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恨江(1)
-이유식
태초에 우주가 형성되었을때 지구라는 혹성에 물이 있었다 몇 억겁을 지나 오면서 물은 생명의 온상으로 그때의 물은 지금의 물의 량과 똑같은 량의 물을 보유하며 인류를 생존게 한다
恨의 江 漢江이 두만강이 아닌 냇물로 흐르고 압록강이 낙동강 700리에 모래사장이 되어 보들피리 불며 멱을 감든 소년 소녀 어버이 되고 아프리카 사막의 열사의 검은 얼굴로 타 북미의 화이얀 얼굴로 둔갑하는 恨江의 노래 바람소리 울고 ?재래시장 막장에 소우는 소리 덧없다 한탄할까 꽃피고 잎지는 역사의 꼴불견 흙의 영원성을 일깨우고 가슴을 치는 봉이 [김]선달 임금이 있어 漢城이라 하고 군왕을 상징하여 한강이라 했던가 漢의 漢字는 恨이 서린 민족이라 恨江이라 하고 내 가슴속에 파고드는 허공의 별들 이씨 조선 500년 이 승만 윤 보선 박 정희 최 규하 전 두환 노 태우 김 영삼 김 대중 노 무현이 웃고 民草들이 울고 서 있는 겨울 나무 쓸쓸한 裸木 恨江에 심어 놓은 무궁화 꽃 피었네 피었네 어디에서 피었나 눈꽃이 펄펄 휘날리는 북미대륙 허허벌판 대지 알수 없는 죄목 밑에 나 자신의 業報가 역마살로 휘감겨 새 까만 로키산 풍경화속에 恨의 江으로 흘러 가는 노을 저편 검은 머리 풀어 해치고 흘러가는 강 恨江의 눈물이 民草들의 심장을 흘러 흘러 흘러 남는 것은 무엇일까?
오! 나의 恨江이여!
06년 11월 12일 서울에서
name of song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민초 이유식의 “恨”의 형상
-내사랑 아프리카
민초 이유식의 이 시는 인간이 가지는 또는 경험하는 보편적 정서인 “恨”의 소재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묻는다. 이 한의 정서는 경험적인 특수성이면서도 인간이 경험하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실재다. 근원에 대한 심미적 추구는 과학적 가설과 검증의 영역은 아니다. 시적 상상력에 과학적 발견이 깊이 작동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적 발견이 시적 상상력을 뛰어 넘을 수는 없다. 아니, 궁극적으로는 과학적 발견조차 시적 상상력에 통합된다. 궁극적으로 과학자는 시인이며, 시인은 물리적 실재를 넘어 보다 근원적인 상상을 시적 직관을 통해서 “감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감행” (?)은 대범하면서도 위험하다.
1. 삶은 근원에 연기적으로 얽혀 있다.
이유식의 이 시는 한반도라는 지리적 직접성의 경험을 통해서 삶의 연기적 실재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직관적 투사와 성찰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직관의 근저는 “한” (恨)이다. 이 한의 형상화는 인간의 개인의 심리적 병리 (pathology)나 콤플렉스가 아니라 구체적인 물리적 현상을 인간의 감성에로 끌어오면서 구현된다.
恨이 형상화되는 시적 소재는 물이다. 이유식의 시 속에서 물은 만물의 근원이자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지 않은 유동성 (fluidity)을 상징한다. 태초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형성 이전을 의미함과 동시에 시간과 공간의 시발점을 동시에 함의한다. 그 형성의 시원에 물이 있어, 현생의 인류에 까지 이른다. 물은 만물 생존의 시원임과 동시에 목격자다. 그러므로 물의 恨으로의 전이는 적절한 통찰이다.
2. 물의 이중성: 한강과 한 (恨)
물은 인류 역사의 근원임과 동시에 증인이 된다. 이러한 이중적 기능이 집약된 말이 恨이다. 이것은 지리적, 역사적, 인간사의 중심에 있다. 만일에 이 시가 물의 근원에 대한 직관에만 머물렀다면, 추상적인 상상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한국이라는 지리적 구체성, 이러한 지리적 특수성이 만들어 내는 구체적인 역사, 이러한 역사를 주체적으로 만들어간다는 인물을 제시함으로써 恨이 응결되는 과정을 묘사하려고 노력했고, 그러므로 이 시는 잘 된 시라고 볼 수 있다.
첫째, 물리적 대상인, 압록강, 낙동강, 한강이 인간의 恨을 담는 담지자로서만 기능한다. 이러한 한의 용기 (그릇)는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물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강은 바로 인간의 한을 담는 그릇으로만 기능할 때, 시적 소재의 제 역할을 해 낸 것이다. 다시 말해, 강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문화적 경험의 창고 역할을 한다.
둘째, 역사의 주체라고 알려진 왕이나 서울의 옛 도시 한성 (漢城), 한강 (漢江), 조선500년 이 승만 윤 보선 박 정희 최 규하 전 두환 노 태우 김 영삼 김 대중 노 무현 등등은 삶의 진정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것은 외피적 장치일 뿐이다. 외피적 주체는 오히려 진성성을 은폐한다. 즉 허상이다. 헌데, 이 장치들은 한을 은폐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한이 드러나는 역할을 하니 역설적 기능을 한다.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바로 “물길”을 통해야 하는데, 인간의 탄식과 고통, 절규를 담은 恨의 강이 아니고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시인은 외치고 싶은 것이다. 오직 그 때 한반도라는 지리와 전혀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로키 산의 강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강=>로키산의 강 (A is B)라는 기본적 은유가 연결될 수 있는 연상적 고리는 오직 “恨”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시인 자신이 로키 산에 인접한 곳에 살고, 한국적 경험을 가졌다 하더라도, 한강과 로키의 강을 연결할 수 있는 “개연성” (plausibility)은 전혀 없는 듯하다. 그러나 강이라는 측면에서는 두 개가 서로 치환이 가능한 계열체적 기능을 한다. 한의 형상화 과정에서 로키의 강이든, 한강이든, 저 아프리카 구석의 강이든 서로 치환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계열체적 치환이 가능한 것은 恨의 공통성 때문이다. 이것은 이유식이 “아프리카 사막의 열사의 검은 얼굴로 타 북미의 화이얀 얼굴로 둔갑하는 恨江의 노래”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아프리카의 자연적 순전함, 인간적 무구함이 표현되는 것은 “검은 얼굴”이다. 이 검은 얼굴이 화이얀 얼굴로 둔갑하는 내용은 흑인 노예의 역사라는 뒤틀린 삶의 질곡이 恨으로 흘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3. 한은 흘러야
恨은 흘러야 한다. 모든 인류의 비극과 슬픔마저 흐르지 않으면 안된다. 시인이 인류의 시원을 물에 두고, 이 물이 인간 삶을 담지하는 증인이라면 또는 그 자체라면, 그것은 미래적 흐름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유식은 한의 흐름과 그 목적에 대해서는 구체화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은유적 빔 (emptiness)을 지향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한의 역사와 그 흐름을 통해서 이미 그 흐름의 지향점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恨江의 눈물이 民草들의 심장을 흘러 흘러 흘러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 속에는 그가 시의 서두에서 진술한 “태초에 우주가 형성되었을 때 지구라는 혹성에 물이 있었다”는 말을 통해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질문은 해답의 방향을 이미 정해놓기 때문이다. 흔히들, 질문과 해답은 별개의 과정으로 본다. 그러나 질문하지 않으면 해답이 없다. 즉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해답의 물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전체가 “시적 순환” (이런 말이 있다면…)을 이룬다. 그러니까 이 시는 기승전결이라는 직선적인 구조가 아니라 의상의 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처럼 원환적 구조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순환적인 흐름에서 恨의 구조와 의미, 그리고 여기에서 이 구조와 의미가 생성하는 恨의 깊이가 드러난다. 이러한 한의 올을 잡아 가는 것은 바로 한의 실재에 참여하는 것, 즉 “業報와 역마살”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연계되어 생성 (緣起; 연기)되는 업보와 역마살은 결코 긍정적인 단어는 아니다. 그러나 연기가 생성하는 업보와 역마살을 삶의 피할 수 없는 실재로 받아 들일 수 있을 때, 恨도 단순한 망상이 아닌 인간 삶의 중요한 근원이라는 깨달음에 다다른다. 왜냐하면 실존적 삶은 결코 관객이 될 수 없고, 본인이 삶의 무대에서 實演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공감적 경험
이런 연기적 실재 (실체를 의미하지 않음)를 바늘코처럼 작은 것까지 경험하고 서술하는 것은 차후의 과제다. 그러므로 이 시는 결론이
아니라 서론이며, 끝남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것은 평자가 시인에게 드리는 높은 찬사임과 동시에 질정
(叱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