 삶의 모습인 이중문화의 표현과 함께 자신의 내력과 부모들에 대한 관심과 정체성에 대한 표현이 주제로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 작가로는 이 난영(Ran young) 수잔 최(Suzan Choi) 앨래인 킴(Elaine H Kim) 카니 강(Connie Kang)등이 있다.
다음은 이민 3세들이고 이들은 거의가 다 1950 년 이전의 이민자들의 자손들이어서 모국어를 거의 모른다. 따라서 이들은 미국인의 의식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고. 이중문화인으로서의 조화된 삶의 모습을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더러는 자신들의 뿌리인 조상들에 대한 기억이나 힘들게 살았던 초기 이민자들의 행적에 대한 관심을 조명하려는 노력이 소설 속에 나타나고 있고. 특히 시인 캐티 송(Cathy Song)과 이민 2세인 소설가 노라 옥자 켈러 (Nora Okja Keller)등은 주로 부모와 조부모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가족 이민의 내력이나 그들이 겪었던 아픔을 사회적이고 시대적으로 구명하고 대변해 보려는 노력이 표현 된다. 아는 어디까지나 정체성 확립이라는 바탕을 통해서 나타나는 역사에 대한 바른 정의 구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작품 주제에 따른 구분인데, 첫째로 나타나는 중심 주제가 바로 고국에 대한 향수와 조국애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민 1세들이나 체류 작가들에게 의해 쓰인 한인 초기 이민문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내용이다. 주로 나와 그리고 우리에 대한 이야기로 한국적인 인간성이나 민족성, 그리고 한국적인 사고와 정서가 표현되고 있다, 이는 바로 구세계에 대한 관심이 중점적으로 표현된 것이고, 주체성에 대한 확립과 확인 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창의적인 미적 가치보다는 다분히 사회적 시대적인 가치가 표현되고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의 모든 영문 소설들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이다. 이는 모든 이민자들의 공통적인 꿈이다. 그 구체적 대상은 아메리카의 드림이라고 하는 신세계에 대한 관심이지만, 더러는 학자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헌신하려는 극히 사회적인 꿈이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꿈은 일시 체류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 일한이다.
아무튼 이민의 꿈인 아메리카 드림은 현실적으론 힘이 들고, 그래서 소설에 나타나는 그 결과는 한결같이 만족스럽지가 못하고 실망과 좌절로 표현되지만, 그래도 미래에 대한 꿈을 불빛처럼 희망적으로 그들의 가슴에 지니고 있다. 이는 이민자들이 마땅히 겪어야 할 과정이고, 이민 2,3 세대로 이어지면 이들의 꿈은 이중문화인이나 현지인으로 동화되어 부분적인 꿈의 실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셋째로 나타나는 주제가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추구와 확립이다. 이민 1세들에게는 주체성에 대한 확립으로 표현되지만, 이민 1.5세나 2.3세에서는 자아에 대한 발견과 함께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방황과 갈등(identity crisis)을 통해서 차츰 자산들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노력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확립은 이들이 건전한 다중문화인으로 발전해 가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넷째는 이중문화에 대한 조화나 새로운 문화 창조에 대한 표현이다. 맹목적인 현지에로의 동화나, 또는 이와는 반대로 구세계인 고국을 그대로 붙들고 살아가려는 노력은 합리적일 수가 없고, 현지의 문화를 조화되게 받아드려 이중문화인으로 발전되어 가려는 노력이 가장 합리적인 현지 적응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현지에 효과적으로 적응해가는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소설이 바로 미래 지향적인 새로운 글로벌 문학으로 접근해 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는 역사와 사회의 바른 가치에 대한 정의 구현이다. 이는 이민 2.3세의 작품 세계에서 나타나는 경우로. 부모나 조부모들 기억이나 행적을 통해서 그들이 힘들게 살았던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관심에서 이를 조명하여 조상들을 변호하고 왜곡된 정의를 바르게 구현하려는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면 종군 위안부에 대한 소설 등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아무튼 고국의 현실이 암담했던 과거 모국어 교육에 조차 소홀 했던 시대와는 달리, 현재는 조국에 대한 긍지와 조국에 대한 정체성 확립으로 앞으로의 이민 2.3세 들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고, 특히 다문화주의로 소수민족 작가들도 보호되고 인정을 받을 수 있어서, 앞으로의 미주 한인 영문소설의 장래는 밝다고 할 수 있다.
3) 최초 미주 한인 영문 소설 등장
미주의 최초 한인 영문 소설은 유한양행 설립자인 고 유 일한 (柳一韓 IL Han New. 1895-1971)박사에 의해서 1928년에 발표된 <When I was a boy in Korea >(내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 Lothrope, Lee & Shepard Co. Bost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별로 소개되지 않은 작품인데, 그 이유는 우선 이 작품을 소설로 보기에는 조금은 무리가 있다는 점에서인 듯싶다.
그러나 이민 문학이라고 하는 특수한 시대적 사회적 여건을 감안하고, 다른 장르의 문학 작품과는 달리 보다 더 사회적 (Social Status)일 수 있고, 우리 문화나 문학을 남에게 소개할 수 있는 문화의 접속자 구실이 바로 이민 소설이 지닌 또 다른 가치라는 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소설적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 일한의 ‘내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비교적 자세히 언급한 분은 유 선모 교수(경기대 영문학)로 그의 저서 <미국 소수민족 문학의 이해 , 한국계 편>(신아사, 2001년)에서, 그는 이민 일세의 작가가 영어를 마스터해서 쓴 초기의 영문 소설 작품이라는 표현으로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 작품에 대해 언급한 분으로 <강 용흘, 그의 삶과 문학>(2004 서울대 출판부)이란 저서를 쓴 김 욱동 교수(서강대 인문학부)는 강 용흘을 논하는 과정에서 한인에 의해 영어로 출간된 책에 대한 언급 중 유 일한의 ‘한국에서의 내 소년시절’ 작품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는 문학의 테두리에 넣을 수 있으나, 엄격한 의미에서는 문학의 테두리에서 벗어 난다”( 강용흘 그의 삶과 문학 5쪽 )는 표현으로 문학 장르에 대한 의견에 앞서 아예 그 문학적 가치를 단정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또한 이와 똑 같이 부정적으로 보는 분으로 김 동하(서울 시립대)교수가 있는데, 이분 역시 ‘강 용흘을 논하는 글의 참고문’ (‘재미한인 문학의 어제와 오늘’ 미주문학 2002년 가을호 50쪽)에서 유일한의 작품에 대해 “그의 글은 논픽션에 가까우며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다.”라고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이분들의 의견에 납득이 가긴 하지만, 결코 동의할 수는 없다. 우선 김 욱동 교수는 <강 용흘, 그의 삶과 문학> 의 머리글의 미국문학의 영역이나 정의에 대한 표현에서 미국 문학자들의 두 의견을 소개하고 있는데, 한쪽은 “미국에서 태어난 앵글로색슨 혈통의 백인에 의해서 미국적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만”을 고집하고, 한쪽에서는 “신세계의 신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은 장르 중심의 순 문학에서 벗어난 것이라도 문학적 분석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저자의 인종에 관계없이 문학의 범위에 넣으려고 한다.” 고 인용 소개하고 후자의 입장이 훨씬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문학적 분석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모두가 다 미국문학의 범위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우리 문학의 이야기는 아니고 김 욱동 교수 자신이 밝힌 미국문학의 이야기이지만, 이러하니 유일한의 작품도 문학에 포함 시켜야 한다거나, 아니면 미국 문학자들의 문학사관이 그러하니 우리도 그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미주에서 쓰인 한인 영문 작품은 미국의 이민 문학처럼 하나의 이민 문학(물론 모든 작품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고국 문학과는 또 다른 특별한 형태의 문학에 속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국 문학과는 내용이 크게 다를 수 있는 이민 문학은 일반 문학에서 추구하는 순 문학적인 미학적 가치보다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면에서의 가치가 더 소중하다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미국의 문학은 이민의 역사와 병행해서 이루어진 이민 문학으로부터 시작된 문학이다. 물론 유럽 문학의 연장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초기의 문학은 유럽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 내용은 신천지에 대한 탐험기나 일기, 보도, 메모 등의 기록문 같은 실용문 들이어서 순 문학적인 가치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실용문 같은 기록문들이 오늘날의 거대한 미국문학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고, 그들은 그러한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글과 같은 ‘제임스타운 식민지 건설‘(1607년) ‘필그림파더스 플리머스에 상륙 식민지 건설’ (1620년) ‘매사추세스 식민지 건설’(1630년) ‘플리머스 식민지에 대하여’(Of Plymouth Plantation, 1630년 초안 착수) 등의 실용문을 초기 대표 문학작품으로 열거한다. 이들은 거의가 다 극히 역사적이고 시대적이고 사실적이고 사회적인 글들이다. 그러한 시대에 완전한 장르의 문학작품이 쓰여지기란 쉽지가 않았고, 모두가 현지의 자연 지리와 그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 등이다. 미국에서 최초로 나타난 순 문학적인 글은 신대륙이 발견된 지 150년이 지난 1640년에 작성된 ‘매사추세츠만의 식민지 건설 찬미가 집’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미국문학에 대해 4 부로 된 <미국 문학사>(Literary History of the Unite States)의 편집을 맡은 로버트 스필러(Robert E. Spiller)는 미국 문학사를 크게 네 주기로 구분하고 있는데 초기의 문학내용을 ‘서간문’ 그 다음엔 ‘종교와 철학’에 관한 논의를, 그 뒤를 이어 ‘모방적인 예술품’이, 그리고 다음에 ‘미국적 신생활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고 구분하고 있다. 또한 미국 문학 초기의 표현을 서간문이라고 했는데, 그의 대표적인 최초의 표현이 바로 저 유명한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재무대신에게 적어 보낸 ‘’ 이번 일은 성공 하였으므로 기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서간문(1493년)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미국 문학사, Robert spiller)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민족이동과 문화이동으로 이루어진 신대륙의 초기 문학을 문학으로 치지도 않았던 유럽에서 오늘날에는 미국의 문학의 영향을 역으로 받고 있는 점에서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1910 년대부터 쓰인 초기 미주한인 한국어 소설을 보더라도 그렇다. 초기의 재미한인 소설은 한결같이 구소설의 형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콩트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작품도 있고, 완전한 서간문(사랑하는 S누님께. 1924년 신한 민보 게재)임에도 작자는 단편소설이라는 장르를 달아 놓고 있다. 우리가 이를 소설이 아니라고 단적으로 부정하기엔 그 내용이 순수한 서간문만의 내용이 아닌 애정윤리니 결혼관이나 여인상 등 소설적이기도 한 사회성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처럼 이민문학이란 일반 문학 형태와는 조금 다르게 구분되어야 할 요소가 않다. 따라서 이들 이민문학에 대한 평가는 그 기준이 고국과는 또 다른 이민 문학이라는 측면에서 그 평가 기준이 다르게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 한다면 유 일한의 작품을 문학작품에서 벗어난 작품이라고 하기엔 설득력이 없고, 이 작품은 문학작품을 넘어서서 당연하게 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첫째 우선 이 글의 제목이<내 한국에서의 소년 시절>(When I was boy in Korea)이라고 표기되어 있듯이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을 적고 있는 자전적인 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라고 하는 소설의 근원적인 시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선 내 자신의 이야기를 적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최초의 소설들이 역사적 사건 속의 인물이나 위인들에 대한 기록인 영웅전이나 위인전, 그리고 개인의 행적이었던 점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점을 들어보면 우선 형식적인 면에서 통일된 사건과 일정한 인물 묘사 등의 소설적 구성이 없이, 여러 내용이 단편적으로 병행 열거 되어 있는 점이 치명적이라 할 수가 있지만, 자서전이 소설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논 픽션이면서도 소설이 될 수 있는 작품이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전편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담과 함께 깊은 향수가 어려있는 점이나, 어린 시절에 지녔던 꿈이나 동물에 대한 우화와 토속적인 이야기들까지도 많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다가 개인의 주관적인 선악에 대한 표현과 함께 고국인들의 가치관이 표현되고 있고, 이러한 점은 필자의 내면 세계와 고국인들의 인간성 내지 민족성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어서 더욱 소설적이라는 것이다.
다음에 거론하게 될 강 용흘씨의 영문소설 소설 ‘초당‘도 그렇지만, 이 ‘초당’을 어린 독자들을 위해서 전반부만을 다시 쓴 ‘행복한 숲’(The Happy Grove. 1937년)도 사실 성장 시절의 고향에 대한 회상을 적은 내용이라는 점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다만 유일한의 작품 내용은 개인적이 글과 고국의 풍물과 전통 등 문화적인 면에도 관심을 가지고, 민족적인 인간성을 표현한 점에 비해, 강 용흘은 이를 보다 문학적으로 그리고 주로 개인적인 인간성이 표현되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필자는 적어도 이민 문학이라는 형태의 작품으로 외국인들을 독자로 하여 우리의 문화와 역사와 국민적 정서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유일한의 “내 한국에서의 소년시절’을 소설로 구분하기에 주저함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4)유 일한의 출생과 생애
유 일한 (柳一韓 IL Han New. 1895-1971)은 1895년 평양에서 아버지 유 기연(柳基 淵)과 어머니 김 기복(金 基福)사이의 구 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원래 유 일형(馨 진주 류씨의 27世 항렬) 이었으나, 그가 미국에 거주 시 고교 재학시절 신문 보급소에서 그의 이름 끝자를 한(Han)으로 잘못 표기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가 스스로 ‘형’(馨)을 한(韓)으로 개명을 하고, 이를 고국 부친에게 알려서, 이후로 그의 부친도 그의 다른 동생들 이름도 이한 삼한 사한 등 차례로 지어서 사용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가 나라 한(韓)자를 택한 것만 보아도 그의 나라 사랑에 대한 정신과 그의 주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엿볼 수가 있다. 또한 그의 성 유(柳)가 영문 ‘New’로 쓰이게 된 동기는 중국인들의 발음에서 柳가 ‘Liu’로 발음된 데서 연유 되었다고 할 수 있고, 이는 ‘New’의 새롭다라는 조국의 미래에 대한 그의 꿈을 표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경북 예천이 고향인 그의 부친 유 기연씨는 일찍이 고향을 떠나 전국 각지를 돌아 다니며 상업에 종사했던 분으로 평양이 고향인 김 기복씨와 결혼을 해서 평양에 정착했고, 그는 그곳에서 일찍이 기독교인이 되어 당시 미 북장로회의 선교사로 한국에 와있던 사무엘 마펫(S. maffett. 숭실중, 숭실대 설립자)씨로부터 초기에 세례를 받았던 몇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이처럼 그의 부친 유 기연 씨는 일찍이 서구의 기독교 사상과 개화에 관심을 지녔던 분이고, 이러한 점 때문에 그가 그의 장남인 일한을 9세의 나이에 조기유학으로 미국에 보낼 수 있는 일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시대는 지금과는 모든 상황이 크게 달랐다는 점으로 비추어볼 때 단 아홉 살 밖에 안된 그의 아들을 이국에 유학을 보낸다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분은 서구문명에 일찍이 눈을 뜬 선각자라는 것을 잘 알 수 있고, 특히 그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남달리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그가 그의 차남은 러시아로 그리고 3남은 중국, 5남은 일본 등으로 유학을 보냈던 사실에서도 설명이 되고 있다.
그는 평양에서 비단점과 잡화점 그리고 싱거 미싱 대리점을 경영하고 있었던 분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종합상사 격인 거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투철한 애국자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뒤에 조국이 한일 합방이 되자 가족을 이끌고 만주 간도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는 망국에 대한 울분에서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떠났으리라고 생각이 되지만, 그 직접적인 동기는 그 당시 정신여고에 다니던 그의 딸이 독립 운동의 비밀 연락 업무에 연루되어, 이에 대한 경찰의 감시와 박해를 받게 되자 이를 피해 떠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그가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던 점을 엿볼 수 있는데, 그는 간도에서도 꾸준하게 독립운동에 관여했고, 특히 동명서숙(明東書塾)의 재무를 담당하는 등 독립 자금 조달에 관여했던 사실이 독립운동사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조국에 대한 남다른 애국심은 그가 늘상 부르던 애국가를 ‘피난처 있으리’ 란 찬송가 곡조에 맞춰 불렀다는 일화에서도 잘 엿볼 수가 있다.
그의 부친에게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바로 그의 인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우선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인품을 엿볼 수가 있고, 그의 행적을 통해서 나타난 그의 정신 세계는 지극히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유교의 관습에 젖어 있었던 분이고, 성품 역시 강직하고 근엄한 분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 후일 유일 한씨가 그의 부친의 인품에 대한 기억을 말하는 것 중에서 부친은 지극히 엄격한 분이었다는 것으로 부친의 인품을 표현했던 점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이처럼 유 일한씨의 부친은 일찍이 깨우친 선각자의 한 분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조국의 광복과 조국의 근대화에 관심이 많았던 애국자이며, 특히 교육과 개화에 남다른 관심을 지녔던 분으로 유능한 상업 경영인이었던 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평범하지 아니한 분 이였기에 이러한 점 유 한일에게 영향을 끼쳐, 그가 부친의 정신과 행동을 이어받아 국가와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유 일한씨는 미국에서 성장하고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거의 미국인에 가까운 1.5세였지만, 어린 시절에 부친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서 그는 결코 고국을 잊지 않았고, 고국의 전통적인 관습과 예절에 밝았고, 한국인으로서 긍지와 민족의 얼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부친은 간도에서는 사업에 별 발전이 없었던 듯, 유 일한씨가 미국에서 보내준 돈으로 만주에서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1925년에 귀국해서 평양 상수리에서 살다가 1934년 8월 73세로 별세했다.
유 일한씨의 도미 경위는 1904년에 대한제국 순회공사인 박 장현(1908년 미국에서 작고, 박용만의 숙부)을 따라 미국에 건너가게 됐다고 하나, 다른 주장에 의하면 유기연공이 다니던 교회의 선교사가 두 명의 한국인 아이를 유학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하여, 유 기연 공이 직접 부탁하여 이루어졌다고도 하지만, 이를 확인 할 길은 없고 다만 어쩌면 두 내용이 동시에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아무튼 그는 박 장현과 박용만 그리고 정한필 정 한경 어린이 등 다른 사람 십여 명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미국 중부에 있는 네브라스카 주로 가게 되는데, 그 당시 그곳에는 30여명의 한인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고, 한인들이 왕래가 빈번해서 고국에 비교적 잘 알려진 곳이었다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유 일한은 이곳 네브라스카에 도착하자마자 커니(Kearney) 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침례교인이며 독일계 계통인 미국인 36세 및 38세의 미혼 자매의 집에 곧바로 입양이 된다.
이분들은 생활 태도가 근검 절약하고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통해서 자녀들의 자립 정신을 키워주는 전통적인 종교인들이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일을 시키고 용돈을 주는 관습이 있을 만큼 엄격한 분들이었고, 그도 소년 시절부터 땔감을 마련하는 등 신체적 노동으로 신체를 단련하고, 인내심과 함께 근검 절약 정신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강한 정신력과, 애국심, 그리고 강인한 체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1909년 박용만이 그곳에 설립한 한인 소년병 학교에 참가하여 방학 때마다 교육을 받았는데, 이곳에서 유 일한은 군사훈련은 물론 한국어와 한국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었다. 이 학교는 설립한지 삼 년만에 설립자 박용만이 나성 신한 일보 주필로 떠나면서 1912년 11월에 해산이 되었다. 이러한 신체와 정신 수련으로 그가 고교시절 육상선수와 이름난 풋볼 선수로 활동할 수 있었던 강인한 정신과 체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고교 시절부터 고학을 해서 스스로 학비를 조달했고 했고, 이러한 점 역시 그가 훗날 대 기업의 경영인으로 성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교를 마친 유 일한은 1916년에 미시건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는데, 이곳에서도 그는 동양인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학비를 조달하고 있었고, 이러한 경험이 후에 그가 식품회사를 세울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그의 대학시절 행적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벌써 많은 독립 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구국운동에 앞장서 활동을 전개 했는데, 그 대표적인 활동이 바로 삼일운동이 일어났던 해인 1919년 4월 14일에 필라델피아에서 실시된 미국 한인 자유대회에 청년 대표로 참석한 일이다.
미국 국회 도서관 기록에 의하면, 상해 임정 제1회 모임이 선포된 다음날인 1919년 4월 14일부터 필라델피아의 미국 독립회관에서 서 재필을 대회장으로 하여 이 승만, 조 병옥, 임 병직, 장 덕수, 이대위 등 미주 여러 단체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실시된 한인 자유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 24세 대학생인 유 일한은 대의원으로 참석하여 결의안 기초문 작성위원으로 활동하고, 그는 영어와 한국어로 미국 정치인들과 한인들 앞에서 한국민의 독립에 대한 목적과 열망에 대한 10 개 결의 항목을 낭독했다.
이러한 그의 투철한 독립정신과 행동은 어린 시절 그의 부친으로부터 감화를 받았고, 현지에서는 박용만의 군사학교에서 훈령을 받았고, 그리고 그가 존경하고 따르던 서재필 박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미시건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철도회사를 거쳐 제네럴 일익트릭 회사에 회계사로 취직했으나 동시에 꾸준하게 개인사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이 때 이미 백 불이라고 하는 거금을 융자 받아 그의 부친에게 송금하여 그의 부친으로 하여금 간도에서 농장을 경영하게 했고, 1922년 27세 때에는 대학에서 함께 공부했던 미국인 친구와 함께 동업으로 La Choy 식품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게 된다.
사업이 날로 번창하게 되자, 그는 대학 재학시절에 사귀었던 미국에서 출생한 중국계 미국 시민인 매리 우(Mary Woo. American- Chinese, 중국명 호미리(胡美利 )와 결혼을 하고(1925년) 그 해에 일차 귀국해서 고국의 현황을 살피고 이어서 영구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도미 하자마자 곧바로 그의 라 초이스 식품 회사를 동업자인 월리스 스미스에 넘기고 영구 귀국(1926년 10월)헸다.
귀국시 그가 인사차 찾아간 분이 서재필 박사이고, 그 때 서박사가 목각 판화 한 점을 그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후일 그 목판화에 새겨진 나무가 유한 양행의 심볼인 버드나무 상표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부인과 함께 귀국하자, 곧바로 일본 경찰 고등계에 불려가게 되고 여러 가지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그는 줄곧 요시찰인물로 감시를 받아왔다.
또한 세브란스 의대 학장 에비승씨로부터 그는 상과 대학 교수로 그리고 의사인 그의 부인 유 호미리 여사는 소아과 과장을 맡아 달라는 청탁이 있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국민의 건강을 위하는 것이 곧 애국이라 여기고 곧바로 유한 양행을 설립 (1926년 12월 10일 종로 2가 45 덕원빌딩)했다.
그가 설립한 유한 양행은 제약회사와 약품 수입 및 수출업 등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크게 성공하기에 이르고, 민족기업으로 최대였던 경성방직 (자본금 백만원 )을 뒤따르는 유수한 민족기업 민족기업(자본 75만원 )으로 성장 하기에 이른다. 또한 1936년 6월 20일 국내 최초로 종업원에게 공로주를 분배하여 우리 역사상 최초로 종업원이 경여에 참가하는 최초의 경영 방법을 채택하여 우리나라 경제사에 획기적인 사실로 기록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영구 귀국 이년 후인 1928년에 최초의 영문 소설인 ‘When I was boy in Korea‘ (내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보스톤에 있는 출판사(Lathrup Lee & Shepard Co.)로부터 청탁을 받아 189쪽에 이르는 장문의 미주 한인 최초의 영문 소설인 ‘When I was boy in my Korea‘ (내 한국에서의 소년 시절) 을 썼다.
그리고 그는 우리나라 기업 중 종업원의 복지에 가장 앞서가는 회사로 종업원의 복지 사업에 관심을 쏟았고, 이러한 공로로 훗날 그는 1964 2월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는 십여 년 동안 고국에서 사업에 정진하다가 1938년에 재 도미하여, L.A 남가주 대학 대학원에(U.S.C)서 다시 학업을 시작 하여 1940년 45세에 경영학 석사학위 습득 했고, 다시 독립 동지들과 만나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기록에 남는 선언문 등에는 그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데, 이러한 점은 일본이 미국과 전쟁 중이었고, 그의 회사가 서울에서 세무사찰 등 많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던 때라서 일부러 기록문에서 이름을 뺐으리란 추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행적 등은 그 당시 미국신문에 독립운동 행사장에 실린 그의 사진이 실려있는 것 등으로 확인이 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활동은 1941년 1월에 미주의 각 단체가 연합으로 활동할 것을 결의하여 4월 20 일에 하와이에서 9개조의 선언문을 채택하기에 이르고, 1942년 8월 21일에는 LA 시청에서 태극기 계양 현기식 (Tai Geuk Flag Hoisted at the L.A City hall)을 거행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맞게 된다. 그는 한만족 연합위원회 위원장 이승만, 그리고 L.A 시장 등의 축사를 대독하고 태극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2백여 교민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신한 민보 영문판에 소개되고 있다. 또한 그는 1942년 4월 26일에 김 호, 김 용성 등과 한인 국방 경위대를 결성하여 정식으로 미국 주정부 예비군에 예속되고, 맹호군이라는 명칭으로 12개 국어로 세계 만방에 소개하고, 미국 각 주정부에 요청해서 정식으로 승낙을 받게 된다.
이어서 그는 1943년에 재미한족 연합위원회 기획 연구(Planning and research Board)위원장이 되어, 미국무성 전략청 권유로 부위원장인 김 용성과 간사 김 성학 이사 송 현주 김 병연과 함께 ‘한국과 태평양 전쟁’(Korea and The Pacific war)이라는 비망록을 발간하게 되는데, 이는 한국에 대한 연구서로 당시의 정치 군사적 정세와 한국의 인물 등을 엮어, 전쟁후의 영향 등의 변화에 대한 연구서로 수시로 수정 추가하는 기록이다.
이 기록물은 187쪽의 전쟁에 관한 비망록이고, 장차 한국에서 있을지도 모를 일본과의 전쟁에 효과적으로 참가하기 위한 의견과 현지의 현황과 전후의 문제인 경제 독립과 자치 능력 등이 실려 있어서, 미국 조야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자료다.
또한 전쟁 말기에는 일종의 고국 현지 침투 정보 활동인 냅코(Napco) 작전에 조장으로 직접 참여했으나, 미국 정부의 계획 취소로 실제로는 실시되지 못했다.
그는 해방이 되자 1946년 7월에 귀국하여 곤경에 처한 사업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들어갔고, 1948년에 스텐포드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아 귀국했다. 그 해 이승만이 정부 수립시 그를 이대통령이 초대 상공부 장관으로 초청 했으나 그는 이를 사양했다. 그리고 사업에만 전염하여 한국의 유수한 제약회사로 크게 성공 하게 된다.
그는 또한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아서 고려공과 학원 설립(1953 5월 5일)을 시작으로, 1964년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자신의 주식을 장학사업에 증여하는 등 그는 교육사업에 헌신하였고, 그는 자녀들에게 거의 상속을 하지 않고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사후 그의 전 재산이 사회에 환원됐다.
그는 1971년 3월 11일 사망했고, 그의 뜻을 기리고 보존하기 위해 그의 기념관이 설립되어 있고, 그가 공을 들여 설립한 유한 대학 교정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처럼 그는 애국 애족 사상이 투철한 독립운동가였고, 그리고 뛰어난 경제상공인이었고, 동시에 교육자이며 훌륭한 사회 봉사인 이라고 할 수 있다.
5)‘한국에서의 내 어린 시절 ‘(When I was a boy in Korea)
이 작품은 여러 나라 어린이들의 모습을 미국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기획된 시리즈인 <Children of other Lands Books> 22권 중의 한 권이고, 미국 보스턴에 있는 한 출판사(Lothrope, Lee & Shepard Co.)의 청탁에 의하여 집필된 총 189쪽으로 된 작품이다.
내용은 작자가 일인칭 형식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여 작자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담과 함께 어린 시절에 보았던 고국의 풍습 등의 전통 문화와 역사 교육 언어 결혼 놀이 우화 등을 아주 알기 쉽게 표현한 작품이다.
표현이 극히 서정적으로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고, 고국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애정 어린 향수가 베어 있어서, 이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애정으로 볼 수 있고, 고국의 풍물과 문화에 대한 표현은 결국 조국에 대한 관심과 긍지의 표현으로 이는 하나의 주체성에 대한 확인이나 정체성에 대한 확립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작자 개인의 정서와 함께 한국인의 정서와 인간성이 많이 표현되고 있어서 이러한 점이 바로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전체적인 골격은 조국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자신이 살았던 1910년대 전후 고국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고, 표현 방법은 주관적인 회상과 함께 제 삼자의 입장에서 쓴 객관적 사실에 대한 설명이 혼합으로 구성되어 나타난다.
그가 어린 나이에 홀로 이국의 가정에서 성장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홀로 겪어야 했을 그 외로움이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나 그 때가 인종 편견이나 차별이 혹심했던 시대이고 보면 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가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고등교육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가 자신과 가문의 영광과 조국을 위해서 학자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가 미국인으로 성장한 뒤에도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조국의 혼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점은 그의 정체성에 대한 확립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정체성이 그의 소설을 통해서 중심 주제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가 회상하여 적고 있는 어린 시절의 고국에 대한 추억담을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에 표현된 내용들은 그가 유년시절에 즐기던 고국의 군음식들에 대한 추억담을 표현한 것이다. 군밤이나 엿은 우리의 고유한 군음식으로 그 누구나 이에 대한 추억을 손쉽게 떠올릴 수가 있을 것이다.
군밤이오! 군밤이오! (“Goon-Balm-ee-ho!”)나 “엿 사시오! 엿”(“Yutㅡsasee-oh! yut”) 하는 소리들은 지금도 우리 모두의 귓가에 남아있는 정겨운 말들일 것이다.
In the cities and hamlets one hears during the day and the far into to the night the melodious cry of chestnut venders singing out their wares. ….
“Goon-Balm-ee-ho! Goon-Balm-ee-ho! Sul- Sul-Gel-en Goon-Balm-ee-ho!” meaning “Roasted chestnut, roasted chestnut, piping-hot roasted chestnuts!”
All this is said in a singsong way, and the boy has such a good time in sing it over and over again that it is not unpleasant to here.
내 기억 속에는 도시나 작은 마을에서는 한밤중까지 밤을 팔러 다니는 사람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군밤이오, 군밤이오, 설설 끓는 군밤이오!”라고 소리치고 다녔는데, 노래 부르듯이 여러 번 반복하였다.
작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아주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다. 특히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는 군음식에 관한 기억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 군밤은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로 작자는 군밤 굽는 도구인 화로나, 밤에 칼집을 내어 화로에 굽는 그 구체적 과정까지도 소상하게 기억하여 표현하고 있다. 다음은 엿에 대한 그이의 기억을 적은 것이다.
It is put on a handy pegon the wall and pulled until the color changes from dark brown to right creamy color. Quite often it is eaten without pulling, and sometimes more elaborate candies are made by adding roasted soy beans or roasted sesame seeds to the unpulled taffy. The finished candy is twisted in to handy sticks, somewhat the size of the American candy sticks, and venders carry them about the streets crying out, “Yut-sasee-oh,” which means “Buy your yut here.”
어느 정도 끈끈해지면 어두운 갈색에서 밝은 크림 색으로 될 때까지 잡아 당긴다. 때로 늘리는 것 없이 먹기도 했고, 구운 콩이나 참깨를 넣기도 했다. 완성된 엿은 적당한 크기로 비틀고 스틱 캔디와 같이 만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 엿 사시요!” “ 여기 엿이 있습니다.”라고 외치면서 팔러 다녔다..
My mother would miss her favorite pair of scissors or once, in one of her iron kettles, which in my opinion had no better use,
And then through questioning of the candy –vender she would discover its whereabouts. Very often these little candy-paddlers are boy of about ten years age who sing there wares in the most musical manner, clicking there huge scissors as they go along the streets.
우리 어머니는 내가 쓸모 없는 물건 같아서 바꿔 먹었던 가위나 주전자를 고물 엿 장수에게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이런 엿장수들은 거의 열살 정도의 소년으로 커다란 가위를 쩔렁거리며 엿을 사라고 소리치면서 거리를 돌아 다녔다.
이처럼 엿에 대한 옛 기억을 더듬어 그 엿에 얽힌 자신의 실제 추억담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의 전통적인 민족 정서를 표현한 것으로 극히 향토적이고 서정적으로 표현되고 있어서, 외국인 들에게도 흥미로운 일 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어린 시절과 고국에 대한 향수의 세계가 그의 가슴속에 늘 그리움으로 각인돼 있어서, 그는 미국에서 성장하였지만 결코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고, 조국에 대한 사랑의 혼을 키워 직접 애국운동에 참여했고, 귀국해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공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그처럼 고국과 민족혼을 지킬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지니고 있었던 미래에 대한 꿈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꿈은 미래에 자신의 가족 명예와 국가를 위해서 그가 장차 학자가 되는 꿈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그가 어린 시절에 지녔던 꿈과 이상의 세계에 대한 표현이다.
그의 어린 시절의 꿈은 우선 그의 부친의 꿈을 통해서 시작된 그와 그의 부친의 공동의 꿈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옛날 한국에서의 어린이의 장래에 대한 꿈은 거의가 그 가문의 형편이나 부모의 꿈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다. 가정의 환경이나 신분 등에 따라서, 어린이들은 채 철이 들기도 전에 부모에 의해 장래가 작정이 되고, 자연스럽게 이에 따라 성장해 간다. 그 시절 우리나라에는 어린이들의 장래에 대한 꿈이 크게 두세 유형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하나는 일정한 지역을 다스리는 관리가 되는 꿈이고, 또 다른 하나는 큰 학자가 되어 글 쓰는 능력과 지혜로 평생 존경 받는 인물이 되는 길이라고 하고, 그밖에 농사꾼 장사꾼 장인이 되는 것은 꿈이 없는 불운한 탓이라고 적고 있다. 이어서 그는 그가 어린 시절에 지녔던 꿈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Being the eldest son in an average Korean home, where much importance was attached to the perpetuation of the family name, my future was naturally slated to be that of the scholar. Much to my satisfaction, my father, being forced by circumstances at any early age, was a merchant trading with buyers from China. He had always felt that he could have reached his zenith in the literary line, and so determined
That first son should have all the advantage that he was denied a feeling which most parent the world no doubt harbor in there heart.
나는 일반 한국 가정의 장남이었기에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내 미래는 학자가 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온 그들과 장사를 하셨는데, 그로 인해 당신이 충분하게 하지 못했던 공부를 큰 아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녔던 어린 시절의 꿈은 부친이 그에게 기대해서 이루어진 부친과의 공동의 꿈이다.
그의 부친이 일찍이 공부를 많이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학자가 되고자 하는 꿈을 그의 아들을 통해서 이루려고 한다. 그래서 장자로 태어난 그의 어린 시절의 꿈은 아버지의 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아버지와의 공동의 꿈인 것이고, 가정과 가문의 꿈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러한 꿈의 실현을 위해서 부친에 의해 다른 어린이들과는 크게 다르게 교육 받고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책과 가정교사에 둘러싸여 자랐고, 이로 인해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힘든 일은 하지 않았지만, 대신 얼음 썰매 타는 일이나 산에서 불쏘시개를 모아 오고, 당나귀 등에 올라타는 등의 놀이는 할 수가 없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I had no more then gotten inside of the door when my mother wanted to know where /I had been and what I had done to my pantaloons. I looked back cautiously before answering, and was mortified to fine the whole seat black with dirt from the bulls back. During the secret session which followed with my father, He reminded me that riding bulls was not the proper thing for even so young a scholar to do.
내가 문을 들어서자 어머니는 내가 어디서 무엇을 했고, 또 바지는 왜 더러운지를 물으셨다. 나는 대답을 하기 전에 내 모습을 살펴보고 나는 소의 등에서 더러운 것이 옷에 묻어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내 아버지는 오랬 동안 소 등에 타는 일은 젊은 학자가 할 행동이 아니라고 다시 일깨워 줬다.
이처럼 작자를 장차 가문을 빛낼 학자로 키우기 위한 그의 부친의 꿈이 있었기에 그는 남다르게 자랐고, 결국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작자는 이 꿈의 실현을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고 결국 그는 꿈을 실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갖게 되자 마자 곧바로 은행에서 큰 돈을 융자를 받아 가세가 크게 기울어진 간도 땅의 부친에게 송금을 했다. 그래서 부친이 다시 농장을 경영하게 하는 등 장남으로서 구실을 하게 되고, 다음 귀국 해서는 사업가로 크게 성공하여 가문을 빛내고 국가 사회에 공헌 하기에 이른 점은, 모두가 바로 이러한 그의 어린 시절에 지녔던 꿈으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 표현된 글 중 그가 소의 등에 탔던 이야기와 더러워진 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작자의 회상 중에는 이처럼 여러 곳에서 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는 우리나라의 농가에서는 소가 빼놓을 수 없이 소중한 가축이고, 그래서 농가에서 성장한 사람이면 모두가 한두 가지의 소에 대한 추억담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또한 단 30분만에 버려놓은 그의 바지는 아마 하루를 걸려 만들었으리란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어린 시절 에 보았던 고국의 고유한 의상과 함께 치장에 대해 머리 끝부터 신발에 이르기까지 아주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I refer to trousers as pantaloons because that is about the only word which describes them. In appearance they are almost like the once the Hollanders wear. Both men and boys wear the same style. The legs are very wide and are tied ay the bottom with colored ribbons, and also ay the waist with colorful fancy flat cord with tassels at either end. Over these, We wear a coat cut do box lines reaching to the hips. The color of the coat is V-shaped at the front, and the lapels are fastened across the front with the ties of the same material.
내가 말한 바자의 모양은 네덜란드 사람이 입는 것과 비슷했고, 어른 것이나 아이들 것이나 같은 모양이었다. 바지 통은 매우 넓어 색 있는 끈으로 아래 부분을 묶었고, 허리에도 끝부분에 술이 있는 끈을 둘러 맸다 그 위에 엉덩이까지 오는 박스모양의 저고리를 입었는데, 목 부위는 V자 모양이었고, 옷깃은 같은 천으로 된 끈으로 여미게 되어 있었다.
위와 같이 그는 고국의 바지 저고리에 대한 기억을 적고 있고, 이어서 그 바지에 달린 주머니에 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 주머니에는 지금이라도 눈앞에 바로 쏟아져 나올 듯한 많은 것이 들어 있었고, 늙은 사람들은 성냥갑, 안경, 담배 돈 등을 넣어 별도로 허리춤에 차고도 다닌 것을 기억하고 있다. 또한 여인들의 머리 장식에 대한 것부터 여인들의 흰 치마 저고리와 여름철의 흰 모시옷, 그리고 어른들이 외출 시 사용하는 의관은 물론, 상을 당했을 때는 상복을 입는 일과, 부모님이 상을 당했을 때는 삼 년 동안을 줄곧 입어야 한다는 일이들이며, 여인들은 발에 꼭 맞는 버선을 신고 다녀서 발이 작고 곱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우기에 많이 사용하던 나막신에 대한 추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some of them ate really masterpieces of carving. These shoes are shaped like boats, and each has two high cleats on the bottom so that the body of the shoes does not touch the mud of the street. Very often I have taken these shoes off at a pond and, making masts of the piece of bamboo have put sails on them and played sailboat. Not infrequently I have seen them carried away, into deep waters by the wind, and have had to barefooted in the end.
그 중 어떤 것들은 정말 걸작품이었다. 나막신은 보트 모양으로 바닥에 두 개의 미끄럼 막이가 있어서 진흙이 묻지 않게 만들어져 있다. 나는 종종 신을 벗어 연못에 띄우고 대나무 조각으로 돛을 만들고 뱃놀이를 했다. 가끔 바람에 너무 멀리 떠내려가서 결국 맨발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는 다음으로 그가 학자가 되기 위한 꿈을 이루기 위해 지식을 쌓고 견문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었던 어린 시절의 주막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 하고 있다.
On regular routes, stopping-places were established where they could secure their food,
Wash their tired feet, and perhaps enjoy a pipeful of tobacco before the fires. In winter these fires were on the hearth in the room, but in summer they where only saga-leaf smudges to keep away the pestering mosquitoes or other insects.
보통 길에는 주막이 있어서 밥도 먹고, 지친 발도 씻고, 화로 앞에서 밤배도 한대 피워 즐길 수 있는 휴식처가 되었다. 겨울에는 이 화로가 방안을 덥히는 난로로 쓰였고, 여름이면 모기나 다른 벌레들을 쫓기 위해서 불을 피웠다.
이 얼마나 정겨운 모습들에 대한 기억인가?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나라의 중요한 소식을 먼 곳으로 전하는 봉화와 함께, 여행자가 하루를 걷고 나면 쉬어갈 수 있는 일정한 거리에 일종의 여인숙과 같은 주막이 있었고,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은 여행자의 주위에 둘러앉아서, 그의 경험담이나 여행기를 듣느라고 새벽까지도 깨어 있었던 점을 기억하고 있고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People in the small taverns or the villages en route would gather around traveler to here all about what was happening in other part s of there land, learning of event of the past month or year.
…As a boy, I have been kept awake with the permission of my father, listening to the entertaining tales of far-away land of peoples from a traveler.
… Whatever true of these chronicles, they where generally harmless but entertaining, and furnished these simple rural people with social companionship that made up the greater pleasures of there lives.
이런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여행자의 주위에 모여 앉아서 지난 사건과 나라안과 나라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했다.
…내가 어렸을 때도 나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여행자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그 이야기들이 정말이든 거짓말이든 즐거운 이야기들이었고, 시골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줌으로써 유대감을 불러 일으키고 그들의 삶을 밝게 해 주는 구실도 했다.
필자도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주막에서 여행자의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이러한 주막이 고국 사람들이 서로 친근감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는 문화적인 정서의 공간이었음을 회상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그의 어린 시절의 고국에 대한 추억을 통해서, 고국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친근감과 유대감 등의 다정다감한 우리 민족의 인간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는 점 등에서 그가 이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결코 잃지 않았던 점을 깊이 엿볼 수 있다..
또한 그는 그가 어린
삼일운동 이후부터 광복이전까지 한인 영어소설 1
박영호
머리글
1910년대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초기 미주 한인 소설은 고국의 언어로만 줄곧 표현되어 왔으나, 삼일운동 이후인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차츰 소설의 내용이나 형식 등에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드디어 1920년대 말에는 현지어인 영문으로 표현된 소설이 등장하게 된다
이로써 미주 한인 소설은 표현 언어에서도 현지 영어 문장까지도 포함하게 되어 명실공히 미주 한인 이민 문학으로서의 완전한 형태를 이루게 되고, 아울러 미국 문학의 일부인 아시안 미국인 문학(Asian- American Literature)이나 한국계 미국인 문학(Korean-American Literature)이라는 하나의 미국 소수민족 문학(Ethnic minority American Literature)의; 하나로 자리잡기 시작 했다.
미주에서 한인에 의해 최초로 쓰인 영문 소설은 1928 년에 유 일한에 의해서 쓰여진 <When I was a boy in Korea>(내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이라고 할 수 있고, 이어서 1930년대에 들어서서 강 용흘에 의해 본격적인 소설인 ‘The Grass Roof‘(草堂. 1931년)와 <Eest Goes Wast > (동양인 서양에 가다. 1937년) 등이 쓰였는데, 이러한 영문 소설은 한인 국문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한 지 이십여 년 만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보단 때 늦은 감이 있지만, 이러한 점은 영문 소설을 쓸 수 있는 완전한 현지 영문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이만한 시간이 필요하게 된 점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고 본다. 그래도 이러한 시기에 벌써 한인에 의해서 영문소설이 쓰여 발표되었다는 점은 획기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영문 소설은 우리의 문화나 문학을 현지의 언어를 통해서 현지인들에게 소개했다는 점에서 우선 문학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겠고, 강 용흘의 <초당> 등에서는 그러한 문학사적인 가치를 넘어서서 소설적인 미학적 가치까지도 확실하게 지니고 있어서, 그 시대의 미국문학의 특색이나 경향에 전혀 관계없이 현지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어, 이름난 문학상 수상과 함께 많은 찬사를 받았다, 이런 연유로 이 작품은 다시 십 여개 국어로 번역 출판이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도 국내 소설에서 조차도 없었던 사실로 특기할만한 일이다.
이 두분 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1950년대의 백 인덕과 1960년대의 김 은국과 김 용익 인데, 이 분들 역시 모두 한인 일세 작가들이고 모두가 한결같이 고국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따라서 1930년대부터 1960 년대까지의 재미 한인 1세들이나 다름없는 재미 한인 작가들(Korean writer in America)의 작품은 표현만 영문일 뿐 내용은 고국에 대한 이야기들 이고, 1980 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이민 1.5세나 2, 3세들의 한국계 미국인 작가(Korean- American Writer)들의 작품과는 성격이 크게 다른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초기 한인 영문 소설들에 대한 연구는 부분적으로 꾸준하게 이어져 왔고, 근래에 와서는 보다 큰 관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강 용흘이나 김 은국, 김 용익 등의 작품에 대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연구 발표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들 한인 영문 소설들이 지니고 있는 그 특별한 가치나 문학사적인 공적 등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만족스러운 것만은 아니고, 실제 그 작품들이 지닌 문학적 가치와 함께 우리문학과 문화를 현지에 소개한 그 공적에 비하면 그 평가는 아직도 미흡한 편이다.
사실 1980 년대부터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 필요성이 제창되어 오던 세계화 운동이 이제 문화나 문학의 세계화에까지도 확대되어 노벨상 수상 등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기대에 접근할 수 있는 전진기지나 제일선으로서의 재외 동포문학에 대한 활용은 그만 두고라도, 재외 동포문학에 대한 바른 인식이나 바른 가치 규정에 조차도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재외 동포문학의 특별한 가치나 그 특색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 일으킬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재외 문학에 대한 보다 총체적이고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선 같은 영문 소설이라도 작자의 세대에 따라 따르고 시대에 따라 다르다. 다시 말하면 한인에 의해 쓰인 같은 영문 소설이라도 내용에 따라서는 한국 소설일 수도 있고, 한국 소설이면서 미국 소설일 수도 있고, 또한 순 미국 소설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 미주 한인 영문 소설에 대한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 연구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주 한인 영문 소설에 대한 연구에는 지금까지 그 누구에 앞서 유 선모 교수(경기대 영문학)가 그의 연구저서 <미국 소수민족 문학의 이해,한국계 편> 을 통해서 비교적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시작이고 이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보다 체계적인 연구나 정리가 이루어져야 하리라 믿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선 이들 한인 영문 소설에 대한 국적 문제다.
다시 말하면 우선 영문으로 쓰인 재미 한인 영문 소설을 우리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한 의견은 모두가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오히려 언급을 꺼려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지만,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영문 소설을 손쉽게 한국 문학이 아니라고 단정해 버리는 극히 패쇠적이고 보수적인 견해에 대한 문제다.
얼마 전 유럽 모 국가에 체류하면서 고국 모 문예 잡지에 체류기를 발표한 중견 문인도 일찍이 1934 년에 벌써 그곳 언어로 번역 소개된 강 용흘의 영문 소설을 보고 놀라와 하고 특기 할만한 사실이라고 소개하면서도, 이를 엄밀히 따지면 우리 민족문학이 아니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에 필자는 섭섭함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점은 실제 재외 동포문학 연구에 직접 참여한 분들 조차도 마찬가지여서, 재외 동포 문학의 특성이나 그 가치는 인정하면서도 한국 문학에 과감히 포함시키려는 국적문제에는 지극히 소극적이다.
예를 들면 강 용흘 작가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논술을 펼친 김 욱동 교수(서강대 인문학부) 조차도 그의 저서 <강 용흘 그의 삶과 문학>(서울대학 출판부 2004년)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그의 의견은, 그 어느 쪽에서도 밀침을 당하는 이들의 문학에 대해 ‘서얼문학’ 이라는 항목이라도 하나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미주한인 영문 소설의 그 특수한 성격에 대한 표현일 수는 있지만, 이는 재외동포 문학 이 지니고 있는 그 특별한 가치를 지나치게 폄하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국내 문학과 똑 같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재외 동포문학’이나 아니면 ‘한인 해외 문학’ 또는 ‘한인 이민문학’ 등으로 본국의 문학과 구분할 수 있고, 이렇게 사실적으로 성격을 구분하고 보면, 이들의 작품이 자연스럽게 한국문학에 포함되어지는 결론에 이르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문학이란 문자라고 하는 형태를 통해서 표현된 것이고, 영어는 외국어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래도 내용이 한국적인 우리의 것이라면 표현 방법에 관계없이 우리의 문학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은 나만의 지론은 아닐 것이다.
물론 독자가 현지인이니까 라는 표현도 있을 수 있지만, 이는 ‘우리 문학을 영문으로 번역해 놓았다면 그것은 한국 문학인가 아니면 다른 나라 문학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해 보면 더욱 이해가 쉬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내용이 순수한 우리의 것만이 아닌 소설도 있을 수 있어서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초기 영문 소설 작가들은 모두가 체류자나 다름없는 1세들이고, 한국인 사고 방식이나 한국인 정서로 한국적인 것을 표현한 것이니 이는 마땅히 한국 소설로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문학의 영역 확대나 세계화를 위해서라도 마땅한 것이고, 이에 대한 이의를 제시하려면 적어도 “왜 한국 문학에 포함시키면 안 되는가? “에 대한 답변으로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 이외의 보다 합당하고 구체적인 이유들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현지 미국인들이 이러한 문학을 미국 소수민족 문학이라고 구분해서 그들의 문학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키고 있는 점에서도 설명이 되고 있다. 물론 현대 미국문학이란 여러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다문화 사회 라고 하는 특수한 형태에서 이루어진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이러한 미주 한인 소설을 두고 그들은 소수 민족 소설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을 두고 미국 소설이 아니라고 표현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우리 한국 문학자들은 이를 두고 우리 문학이 아니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으니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문학의 세계화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우리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것만이 세계화가 아니다. 이러한 재외 동포 문학의 가치 있는 작품을 찾아, 이를 보급하고 이를 전진 기지로 삼아 우리 문학의 영역을 확대 발전 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 문학의 세계화의 한 지름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000년 노벨 수상자인 중국인 가오싱젠은 그의 대표작인 ‘영혼의 산’이 1990년 대만에서 출간되었으나 관심이 없었고, 다음해 스웨덴에서 그리고 1995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어 프랑스의 시민 자격으로 노벨상을 받았고, 레종 도뇌르 최고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프랑스인으로 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이러한 점은 이민 1.5세이며 미국 시민권자인 이 칭래가 모 잡지사와의 대담에서, 자신은 본국 작가에 앞서 노벨상을 수상하고 싶다고 말 했는데 이러한 말은 꽤 설득력이 있고, 그는 한국말에 서툴고 미국에서 자란 미국 시민이나 다름 없지만,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다면 그 업적은 다분히 한국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국적에 관계없이 한국인이고, 그의 작품 세계가 순수한 미국문학으로서는 빛을 보기가 힘들고, 소수 민족 작가로서, 그리고 그가 지금 까지 써오고 있는 것처럼 이중국적자나 이중 문화나 이민의 삶 등을 다룬 소수민족 소설로서 빛을 볼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이다.
따라서 이러한 재외동포 작가나 그들의 소설이 지니고 있는 우리 문학의 세계화에 대한 그 특별한 구실과 가치를 우리는 새롭게 인식해야 하며, 우리 문학의 세계화 일선에 나가있는 현지어로 쓰여진 우리의 재외 동포 문학이 보다 시급히 우리문학에 포함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소설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회성이 강한 한인 영문 소설에 대한 비평은 과거나 현재의 현상에 대한 규명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미래에 연계되어 나타나게 될 새로운 가치를 예견할 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시대가 바뀌고 있는데도 유독 우리만이 우리 것만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자세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미국 소수민족 문학에 대한 이해
사실 유 일한이나 강 용흘이 작품을 발표했던 1930 년대에도 미국에 소수민족 문학이란 형태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미국 문학이란 철저하게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앵글로 색슨 계통의 백인에 의해서 장악되고 있었고, 이외의 여성이나 흑인은 물론 외국인들의 작품은 거의가 무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1930년대에 쓰인 강 용흘의 작품이 미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미국 문단에서 상당히 권위가 있는 구겐하임(Guggenheim Award) 상까지 받았던 점은 정말 특기할만한 일이다.
그런대도 실제 그 시대 미국 주류문단에서는 그를 지속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사실 그 당시 그의 이름은 미국문단 그 어디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구체적 사실은 김 동욱 교수가 ‘강용흘, 그의 삶과 문학’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미국 그 어느 문학사전이나 기록물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다만 1988년에야 비로소 컬럼비아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컬럼비아 미국 문학사 >에서 처음으로 소개되고 있고, 이어서 1990년 미국 <히스 문학 앤솔로니>에 드디어 그의 작품이 수록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기록물로는 2002년에 출간된 <미국문학 백과사전 >(하퍼코린스 출판사)에 그의 이름이 등재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그의 작품의 가치와는 상관없이 그의 작품이 전통적인 미국의 주류 문학으로 인정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1980 년대부터 소수민족 문학이란 형태가 인정되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연구와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강 용흘의 경우만이 아니고 흑인 작가나 히스페닉 작가 등 모든 소수민족 작가들은 한결같이 이잔에는 철저히 소외 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풍토에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대전 이후인 1950 년대부터 유태인들을 필두로 한 소수민족 문학 활동이 활발하게 표면화 되기 시작 하면서부터 이고, 특히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1965년에 제정된 새로운 이민법으로 인해, 1968년부터 이민이 대량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이후로 전통적인 현지의 소수 민족인 아메리칸 흑인과 아시안 계까지 합세하여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경제 정치적인 측면에서 성공을 거두고 막강한 힘(Ethnic power group) 을 결집한 유태인들이 문학활동에서도 힘을 발휘하여 빛을 보게 됨으로써 소수민족 문학이란 형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태인 문학활동의 그 대표적인 작가는 1978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사무엘 벨로(Samuel Bellow)와 함께 버나드 맬러모드( Berard Malamud)와, 필립 로스(Philip Roth)등으로 이들이 견인차 노릇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유럽에서 오랜 세월 동안 다듬어온 그들의 전통적인 정서와 언어적인 아름다움을 현대의 신대륙에 옮겨와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로 유태계에 의해서 형성되어 왔던 소수 민족 문학활동이 1980 년대부터는 기타 많은 소수민족 작가들의 활동으로 더욱 활발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많은 원주민 흑인 작가들의 두드러진 활동은 이색적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아메리카 흑인 문학은 일찍이 1930-40 년대부터 미국 남부지방에서 하나의 집단문학 형식으로 발생하여 그 맥을 현대에까지 이어온 것으로, 이들의 작품 소재는 전통적인 백인문학과는 조금 다르게 주로 미국 독립정신에서 비롯된 자유와 평등 사상 같은 극히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민주 사상과 인간의 존엄성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꾸준하게 가치가 인정되어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들은 부단히 차별과 학대 속에 살았으며, 195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민권 운동 등을 통해서 힘을 얻어 비로소 1980 년대부터 미국의 건국 이념과도 같은 평등과 자유에 대한 그들의 노력이 이제는 모든 소수민족은 물론 미국 전 사회에 하나의 기본이 되는 정신과 이념으로 자리잡아가기 시작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흑인 문학의 초석이라 할 수 있는 초기의 남부 흑인 문학 형성에 큰 공적을 남긴 작가로는 <Native son> 을 발표한 리차드 라잇 (Richard Wright)과 1952년에 <Invisible man>을 발표한 랄프 일리슨(Ralph EIlison,)등이 있고, 1980년대 들어서면서 수 많은 흑인 작가들의 등장을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작가가 앨리스 워커(Alice Walker)와 토니 모리슨(Tony Morrison)이다. 앨리스 워커는 1982년에 <The Color of pople> 를 발표해서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풀리쳐 (Pulitzer)문학상을 수상했고, 토니 매리슨은 1988년에 <Beloved>를 발표해서 역시 퓨리쳐 상을 수상했고, 이어서 아프리카 아메리칸 문학자로서는 최초로 노벨상(1994년)을 수상했다. 이외에 이쉬멜 리드(Ishmael Reed)와 트레이 엘리스 (Trey Ellis), 그리고 존 와이드 맨(john Wide man)등 많은 흑인작가들이 있다.
우선 이러한 소수민족 문학 운동은 먼저 교육과 사회적인 면에서 등장하기 시작 했는데, 이전까지는 WASP(white-Anglo Saxon Protestant)라고 해서 미국 주류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미국의 전통적인 언어, 가치, 행동양식, 생활양식 등의 수용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일종의 동화론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해 로버트 파크(Robert Park. 1950)등은 동화 작업(Acculturation process)의 그 구체적 단계적 방법 까지도 제시하여 모든 인종이 미국사회에 동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밀튼 고든(Milton Gordon.)등은 이는 문화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구조적으로는 불합리하다는 점 등을 제시하고 보다 바람직한 동화운동의 필요성을 역설 하였다. 결국 멜팅 팟(Melting Pot)이라고 하는 비교적 합리적인 동화론이 제시되어 이른바 모든 문화나 언어도 하나로 화합하여 새로운 하나의 문화를 창조해 내자는 운동이 대두 되었다. 그러나 이는 얼핏 보면 아주 그럴싸한 자유 평등사상 같지만, 이도 엄밀히 따지면 다수인 백인사회에 동화 흡수되어 버리고, 소수민족 집단(Racial Minority)은 구조적으론 고립될 수 밖에 없는 모순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80 년대에 나타난 아브람슨(Abramson)의 다원주의(Pluralism)는 양상을 크게 달리하여 나타난다. 이는 소수민족의 문화나 언어도 미국의 문화와 언어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를 보존하고 병행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주장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민족 집단간 차이는 편견과 차별이 아닌 평등과 자율이라는 생각으로 시작 되었으나, 사실 초기의 이 다원주의는 다만 문화적인 동화로 민족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는 결과만을 달성했을 뿐, 권리라고 하는 정치적 기득권만은 양보하지 않으려는 이중적 구조라고 할 수 있는 불평등적 다원론(unequalitarian Pluralism)으로 모순점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평등적 다원론(Equalitarian Pluralism)으로 소수 집단들이 문화적 구조적인 면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권력까지도 평등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는 유태인들이 민족 동원론(Ethinic Mobilization Theory)이라고 하는 이념으로 무조건 동화하려 노력하지 않고, 그들만의 혈통과 유대교라고 하는 신앙과 그들의 고유한 언어를 바탕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며, 동족 서로의 유대와 단결력으로 경쟁력을 지닌 일종의 ‘보호된 집단 적소’(Protected Niches)등을 형성하여 힘을 발휘하고 정치적 권리까지도 완전히 지니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민 1세들은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고, 이를 교육에 투자하여 2세들로 하여금 현지에 적응하여 정치적 힘까지도 지니게 되는 자연동화 방식이 대두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노력으로 유태인들은 뉴욕을 중심으로 한 그들만의 집단 세력이 형성되었고, 또한 이러한 결과가 실질적으로 미국 사회에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이 많은 연구와 통계로 입증이 되자, 현지 정책 입안자들도 결국 소수민족의 힘을 인정하고 그들이 지향하는 문화 언어 보존에 동조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1950 년대부터 끈질기게 이어온 흑인들의 민권 운동과 흑인 문학자와 소수 민족 문학자들이 이 땅 위에 끈질기게 펼쳐온 평등과 자유 사상 등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도 일찍이 1900년대에 벌써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농장경영에서 경제적인 결집력을 보여 주었고, 배트남인들도 월남 패망 이후 미국 정부가 마련한 여러 지역에 분산 수용되었으나, 그들은 1970년대 오랜지 카운티의 가든 글로브 한곳으로 모여 살면서 그들대로의 민족 공동체(Ethnic Community)를 형성했고, 코리아 타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소수 민족집단이 현지에 동화 적응되어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동족간의 연대와 협력을 도모할 수 있는 지리적인 민족 기반(Ethnic Base)를 형성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나아가서 이제 모든 소수 민족들은 서로 병행해서 일종의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서로가 협력해서 완전한 권리 행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WASP(white-Anglo Saxon Protestant)라고 하는 종전의 일방적이고 거의 강압적인 동화 정책으로 규격화 된 단일문화(Mono-Cultural Pattern)에서, 이제는 모든 소수 민족이 그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자기들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누릴 수 있는 다문화 주의 (Multiculturalism)속에 살게 되었다. 이는 바로 스테인 글래스(Stain Glass)문화나 모자익 문화(Mosaic Culture)나 또는 샐러드 볼 문화(Salad Bowl Culture)로 표현 되기도 한다. 이는 종전 백인 위주의 일방적 동화론에 대한 소수민족을 위한 다원주의론 (Pluralism)의 빛나는 승리이며, 자유 평등 사상을 기본으로 하는 미국 건국이념이 실현된 것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많은 아시안계 문학자들의 활동이 돋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중국계의 작가 맥신 홍 킹스톤(Maxine Hong Kingston)을 비롯해서 애미 탠(Amy Tan), 그리고 인도의 바라티 모캐리(Barati Mukerjee )와 필립핀계의 제시카 해지돔(Jessica Hagedom )등이다. 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현지의 삶과 함께 자신들의 고국이 지니고 있는 신비하고 깊이 있는 정신 세계나 고유한 문화를 표현함으로써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인 작가 역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작가가 이창래 (1967-Chang Rae Lee. 예일대 교수)이고, 차 학경(1951-1982 Theresa Hak Kyung Cha 작고), 수잔 최(1969- Susan Choi ) 김 난영(1926-1987 Ronyoung Kim), 캐티 송(Cahty Song 1955-)노라 옥자 캘리(Nora Okja Kally )등도 미국 문단에 널리 알려진 작가들이다.
이들은 모두가 각각 중국계 아메리칸, 한국계 아메리칸 등의 소수 민족 국가별로 분류되어 각각 소수 민족 작가로 불려지고 있다. 이처럼 현 미국 문단에는 소수민족 문학의 열풍이 불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소수민족에게는 다시 없이 좋은 현상이며 각 소수 민족 문학이 크게 부흥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 셈이라 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미국의 소수민족 문학의 열풍에 편승하여 우리의 문화나 문학을 현지인에게 알리고. 우리의 문학을 통해서 우리의 고유한 민족혼까지도 깃든 이중문화의 꽃을 이 땅에 피워 우리문학이 깃들인 새로운 세계 문화 창조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문학의 세계화의 길이고, 우리의 문학과 문화를 보다 글로벌적으로 계승 발전 시켜갈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우리 문학의 가치를 우리만이 그대로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타민족에게도 알리고 이의 검증을 통해서 타민족에게 인정 받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2)미주한인 영문 소설의 성격
앞서 말한 것처럼 미주 한인 영문소설은 국문 소설과는 또 크게 다르고, 같은 영문 소설이라도 소설이 쓰인 시대나 소설을 쓴 작자의 세대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영문소설의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란 힘들고, 작자의 이민 신분이나 소설이 쓰인 시대별로 나타나는 특색을 통해서 소설의 성격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한국계 미국인들이 쓴 작품을 통칭해서 한국계 미국인 문학 (Korean American Literature)이라고 하고 있으나, 이는 내용적으로는 크게 두 형태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우선 재미 한인 작가(Korean Writer in America)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룹이 그 하나인데, 이는 한국인 의식으로 한국적인 내용을 단지 영문으로만 쓴 작가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1930 년대로부터 1960 년대 사이의 작가들인 유 일한, 강 용흘, 백인덕, 김은국, 김 용익 등 이민 일세 작가들이 이에 해당하는 작가들이다.
이들이 쓴 영문 소설은 모두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회상을 자전적 소설로 엮은 것들로 한국적인 이야기를 한국적인 정서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거의가 다 미국 소설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한국 소설이라는 표현이 타당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또 다른 하나의 그룹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 (Korean American Writer) 라고 하는 그룹으로, 이들은 이민 1.5세나 이민 2, 3세 들로 거의가 다 미국 시민권자들 이어서 이들의 의식 구조는 모두가 고국쪽보다는 미국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1980 년대 이후로 등장하는 작가들로 이들의 영문 소설에서는 1세들의 이야기들과는 다르게, 과거가 아닌 현재의 삶과 함께 자신에 관계된 현실적인 문제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며, 주로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표현되고,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불안과 갈등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특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한국계 미국 작가들은 이 창래, 차 학경, 노라 옥자 캘러 등이 대표적인 작가들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소설이 쓰인 시대에 따라 내용을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시대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한인 영문 소설이 유 일한과 강 용흘에 의해서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한 1930 년대를 제1기라 할 수 있고, 이 시기의 두 작가는 앞서 말한 ‘재미 한국 작가 군’에 속하는 1세대 작가들이다. 이들의 작품 세게는 고국에 대한 회상을 자전적 소설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고, 작품의 주제가 또한 고국에 대한 향수와 애정을 바탕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이러한 점은 결국 주체성에 대한 자각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그들의 관심이 여전히 구세계에 머물러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1950 년대의 백 인덕과 1960년대의 김 은국과 김 용익을 한 시대로 묶어 1960년대를 미주 한인 영문 소설의 제2기로 볼 수 있다. 이들 역시 제 1기의 시대와 같이 모두 이민 1세나 다름 없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의식의 세계 역시 고국에 바탕을 둔 한국적 사고에서 표현되고 있고, 30년대의 작품의 경향과 같이 과거의 회상 내용을 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특히 김 은국은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써서 전쟁문학이라는 본국의 시대적인 문학과도 연계되어 있고, 김 용익은 오히려 더 철저하게 한국적인 토속의 정서를 표현 하고 있는 점은 이색적이다.
다만 30년대의 비교적 단일한 회상의 형태에서 벗어나, 1960 년대는 차츰 보다 소설적인 표현 방법과 주제가 나타나고 있는 점이 특색인데, 백인덕의 페미니즘이나 김 은국의 전쟁과 신앙을 통한 인간의 양심 세계에 대한 표현 등이 그렇다. 이러한 새 세계나 새로운 사상에 대한 도전은 30년대 강 용흘의 <초>이나 <동양인 서양에 가다> 등에서 나타난 아메리카 드림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도 있는 것으로, 이러한 요소들이 이민 문학으로서 그리고 미국문학에 접근해 가는 요소들로 차츰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제 3기는 1980년대부터 등장한 이민 1.5세나 이민 2, 3세들에 의해서 나타난 영문 소설 들로 많은 젊은 신 세대 작가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한국계 미국 자가들이다. 이들은 우선 현지의 삶에서 오는 부모들과의 갈등이나 현지사회에 대한 소외감 등에서 이야기가 표현되는 것이 특색이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고 갈등과 좌절을 맛보고, 그러한 과정에서 차츰 이중 문화인으로 조화되어가는 등 다양한 현지의 삶의 모습이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핵심을 이루고 있고, 특히 다행스러운 점은 미국의 문화적 경향이 글로벌적인 다문화주의를 지향하고 있어서, 현재는 이들이 종전의 인종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된 점이 이들 작품 세계에 영향을 많이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 1기의 작품이 재미 한인 영문 소설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면, 제 2기는 이의 확인이라 할 수 있고, 제 3기인 이 시기는 미주 한인 영문 소설이 크게 빛을 보게 된 일종의 정착기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작가의 세대에 따른 구분인데, 우선 이민 1세라 함은 한국에서 성장과 교육을 마치고 이민을 온 사람들이나, 한동안 미주에 체류한 사람들의 신분을 일컫는 세대로, 1930 년대부터 -60년대의 모든 작가들이 바로 이 이민 1세대에 속하는 작가들이다. 이들의 의식 구조는 이곳에서 상당 기간을 거주해도 여전히 고국의 의식구조를 지닌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 세계는 표현만 영어로 되어 있을 뿐 내용은 과거에 몸담고 살았던 고국의 이야기들이다. 따라서 작품의 주제 의식도 대체로 향수나 조국애 등이어서, 개인적인 표현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집단의식이 많이 표현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다음으로 이민 1.5세가 있는데, 이들은 교육을 마치기 이전인 어린 시절에 부모를 따라 이민 온 세대들로, 이민 세대들 중에서 가장 애매하고 불편한 의식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세대다. 이들은 고국에서 태어났으나 주요 교육을 미국에서 마쳐 영어에 거의 불편을 느끼지 않지만, 그들에게는 부모와의 관계 등 이민 1세와 달리 양면으로 불편과 갈등을 느낀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 세계에서 이러한 문화에 대한 갈등과 함께 민족 정체성의 (Ethnical identity)문가 심각하게 대두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미국 시민권자 들이고, 그들의 의식 구조는 한국인이라기 보다는 보다 미국적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이 창래(hang Ra Lee)와 차 학경(Theresa Hak Kyung) 등이다.
다음은 이민 2세들인데 이들은 이민 1세들의 자녀들로 완전한 미국시민으로 영어에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는 대신에 한국어에 불편을 느끼고(특히1910년대 하와이 이민자들의 자녀들 모두가) 1세들과 의사 소통에 불편을 느낀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1970년대 이후의 1.5세나 2세들은 부모들의 모국어에 대한 관심으로 모국어를 많이 익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작품 세계는 1.5세 들 보다는 더욱 더 미국적이라고 할 수 있고 내용 또한 더욱 다양하게 나타나는 점이 특색이다. 따라서 현지 삶의 모습인 이중문화의 표현과 함께 자신의 내력과 부모들에 대한 관심과 정체성에 대한 표현이 주제로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 작가로는 이 난영(Ran young) 수잔 최(Suzan Choi) 앨래인 킴(Elaine H Kim) 카니 강(Connie Kang)등이 있다.
다음은 이민 3세들이고 이들은 거의가 다 1950 년 이전의 이민자들의 자손들이어서 모국어를 거의 모른다. 따라서 이들은 미국인의 의식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고. 이중문화인으로서의 조화된 삶의 모습을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더러는 자신들의 뿌리인 조상들에 대한 기억이나 힘들게 살았던 초기 이민자들의 행적에 대한 관심을 조명하려는 노력이 소설 속에 나타나고 있고. 특히 시인 캐티 송(Cathy Song)과 이민 2세인 소설가 노라 옥자 켈러 (Nora Okja Keller)등은 주로 부모와 조부모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가족 이민의 내력이나 그들이 겪었던 아픔을 사회적이고 시대적으로 구명하고 대변해 보려는 노력이 표현 된다. 아는 어디까지나 정체성 확립이라는 바탕을 통해서 나타나는 역사에 대한 바른 정의 구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작품 주제에 따른 구분인데, 첫째로 나타나는 중심 주제가 바로 고국에 대한 향수와 조국애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민 1세들이나 체류 작가들에게 의해 쓰인 한인 초기 이민문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내용이다. 주로 나와 그리고 우리에 대한 이야기로 한국적인 인간성이나 민족성, 그리고 한국적인 사고와 정서가 표현되고 있다, 이는 바로 구세계에 대한 관심이 중점적으로 표현된 것이고, 주체성에 대한 확립과 확인 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창의적인 미적 가치보다는 다분히 사회적 시대적인 가치가 표현되고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의 모든 영문 소설들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이다. 이는 모든 이민자들의 공통적인 꿈이다. 그 구체적 대상은 아메리카의 드림이라고 하는 신세계에 대한 관심이지만, 더러는 학자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헌신하려는 극히 사회적인 꿈이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꿈은 일시 체류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 일한이다.
아무튼 이민의 꿈인 아메리카 드림은 현실적으론 힘이 들고, 그래서 소설에 나타나는 그 결과는 한결같이 만족스럽지가 못하고 실망과 좌절로 표현되지만, 그래도 미래에 대한 꿈을 불빛처럼 희망적으로 그들의 가슴에 지니고 있다. 이는 이민자들이 마땅히 겪어야 할 과정이고, 이민 2,3 세대로 이어지면 이들의 꿈은 이중문화인이나 현지인으로 동화되어 부분적인 꿈의 실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셋째로 나타나는 주제가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추구와 확립이다. 이민 1세들에게는 주체성에 대한 확립으로 표현되지만, 이민 1.5세나 2.3세에서는 자아에 대한 발견과 함께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방황과 갈등(identity crisis)을 통해서 차츰 자산들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노력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확립은 이들이 건전한 다중문화인으로 발전해 가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넷째는 이중문화에 대한 조화나 새로운 문화 창조에 대한 표현이다. 맹목적인 현지에로의 동화나, 또는 이와는 반대로 구세계인 고국을 그대로 붙들고 살아가려는 노력은 합리적일 수가 없고, 현지의 문화를 조화되게 받아드려 이중문화인으로 발전되어 가려는 노력이 가장 합리적인 현지 적응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현지에 효과적으로 적응해가는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소설이 바로 미래 지향적인 새로운 글로벌 문학으로 접근해 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는 역사와 사회의 바른 가치에 대한 정의 구현이다. 이는 이민 2.3세의 작품 세계에서 나타나는 경우로. 부모나 조부모들 기억이나 행적을 통해서 그들이 힘들게 살았던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관심에서 이를 조명하여 조상들을 변호하고 왜곡된 정의를 바르게 구현하려는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면 종군 위안부에 대한 소설 등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아무튼 고국의 현실이 암담했던 과거 모국어 교육에 조차 소홀 했던 시대와는 달리, 현재는 조국에 대한 긍지와 조국에 대한 정체성 확립으로 앞으로의 이민 2.3세 들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고, 특히 다문화주의로 소수민족 작가들도 보호되고 인정을 받을 수 있어서, 앞으로의 미주 한인 영문소설의 장래는 밝다고 할 수 있다.
3) 최초 미주 한인 영문 소설 등장
미주의 최초 한인 영문 소설은 유한양행 설립자인 고 유 일한 (柳一韓 IL Han New. 1895-1971)박사에 의해서 1928년에 발표된 <When I was a boy in Korea >(내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 Lothrope, Lee & Shepard Co. Bost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별로 소개되지 않은 작품인데, 그 이유는 우선 이 작품을 소설로 보기에는 조금은 무리가 있다는 점에서인 듯싶다.
그러나 이민 문학이라고 하는 특수한 시대적 사회적 여건을 감안하고, 다른 장르의 문학 작품과는 달리 보다 더 사회적 (Social Status)일 수 있고, 우리 문화나 문학을 남에게 소개할 수 있는 문화의 접속자 구실이 바로 이민 소설이 지닌 또 다른 가치라는 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소설적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 일한의 ‘내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비교적 자세히 언급한 분은 유 선모 교수(경기대 영문학)로 그의 저서 <미국 소수민족 문학의 이해 , 한국계 편>(신아사, 2001년)에서, 그는 이민 일세의 작가가 영어를 마스터해서 쓴 초기의 영문 소설 작품이라는 표현으로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 작품에 대해 언급한 분으로 <강 용흘, 그의 삶과 문학>(2004 서울대 출판부)이란 저서를 쓴 김 욱동 교수(서강대 인문학부)는 강 용흘을 논하는 과정에서 한인에 의해 영어로 출간된 책에 대한 언급 중 유 일한의 ‘한국에서의 내 소년시절’ 작품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는 문학의 테두리에 넣을 수 있으나, 엄격한 의미에서는 문학의 테두리에서 벗어 난다”( 강용흘 그의 삶과 문학 5쪽 )는 표현으로 문학 장르에 대한 의견에 앞서 아예 그 문학적 가치를 단정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또한 이와 똑 같이 부정적으로 보는 분으로 김 동하(서울 시립대)교수가 있는데, 이분 역시 ‘강 용흘을 논하는 글의 참고문’ (‘재미한인 문학의 어제와 오늘’ 미주문학 2002년 가을호 50쪽)에서 유일한의 작품에 대해 “그의 글은 논픽션에 가까우며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다.”라고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이분들의 의견에 납득이 가긴 하지만, 결코 동의할 수는 없다. 우선 김 욱동 교수는 <강 용흘, 그의 삶과 문학> 의 머리글의 미국문학의 영역이나 정의에 대한 표현에서 미국 문학자들의 두 의견을 소개하고 있는데, 한쪽은 “미국에서 태어난 앵글로색슨 혈통의 백인에 의해서 미국적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만”을 고집하고, 한쪽에서는 “신세계의 신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은 장르 중심의 순 문학에서 벗어난 것이라도 문학적 분석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저자의 인종에 관계없이 문학의 범위에 넣으려고 한다.” 고 인용 소개하고 후자의 입장이 훨씬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문학적 분석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모두가 다 미국문학의 범위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우리 문학의 이야기는 아니고 김 욱동 교수 자신이 밝힌 미국문학의 이야기이지만, 이러하니 유일한의 작품도 문학에 포함 시켜야 한다거나, 아니면 미국 문학자들의 문학사관이 그러하니 우리도 그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미주에서 쓰인 한인 영문 작품은 미국의 이민 문학처럼 하나의 이민 문학(물론 모든 작품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고국 문학과는 또 다른 특별한 형태의 문학에 속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국 문학과는 내용이 크게 다를 수 있는 이민 문학은 일반 문학에서 추구하는 순 문학적인 미학적 가치보다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면에서의 가치가 더 소중하다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미국의 문학은 이민의 역사와 병행해서 이루어진 이민 문학으로부터 시작된 문학이다. 물론 유럽 문학의 연장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초기의 문학은 유럽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 내용은 신천지에 대한 탐험기나 일기, 보도, 메모 등의 기록문 같은 실용문 들이어서 순 문학적인 가치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실용문 같은 기록문들이 오늘날의 거대한 미국문학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고, 그들은 그러한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글과 같은 ‘제임스타운 식민지 건설‘(1607년) ‘필그림파더스 플리머스에 상륙 식민지 건설’ (1620년) ‘매사추세스 식민지 건설’(1630년) ‘플리머스 식민지에 대하여’(Of Plymouth Plantation, 1630년 초안 착수) 등의 실용문을 초기 대표 문학작품으로 열거한다. 이들은 거의가 다 극히 역사적이고 시대적이고 사실적이고 사회적인 글들이다. 그러한 시대에 완전한 장르의 문학작품이 쓰여지기란 쉽지가 않았고, 모두가 현지의 자연 지리와 그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 등이다. 미국에서 최초로 나타난 순 문학적인 글은 신대륙이 발견된 지 150년이 지난 1640년에 작성된 ‘매사추세츠만의 식민지 건설 찬미가 집’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미국문학에 대해 4 부로 된 <미국 문학사>(Literary History of the Unite States)의 편집을 맡은 로버트 스필러(Robert E. Spiller)는 미국 문학사를 크게 네 주기로 구분하고 있는데 초기의 문학내용을 ‘서간문’ 그 다음엔 ‘종교와 철학’에 관한 논의를, 그 뒤를 이어 ‘모방적인 예술품’이, 그리고 다음에 ‘미국적 신생활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고 구분하고 있다. 또한 미국 문학 초기의 표현을 서간문이라고 했는데, 그의 대표적인 최초의 표현이 바로 저 유명한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재무대신에게 적어 보낸 ‘’ 이번 일은 성공 하였으므로 기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서간문(1493년)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미국 문학사, Robert spiller)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민족이동과 문화이동으로 이루어진 신대륙의 초기 문학을 문학으로 치지도 않았던 유럽에서 오늘날에는 미국의 문학의 영향을 역으로 받고 있는 점에서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1910 년대부터 쓰인 초기 미주한인 한국어 소설을 보더라도 그렇다. 초기의 재미한인 소설은 한결같이 구소설의 형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콩트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작품도 있고, 완전한 서간문(사랑하는 S누님께. 1924년 신한 민보 게재)임에도 작자는 단편소설이라는 장르를 달아 놓고 있다. 우리가 이를 소설이 아니라고 단적으로 부정하기엔 그 내용이 순수한 서간문만의 내용이 아닌 애정윤리니 결혼관이나 여인상 등 소설적이기도 한 사회성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처럼 이민문학이란 일반 문학 형태와는 조금 다르게 구분되어야 할 요소가 않다. 따라서 이들 이민문학에 대한 평가는 그 기준이 고국과는 또 다른 이민 문학이라는 측면에서 그 평가 기준이 다르게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 한다면 유 일한의 작품을 문학작품에서 벗어난 작품이라고 하기엔 설득력이 없고, 이 작품은 문학작품을 넘어서서 당연하게 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첫째 우선 이 글의 제목이<내 한국에서의 소년 시절>(When I was boy in Korea)이라고 표기되어 있듯이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을 적고 있는 자전적인 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라고 하는 소설의 근원적인 시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선 내 자신의 이야기를 적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최초의 소설들이 역사적 사건 속의 인물이나 위인들에 대한 기록인 영웅전이나 위인전, 그리고 개인의 행적이었던 점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점을 들어보면 우선 형식적인 면에서 통일된 사건과 일정한 인물 묘사 등의 소설적 구성이 없이, 여러 내용이 단편적으로 병행 열거 되어 있는 점이 치명적이라 할 수가 있지만, 자서전이 소설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논 픽션이면서도 소설이 될 수 있는 작품이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전편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담과 함께 깊은 향수가 어려있는 점이나, 어린 시절에 지녔던 꿈이나 동물에 대한 우화와 토속적인 이야기들까지도 많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다가 개인의 주관적인 선악에 대한 표현과 함께 고국인들의 가치관이 표현되고 있고, 이러한 점은 필자의 내면 세계와 고국인들의 인간성 내지 민족성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어서 더욱 소설적이라는 것이다.
다음에 거론하게 될 강 용흘씨의 영문소설 소설 ‘초당‘도 그렇지만, 이 ‘초당’을 어린 독자들을 위해서 전반부만을 다시 쓴 ‘행복한 숲’(The Happy Grove. 1937년)도 사실 성장 시절의 고향에 대한 회상을 적은 내용이라는 점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다만 유일한의 작품 내용은 개인적이 글과 고국의 풍물과 전통 등 문화적인 면에도 관심을 가지고, 민족적인 인간성을 표현한 점에 비해, 강 용흘은 이를 보다 문학적으로 그리고 주로 개인적인 인간성이 표현되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필자는 적어도 이민 문학이라는 형태의 작품으로 외국인들을 독자로 하여 우리의 문화와 역사와 국민적 정서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유일한의 “내 한국에서의 소년시절’을 소설로 구분하기에 주저함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4)유 일한의 출생과 생애
유 일한 (柳一韓 IL Han New. 1895-1971)은 1895년 평양에서 아버지 유 기연(柳基 淵)과 어머니 김 기복(金 基福)사이의 구 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원래 유 일형(馨 진주 류씨의 27世 항렬) 이었으나, 그가 미국에 거주 시 고교 재학시절 신문 보급소에서 그의 이름 끝자를 한(Han)으로 잘못 표기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가 스스로 ‘형’(馨)을 한(韓)으로 개명을 하고, 이를 고국 부친에게 알려서, 이후로 그의 부친도 그의 다른 동생들 이름도 이한 삼한 사한 등 차례로 지어서 사용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가 나라 한(韓)자를 택한 것만 보아도 그의 나라 사랑에 대한 정신과 그의 주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엿볼 수가 있다. 또한 그의 성 유(柳)가 영문 ‘New’로 쓰이게 된 동기는 중국인들의 발음에서 柳가 ‘Liu’로 발음된 데서 연유 되었다고 할 수 있고, 이는 ‘New’의 새롭다라는 조국의 미래에 대한 그의 꿈을 표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경북 예천이 고향인 그의 부친 유 기연씨는 일찍이 고향을 떠나 전국 각지를 돌아 다니며 상업에 종사했던 분으로 평양이 고향인 김 기복씨와 결혼을 해서 평양에 정착했고, 그는 그곳에서 일찍이 기독교인이 되어 당시 미 북장로회의 선교사로 한국에 와있던 사무엘 마펫(S. maffett. 숭실중, 숭실대 설립자)씨로부터 초기에 세례를 받았던 몇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이처럼 그의 부친 유 기연 씨는 일찍이 서구의 기독교 사상과 개화에 관심을 지녔던 분이고, 이러한 점 때문에 그가 그의 장남인 일한을 9세의 나이에 조기유학으로 미국에 보낼 수 있는 일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시대는 지금과는 모든 상황이 크게 달랐다는 점으로 비추어볼 때 단 아홉 살 밖에 안된 그의 아들을 이국에 유학을 보낸다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분은 서구문명에 일찍이 눈을 뜬 선각자라는 것을 잘 알 수 있고, 특히 그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남달리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그가 그의 차남은 러시아로 그리고 3남은 중국, 5남은 일본 등으로 유학을 보냈던 사실에서도 설명이 되고 있다.
그는 평양에서 비단점과 잡화점 그리고 싱거 미싱 대리점을 경영하고 있었던 분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종합상사 격인 거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투철한 애국자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뒤에 조국이 한일 합방이 되자 가족을 이끌고 만주 간도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는 망국에 대한 울분에서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떠났으리라고 생각이 되지만, 그 직접적인 동기는 그 당시 정신여고에 다니던 그의 딸이 독립 운동의 비밀 연락 업무에 연루되어, 이에 대한 경찰의 감시와 박해를 받게 되자 이를 피해 떠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그가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던 점을 엿볼 수 있는데, 그는 간도에서도 꾸준하게 독립운동에 관여했고, 특히 동명서숙(明東書塾)의 재무를 담당하는 등 독립 자금 조달에 관여했던 사실이 독립운동사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조국에 대한 남다른 애국심은 그가 늘상 부르던 애국가를 ‘피난처 있으리’ 란 찬송가 곡조에 맞춰 불렀다는 일화에서도 잘 엿볼 수가 있다.
그의 부친에게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바로 그의 인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우선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인품을 엿볼 수가 있고, 그의 행적을 통해서 나타난 그의 정신 세계는 지극히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유교의 관습에 젖어 있었던 분이고, 성품 역시 강직하고 근엄한 분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 후일 유일 한씨가 그의 부친의 인품에 대한 기억을 말하는 것 중에서 부친은 지극히 엄격한 분이었다는 것으로 부친의 인품을 표현했던 점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이처럼 유 일한씨의 부친은 일찍이 깨우친 선각자의 한 분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조국의 광복과 조국의 근대화에 관심이 많았던 애국자이며, 특히 교육과 개화에 남다른 관심을 지녔던 분으로 유능한 상업 경영인이었던 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평범하지 아니한 분 이였기에 이러한 점 유 한일에게 영향을 끼쳐, 그가 부친의 정신과 행동을 이어받아 국가와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유 일한씨는 미국에서 성장하고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거의 미국인에 가까운 1.5세였지만, 어린 시절에 부친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서 그는 결코 고국을 잊지 않았고, 고국의 전통적인 관습과 예절에 밝았고, 한국인으로서 긍지와 민족의 얼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부친은 간도에서는 사업에 별 발전이 없었던 듯, 유 일한씨가 미국에서 보내준 돈으로 만주에서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1925년에 귀국해서 평양 상수리에서 살다가 1934년 8월 73세로 별세했다.
유 일한씨의 도미 경위는 1904년에 대한제국 순회공사인 박 장현(1908년 미국에서 작고, 박용만의 숙부)을 따라 미국에 건너가게 됐다고 하나, 다른 주장에 의하면 유기연공이 다니던 교회의 선교사가 두 명의 한국인 아이를 유학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하여, 유 기연 공이 직접 부탁하여 이루어졌다고도 하지만, 이를 확인 할 길은 없고 다만 어쩌면 두 내용이 동시에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아무튼 그는 박 장현과 박용만 그리고 정한필 정 한경 어린이 등 다른 사람 십여 명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미국 중부에 있는 네브라스카 주로 가게 되는데, 그 당시 그곳에는 30여명의 한인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고, 한인들이 왕래가 빈번해서 고국에 비교적 잘 알려진 곳이었다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유 일한은 이곳 네브라스카에 도착하자마자 커니(Kearney) 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침례교인이며 독일계 계통인 미국인 36세 및 38세의 미혼 자매의 집에 곧바로 입양이 된다.
이분들은 생활 태도가 근검 절약하고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통해서 자녀들의 자립 정신을 키워주는 전통적인 종교인들이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일을 시키고 용돈을 주는 관습이 있을 만큼 엄격한 분들이었고, 그도 소년 시절부터 땔감을 마련하는 등 신체적 노동으로 신체를 단련하고, 인내심과 함께 근검 절약 정신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강한 정신력과, 애국심, 그리고 강인한 체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1909년 박용만이 그곳에 설립한 한인 소년병 학교에 참가하여 방학 때마다 교육을 받았는데, 이곳에서 유 일한은 군사훈련은 물론 한국어와 한국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었다. 이 학교는 설립한지 삼 년만에 설립자 박용만이 나성 신한 일보 주필로 떠나면서 1912년 11월에 해산이 되었다. 이러한 신체와 정신 수련으로 그가 고교시절 육상선수와 이름난 풋볼 선수로 활동할 수 있었던 강인한 정신과 체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고교 시절부터 고학을 해서 스스로 학비를 조달했고 했고, 이러한 점 역시 그가 훗날 대 기업의 경영인으로 성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교를 마친 유 일한은 1916년에 미시건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는데, 이곳에서도 그는 동양인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학비를 조달하고 있었고, 이러한 경험이 후에 그가 식품회사를 세울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그의 대학시절 행적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벌써 많은 독립 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구국운동에 앞장서 활동을 전개 했는데, 그 대표적인 활동이 바로 삼일운동이 일어났던 해인 1919년 4월 14일에 필라델피아에서 실시된 미국 한인 자유대회에 청년 대표로 참석한 일이다.
미국 국회 도서관 기록에 의하면, 상해 임정 제1회 모임이 선포된 다음날인 1919년 4월 14일부터 필라델피아의 미국 독립회관에서 서 재필을 대회장으로 하여 이 승만, 조 병옥, 임 병직, 장 덕수, 이대위 등 미주 여러 단체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실시된 한인 자유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 24세 대학생인 유 일한은 대의원으로 참석하여 결의안 기초문 작성위원으로 활동하고, 그는 영어와 한국어로 미국 정치인들과 한인들 앞에서 한국민의 독립에 대한 목적과 열망에 대한 10 개 결의 항목을 낭독했다.
이러한 그의 투철한 독립정신과 행동은 어린 시절 그의 부친으로부터 감화를 받았고, 현지에서는 박용만의 군사학교에서 훈령을 받았고, 그리고 그가 존경하고 따르던 서재필 박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미시건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철도회사를 거쳐 제네럴 일익트릭 회사에 회계사로 취직했으나 동시에 꾸준하게 개인사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이 때 이미 백 불이라고 하는 거금을 융자 받아 그의 부친에게 송금하여 그의 부친으로 하여금 간도에서 농장을 경영하게 했고, 1922년 27세 때에는 대학에서 함께 공부했던 미국인 친구와 함께 동업으로 La Choy 식품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게 된다.
사업이 날로 번창하게 되자, 그는 대학 재학시절에 사귀었던 미국에서 출생한 중국계 미국 시민인 매리 우(Mary Woo. American- Chinese, 중국명 호미리(胡美利 )와 결혼을 하고(1925년) 그 해에 일차 귀국해서 고국의 현황을 살피고 이어서 영구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도미 하자마자 곧바로 그의 라 초이스 식품 회사를 동업자인 월리스 스미스에 넘기고 영구 귀국(1926년 10월)헸다.
귀국시 그가 인사차 찾아간 분이 서재필 박사이고, 그 때 서박사가 목각 판화 한 점을 그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후일 그 목판화에 새겨진 나무가 유한 양행의 심볼인 버드나무 상표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부인과 함께 귀국하자, 곧바로 일본 경찰 고등계에 불려가게 되고 여러 가지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그는 줄곧 요시찰인물로 감시를 받아왔다.
또한 세브란스 의대 학장 에비승씨로부터 그는 상과 대학 교수로 그리고 의사인 그의 부인 유 호미리 여사는 소아과 과장을 맡아 달라는 청탁이 있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국민의 건강을 위하는 것이 곧 애국이라 여기고 곧바로 유한 양행을 설립 (1926년 12월 10일 종로 2가 45 덕원빌딩)했다.
그가 설립한 유한 양행은 제약회사와 약품 수입 및 수출업 등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크게 성공하기에 이르고, 민족기업으로 최대였던 경성방직 (자본금 백만원 )을 뒤따르는 유수한 민족기업 민족기업(자본 75만원 )으로 성장 하기에 이른다. 또한 1936년 6월 20일 국내 최초로 종업원에게 공로주를 분배하여 우리 역사상 최초로 종업원이 경여에 참가하는 최초의 경영 방법을 채택하여 우리나라 경제사에 획기적인 사실로 기록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영구 귀국 이년 후인 1928년에 최초의 영문 소설인 ‘When I was boy in Korea‘ (내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보스톤에 있는 출판사(Lathrup Lee & Shepard Co.)로부터 청탁을 받아 189쪽에 이르는 장문의 미주 한인 최초의 영문 소설인 ‘When I was boy in my Korea‘ (내 한국에서의 소년 시절) 을 썼다.
그리고 그는 우리나라 기업 중 종업원의 복지에 가장 앞서가는 회사로 종업원의 복지 사업에 관심을 쏟았고, 이러한 공로로 훗날 그는 1964 2월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는 십여 년 동안 고국에서 사업에 정진하다가 1938년에 재 도미하여, L.A 남가주 대학 대학원에(U.S.C)서 다시 학업을 시작 하여 1940년 45세에 경영학 석사학위 습득 했고, 다시 독립 동지들과 만나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기록에 남는 선언문 등에는 그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데, 이러한 점은 일본이 미국과 전쟁 중이었고, 그의 회사가 서울에서 세무사찰 등 많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던 때라서 일부러 기록문에서 이름을 뺐으리란 추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행적 등은 그 당시 미국신문에 독립운동 행사장에 실린 그의 사진이 실려있는 것 등으로 확인이 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활동은 1941년 1월에 미주의 각 단체가 연합으로 활동할 것을 결의하여 4월 20 일에 하와이에서 9개조의 선언문을 채택하기에 이르고, 1942년 8월 21일에는 LA 시청에서 태극기 계양 현기식 (Tai Geuk Flag Hoisted at the L.A City hall)을 거행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맞게 된다. 그는 한만족 연합위원회 위원장 이승만, 그리고 L.A 시장 등의 축사를 대독하고 태극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2백여 교민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신한 민보 영문판에 소개되고 있다. 또한 그는 1942년 4월 26일에 김 호, 김 용성 등과 한인 국방 경위대를 결성하여 정식으로 미국 주정부 예비군에 예속되고, 맹호군이라는 명칭으로 12개 국어로 세계 만방에 소개하고, 미국 각 주정부에 요청해서 정식으로 승낙을 받게 된다.
이어서 그는 1943년에 재미한족 연합위원회 기획 연구(Planning and research Board)위원장이 되어, 미국무성 전략청 권유로 부위원장인 김 용성과 간사 김 성학 이사 송 현주 김 병연과 함께 ‘한국과 태평양 전쟁’(Korea and The Pacific war)이라는 비망록을 발간하게 되는데, 이는 한국에 대한 연구서로 당시의 정치 군사적 정세와 한국의 인물 등을 엮어, 전쟁후의 영향 등의 변화에 대한 연구서로 수시로 수정 추가하는 기록이다.
이 기록물은 187쪽의 전쟁에 관한 비망록이고, 장차 한국에서 있을지도 모를 일본과의 전쟁에 효과적으로 참가하기 위한 의견과 현지의 현황과 전후의 문제인 경제 독립과 자치 능력 등이 실려 있어서, 미국 조야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자료다.
또한 전쟁 말기에는 일종의 고국 현지 침투 정보 활동인 냅코(Napco) 작전에 조장으로 직접 참여했으나, 미국 정부의 계획 취소로 실제로는 실시되지 못했다.
그는 해방이 되자 1946년 7월에 귀국하여 곤경에 처한 사업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들어갔고, 1948년에 스텐포드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아 귀국했다. 그 해 이승만이 정부 수립시 그를 이대통령이 초대 상공부 장관으로 초청 했으나 그는 이를 사양했다. 그리고 사업에만 전염하여 한국의 유수한 제약회사로 크게 성공 하게 된다.
그는 또한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아서 고려공과 학원 설립(1953 5월 5일)을 시작으로, 1964년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자신의 주식을 장학사업에 증여하는 등 그는 교육사업에 헌신하였고, 그는 자녀들에게 거의 상속을 하지 않고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사후 그의 전 재산이 사회에 환원됐다.
그는 1971년 3월 11일 사망했고, 그의 뜻을 기리고 보존하기 위해 그의 기념관이 설립되어 있고, 그가 공을 들여 설립한 유한 대학 교정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처럼 그는 애국 애족 사상이 투철한 독립운동가였고, 그리고 뛰어난 경제상공인이었고, 동시에 교육자이며 훌륭한 사회 봉사인 이라고 할 수 있다.
5)‘한국에서의 내 어린 시절 ‘(When I was a boy in Korea)
이 작품은 여러 나라 어린이들의 모습을 미국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기획된 시리즈인 <Children of other Lands Books> 22권 중의 한 권이고, 미국 보스턴에 있는 한 출판사(Lothrope, Lee & Shepard Co.)의 청탁에 의하여 집필된 총 189쪽으로 된 작품이다.
내용은 작자가 일인칭 형식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여 작자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담과 함께 어린 시절에 보았던 고국의 풍습 등의 전통 문화와 역사 교육 언어 결혼 놀이 우화 등을 아주 알기 쉽게 표현한 작품이다.
표현이 극히 서정적으로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고, 고국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애정 어린 향수가 베어 있어서, 이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애정으로 볼 수 있고, 고국의 풍물과 문화에 대한 표현은 결국 조국에 대한 관심과 긍지의 표현으로 이는 하나의 주체성에 대한 확인이나 정체성에 대한 확립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작자 개인의 정서와 함께 한국인의 정서와 인간성이 많이 표현되고 있어서 이러한 점이 바로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전체적인 골격은 조국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자신이 살았던 1910년대 전후 고국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고, 표현 방법은 주관적인 회상과 함께 제 삼자의 입장에서 쓴 객관적 사실에 대한 설명이 혼합으로 구성되어 나타난다.
그가 어린 나이에 홀로 이국의 가정에서 성장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홀로 겪어야 했을 그 외로움이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나 그 때가 인종 편견이나 차별이 혹심했던 시대이고 보면 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가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고등교육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가 자신과 가문의 영광과 조국을 위해서 학자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가 미국인으로 성장한 뒤에도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조국의 혼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점은 그의 정체성에 대한 확립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정체성이 그의 소설을 통해서 중심 주제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가 회상하여 적고 있는 어린 시절의 고국에 대한 추억담을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에 표현된 내용들은 그가 유년시절에 즐기던 고국의 군음식들에 대한 추억담을 표현한 것이다. 군밤이나 엿은 우리의 고유한 군음식으로 그 누구나 이에 대한 추억을 손쉽게 떠올릴 수가 있을 것이다.
군밤이오! 군밤이오! (“Goon-Balm-ee-ho!”)나 “엿 사시오! 엿”(“Yutㅡsasee-oh! yut”) 하는 소리들은 지금도 우리 모두의 귓가에 남아있는 정겨운 말들일 것이다.
In the cities and hamlets one hears during the day and the far into to the night the melodious cry of chestnut venders singing out their wares. ….
“Goon-Balm-ee-ho! Goon-Balm-ee-ho! Sul- Sul-Gel-en Goon-Balm-ee-ho!” meaning “Roasted chestnut, roasted chestnut, piping-hot roasted chestnuts!”
All this is said in a singsong way, and the boy has such a good time in sing it over and over again that it is not unpleasant to here.
내 기억 속에는 도시나 작은 마을에서는 한밤중까지 밤을 팔러 다니는 사람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군밤이오, 군밤이오, 설설 끓는 군밤이오!”라고 소리치고 다녔는데, 노래 부르듯이 여러 번 반복하였다.
작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아주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다. 특히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는 군음식에 관한 기억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 군밤은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로 작자는 군밤 굽는 도구인 화로나, 밤에 칼집을 내어 화로에 굽는 그 구체적 과정까지도 소상하게 기억하여 표현하고 있다. 다음은 엿에 대한 그이의 기억을 적은 것이다.
It is put on a handy pegon the wall and pulled until the color changes from dark brown to right creamy color. Quite often it is eaten without pulling, and sometimes more elaborate candies are made by adding roasted soy beans or roasted sesame seeds to the unpulled taffy. The finished candy is twisted in to handy sticks, somewhat the size of the American candy sticks, and venders carry them about the streets crying out, “Yut-sasee-oh,” which means “Buy your yut here.”
어느 정도 끈끈해지면 어두운 갈색에서 밝은 크림 색으로 될 때까지 잡아 당긴다. 때로 늘리는 것 없이 먹기도 했고, 구운 콩이나 참깨를 넣기도 했다. 완성된 엿은 적당한 크기로 비틀고 스틱 캔디와 같이 만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 엿 사시요!” “ 여기 엿이 있습니다.”라고 외치면서 팔러 다녔다..
My mother would miss her favorite pair of scissors or once, in one of her iron kettles, which in my opinion had no better use,
And then through questioning of the candy –vender she would discover its whereabouts. Very often these little candy-paddlers are boy of about ten years age who sing there wares in the most musical manner, clicking there huge scissors as they go along the streets.
우리 어머니는 내가 쓸모 없는 물건 같아서 바꿔 먹었던 가위나 주전자를 고물 엿 장수에게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이런 엿장수들은 거의 열살 정도의 소년으로 커다란 가위를 쩔렁거리며 엿을 사라고 소리치면서 거리를 돌아 다녔다.
이처럼 엿에 대한 옛 기억을 더듬어 그 엿에 얽힌 자신의 실제 추억담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의 전통적인 민족 정서를 표현한 것으로 극히 향토적이고 서정적으로 표현되고 있어서, 외국인 들에게도 흥미로운 일 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어린 시절과 고국에 대한 향수의 세계가 그의 가슴속에 늘 그리움으로 각인돼 있어서, 그는 미국에서 성장하였지만 결코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고, 조국에 대한 사랑의 혼을 키워 직접 애국운동에 참여했고, 귀국해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공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그처럼 고국과 민족혼을 지킬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지니고 있었던 미래에 대한 꿈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꿈은 미래에 자신의 가족 명예와 국가를 위해서 그가 장차 학자가 되는 꿈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그가 어린 시절에 지녔던 꿈과 이상의 세계에 대한 표현이다.
그의 어린 시절의 꿈은 우선 그의 부친의 꿈을 통해서 시작된 그와 그의 부친의 공동의 꿈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옛날 한국에서의 어린이의 장래에 대한 꿈은 거의가 그 가문의 형편이나 부모의 꿈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다. 가정의 환경이나 신분 등에 따라서, 어린이들은 채 철이 들기도 전에 부모에 의해 장래가 작정이 되고, 자연스럽게 이에 따라 성장해 간다. 그 시절 우리나라에는 어린이들의 장래에 대한 꿈이 크게 두세 유형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하나는 일정한 지역을 다스리는 관리가 되는 꿈이고, 또 다른 하나는 큰 학자가 되어 글 쓰는 능력과 지혜로 평생 존경 받는 인물이 되는 길이라고 하고, 그밖에 농사꾼 장사꾼 장인이 되는 것은 꿈이 없는 불운한 탓이라고 적고 있다. 이어서 그는 그가 어린 시절에 지녔던 꿈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Being the eldest son in an average Korean home, where much importance was attached to the perpetuation of the family name, my future was naturally slated to be that of the scholar. Much to my satisfaction, my father, being forced by circumstances at any early age, was a merchant trading with buyers from China. He had always felt that he could have reached his zenith in the literary line, and so determined
That first son should have all the advantage that he was denied a feeling which most parent the world no doubt harbor in there heart.
나는 일반 한국 가정의 장남이었기에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내 미래는 학자가 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온 그들과 장사를 하셨는데, 그로 인해 당신이 충분하게 하지 못했던 공부를 큰 아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녔던 어린 시절의 꿈은 부친이 그에게 기대해서 이루어진 부친과의 공동의 꿈이다.
그의 부친이 일찍이 공부를 많이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학자가 되고자 하는 꿈을 그의 아들을 통해서 이루려고 한다. 그래서 장자로 태어난 그의 어린 시절의 꿈은 아버지의 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아버지와의 공동의 꿈인 것이고, 가정과 가문의 꿈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러한 꿈의 실현을 위해서 부친에 의해 다른 어린이들과는 크게 다르게 교육 받고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책과 가정교사에 둘러싸여 자랐고, 이로 인해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힘든 일은 하지 않았지만, 대신 얼음 썰매 타는 일이나 산에서 불쏘시개를 모아 오고, 당나귀 등에 올라타는 등의 놀이는 할 수가 없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I had no more then gotten inside of the door when my mother wanted to know where /I had been and what I had done to my pantaloons. I looked back cautiously before answering, and was mortified to fine the whole seat black with dirt from the bulls back. During the secret session which followed with my father, He reminded me that riding bulls was not the proper thing for even so young a scholar to do.
내가 문을 들어서자 어머니는 내가 어디서 무엇을 했고, 또 바지는 왜 더러운지를 물으셨다. 나는 대답을 하기 전에 내 모습을 살펴보고 나는 소의 등에서 더러운 것이 옷에 묻어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내 아버지는 오랬 동안 소 등에 타는 일은 젊은 학자가 할 행동이 아니라고 다시 일깨워 줬다.
이처럼 작자를 장차 가문을 빛낼 학자로 키우기 위한 그의 부친의 꿈이 있었기에 그는 남다르게 자랐고, 결국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작자는 이 꿈의 실현을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고 결국 그는 꿈을 실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갖게 되자 마자 곧바로 은행에서 큰 돈을 융자를 받아 가세가 크게 기울어진 간도 땅의 부친에게 송금을 했다. 그래서 부친이 다시 농장을 경영하게 하는 등 장남으로서 구실을 하게 되고, 다음 귀국 해서는 사업가로 크게 성공하여 가문을 빛내고 국가 사회에 공헌 하기에 이른 점은, 모두가 바로 이러한 그의 어린 시절에 지녔던 꿈으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 표현된 글 중 그가 소의 등에 탔던 이야기와 더러워진 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작자의 회상 중에는 이처럼 여러 곳에서 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는 우리나라의 농가에서는 소가 빼놓을 수 없이 소중한 가축이고, 그래서 농가에서 성장한 사람이면 모두가 한두 가지의 소에 대한 추억담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또한 단 30분만에 버려놓은 그의 바지는 아마 하루를 걸려 만들었으리란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어린 시절 에 보았던 고국의 고유한 의상과 함께 치장에 대해 머리 끝부터 신발에 이르기까지 아주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I refer to trousers as pantaloons because that is about the only word which describes them. In appearance they are almost like the once the Hollanders wear. Both men and boys wear the same style. The legs are very wide and are tied ay the bottom with colored ribbons, and also ay the waist with colorful fancy flat cord with tassels at either end. Over these, We wear a coat cut do box lines reaching to the hips. The color of the coat is V-shaped at the front, and the lapels are fastened across the front with the ties of the same material.
내가 말한 바자의 모양은 네덜란드 사람이 입는 것과 비슷했고, 어른 것이나 아이들 것이나 같은 모양이었다. 바지 통은 매우 넓어 색 있는 끈으로 아래 부분을 묶었고, 허리에도 끝부분에 술이 있는 끈을 둘러 맸다 그 위에 엉덩이까지 오는 박스모양의 저고리를 입었는데, 목 부위는 V자 모양이었고, 옷깃은 같은 천으로 된 끈으로 여미게 되어 있었다.
위와 같이 그는 고국의 바지 저고리에 대한 기억을 적고 있고, 이어서 그 바지에 달린 주머니에 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 주머니에는 지금이라도 눈앞에 바로 쏟아져 나올 듯한 많은 것이 들어 있었고, 늙은 사람들은 성냥갑, 안경, 담배 돈 등을 넣어 별도로 허리춤에 차고도 다닌 것을 기억하고 있다. 또한 여인들의 머리 장식에 대한 것부터 여인들의 흰 치마 저고리와 여름철의 흰 모시옷, 그리고 어른들이 외출 시 사용하는 의관은 물론, 상을 당했을 때는 상복을 입는 일과, 부모님이 상을 당했을 때는 삼 년 동안을 줄곧 입어야 한다는 일이들이며, 여인들은 발에 꼭 맞는 버선을 신고 다녀서 발이 작고 곱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우기에 많이 사용하던 나막신에 대한 추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some of them ate really masterpieces of carving. These shoes are shaped like boats, and each has two high cleats on the bottom so that the body of the shoes does not touch the mud of the street. Very often I have taken these shoes off at a pond and, making masts of the piece of bamboo have put sails on them and played sailboat. Not infrequently I have seen them carried away, into deep waters by the wind, and have had to barefooted in the end.
그 중 어떤 것들은 정말 걸작품이었다. 나막신은 보트 모양으로 바닥에 두 개의 미끄럼 막이가 있어서 진흙이 묻지 않게 만들어져 있다. 나는 종종 신을 벗어 연못에 띄우고 대나무 조각으로 돛을 만들고 뱃놀이를 했다. 가끔 바람에 너무 멀리 떠내려가서 결국 맨발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는 다음으로 그가 학자가 되기 위한 꿈을 이루기 위해 지식을 쌓고 견문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었던 어린 시절의 주막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 하고 있다.
On regular routes, stopping-places were established where they could secure their food,
Wash their tired feet, and perhaps enjoy a pipeful of tobacco before the fires. In winter these fires were on the hearth in the room, but in summer they where only saga-leaf smudges to keep away the pestering mosquitoes or other insects.
보통 길에는 주막이 있어서 밥도 먹고, 지친 발도 씻고, 화로 앞에서 밤배도 한대 피워 즐길 수 있는 휴식처가 되었다. 겨울에는 이 화로가 방안을 덥히는 난로로 쓰였고, 여름이면 모기나 다른 벌레들을 쫓기 위해서 불을 피웠다.
이 얼마나 정겨운 모습들에 대한 기억인가?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나라의 중요한 소식을 먼 곳으로 전하는 봉화와 함께, 여행자가 하루를 걷고 나면 쉬어갈 수 있는 일정한 거리에 일종의 여인숙과 같은 주막이 있었고,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은 여행자의 주위에 둘러앉아서, 그의 경험담이나 여행기를 듣느라고 새벽까지도 깨어 있었던 점을 기억하고 있고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People in the small taverns or the villages en route would gather around traveler to here all about what was happening in other part s of there land, learning of event of the past month or year.
…As a boy, I have been kept awake with the permission of my father, listening to the entertaining tales of far-away land of peoples from a traveler.
… Whatever true of these chronicles, they where generally harmless but entertaining, and furnished these simple rural people with social companionship that made up the greater pleasures of there lives.
이런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여행자의 주위에 모여 앉아서 지난 사건과 나라안과 나라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했다.
…내가 어렸을 때도 나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여행자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그 이야기들이 정말이든 거짓말이든 즐거운 이야기들이었고, 시골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줌으로써 유대감을 불러 일으키고 그들의 삶을 밝게 해 주는 구실도 했다.
필자도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주막에서 여행자의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이러한 주막이 고국 사람들이 서로 친근감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는 문화적인 정서의 공간이었음을 회상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그의 어린 시절의 고국에 대한 추억을 통해서, 고국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친근감과 유대감 등의 다정다감한 우리 민족의 인간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는 점 등에서 그가 이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결코 잃지 않았던 점을 깊이 엿볼 수 있다..
또한 그는 그가 어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