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라기 3장 10절)"
<하나님을 시험하자고? 뭐 십일조로?>
성경에는 하나님을 시험하면 죽을 수 있기(고전 10:9)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출 17:2, 민 14:22, 시 78:18, 행 5:9, 히 3:9 등)고 경고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은 시험을 당하지 않으신다(약 1:13)고 가르치고 있는데, 개역 성경의 말라기 3:10에서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찍이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았던 '임상결과'를 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카네기가 그랬고, 록펠러가 그랬고... 어느 교회 모 장로님이 그랬으며 요즘 우리교회 모 집사님이 십일조 하면서 복 받아 성공했다는 십일조 무용담을 또 듣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되고 심지어 저주받아 죽는다고 해도... 이 '십일조'는 얼마나 용한지 그 모든 말씀을 다 무색케 합니다.
그래서 오늘 한국 교회들의 십일조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나 또 야곱보다 한 수 위 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자신을 영접하러 나온 멜기세덱에게 그 전리품 중 십분 일을 주었으며(창 14:20),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차지하고는 형의 보복이 두려워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다 벧엘에서 꿈을 꾼 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 28:20-22)"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을 취했던 복을 이미 받은 후 그 중의 십분 일을 드렸고, 야곱은 복 받을 것을 미리 예상하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일종의 '십일조 약정 헌금'만 하고 있는데 반하여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축복의 선수금으로 미리 배팅을 한 후 그 배팅이 가시화 되는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복 받고 나서 드렸고, 야곱은 복 받으면 드리겠다고 약속만 했지만 우리는 아예 미리 선수금을 드리고 있으니 얼마나 더 큰 믿음의 백성들입니까? 그래서 특히 '신년축복 대성회' 뭐 이런 집회에 가면 아예 이렇게 부추깁니다. "얼마만큼 복 받으시길 원합니까? 그 액수대로 미리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십시오. 내가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복을 쏟아 부어 주시나 안 주시나? 주시겠습니까? 안 주시겠습니까?" "주십니다! 아멘!!" 그래서 축복 선수금으로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을 시험해 보자고 까지 합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런데 말라기서의 이 말씀으로 전해지는 십일조의 메시지는 이같이 복을 쏟아 부어 주시겠다는 희망의 메시지만은 아닙니다.
또 한편으로는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이라'는 말씀과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8절)?'는 말씀으로 인하여 난처하고 두려운 말씀으로 둔갑하기도 하는, 아주 절묘하게 양날의 칼을 세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길 잃은 양들이 참으로 힘든 어려움 끝에 길 찾아 집으로 돌아오면 이번에는 파렴치한 십일조 도둑으로 몰려서 또 다시 집을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십일조 도둑이었을까요?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를 어떻게 해야 '온전한 십일조'가 될까요? 그리고 참으로 십일조만큼은 하나님을 시험할 수도 있는, 그렇게도 중요한 축복의 통로일까요? 늘 그래왔듯이 본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객관적이며 꼼꼼하게 무엇보다 문맥을 따라 바르게 읽는다면 그 답들을 찾을 수 있겠지요.
<십일조 도둑놈 찾기>
우선 십일조 도둑놈 찾기를 먼저 하는 것이 논리적인 순서로 보아 좋을 것 같습니다. 과연 누가 십일조 도둑일까요? 제게 있어 성경을 추리하는 일차적인 작업은 늘 문맥입니다. 우선 말라기서 전체의 문맥과 흐름을 통해 추적하고 추리해 보면, 말라기는 B.C. 약 430년경에 기록된 책으로, 전체적인 메시지는 제사를 잘못 드리고 있는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이 그 주제입니다.
본격적인 메시지가 시작되는 1:6에서부터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고 말씀하시며 경고의 대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가 지적하고 있는 제사장들이 저지른 죄악을 보면, 그들은 '더러운 떡을 하나님의 단에 드리고(1:7)', '눈먼 희생 즉 저는 것 병든 것으로 제사를 드렸으며(1:8)', '떼 가운데 수컷(즉 제사 드리기에 가장 좋은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흠 있는 것으로 사기를 쳐서 제사를 드리고(1:13)' 있는 것이 당시 제사장들의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극도로 분노하신 음성으로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1:10)’고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발 좀 그 엉터리 제사들을 집어치우라는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2장 1절에서도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라고 분명히 제사장들에게 말씀하고 있으며,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며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인데(2:7)' 말라기 당시의 제사장들은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고(2:8)'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2:9)', 즉 율법을 편파적으로 적용하며 오히려 거짓된 길을 가르치고 있었기에 심지어 하나님께선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2:3)'이라는, 지극히 격노하신 음성으로 제사장들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2장의 후반부인 10-17절은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언약을 욕되게 한 점과 남자들에 의한 일방적인 이혼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데 역시 그 곳에도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12절)'들이 지목되고 있으며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 않겠다(13절)' 는 제사장과 제사에 대한 경고의 말씀은 역시 동일하게 거듭되고 있습니다.
십일조 말씀의 전문맥인 3:1-6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특히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사자(3:1)'에 대한 약속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자는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며(3:3)' , '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것이며(3:3)' 그 사자의 사역으로 인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다시 여호와께 기쁨이 될 것(3:4)'이라고 강조되고 있습니다. 결국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말라기 당대에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는 제사장 사역이 '그 사자'를 통하여 다시 회복될 것임이 약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문맥인 4장의 내용 역시 전체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미래에 임할 '여호와의 날(4:1,5)'과 특히 3:1에서 언급했던 '내 길을 예비할 사자'가 좀 더 구체적으로 '선지 엘리야(4:5)'라고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엘리야의 사역 역시 '자녀들을 아비에게로 인도(4:6)'하지 못하고 있는 당시의 제사장들의 실패에 대한 경고이며 미래에 임할 엘리야로 인하여 자녀들을 아비에게로 바르게 인도하는 사역이 회복 될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즉 말라기서는 십일조 본문(3:7-12)의 전후에 미래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는데, 그 약속은 '주의 길을 예비할 사자인 엘리야'에 대한 소망이며 그 소망은 한결같이 제사장 직과 사역이 온전하게 회복될 것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문맥의 한 가운데 3:8-10절의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서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묘사와 그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나 나아가 미래의 소망에 대한 말씀까지도 철저하게 제사장과 그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결국 말라기서 전체 문맥과 본문을 전후한 근접 문맥 모두 이 말씀의 경고 대상이 제사장 일 것임을 충분히 추측케 합니다.
그럼 이제 도적질을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 구절, 즉 말라기 3장 8절을 좀 더 꼼꼼히 보면서 도적놈을 찾아보겠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도적질을 지적하고 있는 그 말씀입니다. 자세히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고 이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먼저 던지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지적하고 있는 '도적질한 하나님의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정말로 십일조입니까? 그것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지적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적질한 하나님의 것은 십일조와 헌물입니다. 십일조라고만 기록되었으면 십일조는 원래 하나님의 것이니 이것을 도적질했다는 것은 십일조를 떼어먹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헌물이 같이 나오고 있으며 헌물은 십일조와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헌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바쳐진 것입니다. 즉 쉽게 말하면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드리는 그냥 헌금입니다. 당연히 헌물은 바쳐지고 나서야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지요. 헌물은 십일조와 달리 원래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헌물을 충분히 바치지 않았다 하여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헌금 적게 냈다고 '이 도적놈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헌물을 도적질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제사장들뿐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성전에 바쳐 하나님의 것이 된 십일조와 헌물을 제사장들이 도적질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헌물들을 어떻게 도적질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미 1장에서 상세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떼 가운데 수컷이 있음에도 불구하고(1:13) 당시의 제사장들은 더러운 떡(1:7)과 저는 것, 병든 것의 눈먼 희생(1:8)으로 제사를 드리며, 오히려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하며 코웃음하면서(1:13) 제사를 멸시하고 자기들의 잇속만 챙겼던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리기 전 제물들을 일일이 골라내어서 눈먼 것, 병든 것들은 골라낸 후 흠 없고 온전한 것으로만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일들이 귀찮았던 것이며 또 수컷들 즉 좋은 것은 자신들이 착복하기 위하여 숨겨두었던 것입니다. 대강대강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고 돈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그들의 모습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으며, 오늘 우리 시대에도 자신을 마치 제사장인 것처럼 착각하는 무리들 중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일이기에 뭐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흠 없는 제물이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흠 있는 것으로 슬쩍 대체하고 좋은 것은 자신들이 챙겼으니 이것이 바로 도적질인 것이지요.
그리고 '도적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바'는 영어 커버(cover)와 같은 뜻으로 '덮다, 속이다, 속여 빼앗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그들은 좋은 것들을 cover하여 자신이 챙기고 백성들과 하나님을 속였던 것입니다. 도적놈들은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리고 8절에는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라는 반문이 나오는데, 왜 이런 반문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은 결코 이런 반문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흠 있고 모자른 재물을 가지고 나온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백성들이 가지고 온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 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억울한 심정으로 '백성들이 흠 있는 것을 가져왔는데 왜 우리더러 도적놈이라 하느냐'고 항변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도적질의 주체가 어디까지나 제사장들이기 때문에 이런 변명이 통하지 않는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께선,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2:3)"고 극도로 분노하신 음성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백성들의 잘못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책임은 제사장에게 있었으며 그들이 도적놈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도 그 도적놈들이 바로 제사장들이었음을 확신케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도적질이 말라기서에는 구체적인 사건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말라기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의 또 다른 기록인 느헤미야서에는 13:4-14에 아주 구체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B.C. 445년부터 433년까지 유대 총독으로 재임했던 느헤미야는,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 제사를 회복하면서 십일조를 철저하게 거두어 레위인과 제사장의 양식으로 성전의 곳간에 정상적으로 보관하는 대 개혁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예루살렘에 있을 때는 온 백성들이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기뻐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아닥사스다 왕 32년에 느헤미야가 바벨론으로 다시 복귀함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모든 것이 원래대로 변하고 맙니다.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아십이 성전 곳간에서 십일조를 비롯한 헌물들을 빼돌리고 그 방을 자신과 친분관계에 있었던 이방인 암몬 사람 도비야에게 내어주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차고 피가 거꾸로 솟을 일입니다.
십일조 양식이 보관되어 있어야 할 성전 곳간에 십일조 양식은 온데간데없고, 성벽 재건 때도 그 일을 방해하며 적대적인 위협을 했으며, 느헤미야 시대의 유대인들과는 원수간이라 할 수 있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제는 대제사장과 결탁하여 성전 곳간을 차지하고 앉았으며 그래서 도적질 당한 십일조를 인하여 보수를 받지 못한 레위인과 성전에서 노래하던 자들은 오히려 거리로 내쫓겼으니... 이런 상태인데도 계속 십일조를 내야합니까?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았더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결국 백성들이 십일조 내기를 즐겨하지 않고 또 눈먼 것 저는 것으로 십일조를 냈던 원인 제공을 누가 하고있습니까? 설사 당시의 백성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안냈다손 치더라도 그 원인은 바로 대제사장이 앞장선 제사장들에게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실제적으로 십일조를 빼돌려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고 오히려 원수의 배를 불리고 있던 상황에서, 백성들이 십일조를 낼 의욕을 갖지 못했으며 또 내고 싶지도 않았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 아니었겠습니까? 요즘 같은 시대였다면 분명히 '십일조 거부 국민연대'가 탄생하여 오히려 십일조 거부 운동이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도둑놈들 그리고 강도의 굴혈에서>
그러나 살펴본 바와 같이 본문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이렇게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교회들의 강단 설교에서 언제나 십일조 도둑으로 몰렸던 것은 성도들이었지 스스로 제사장이라 생각하는 오늘날의 목사들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한번도 이 말씀을 제사장이라 생각하는 자신들에게 적용하는 설교를 저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걸 두고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 하며,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하지요. 꼭 그 꼴입니다.
계속해서 밝혀가겠지만 십일조 자체가 이미 우리에겐 적용할 수 없는 율법의 준수사항임이 분명하고 또 십일조로 인한 비리와 잘못들은 항상 제사장 자신들이 빌미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이 무너지고 제사장과 레위인이 사라진 지 2000년이 다 되어 가는 오늘날까지 성전을 들먹이며 자신들을 제사장이며 레위인이니 하며 거들먹대며 사기치며 속이고, 거기다가 한 술 더 떠 잘못 해석된 말씀을 들이밀며 십일조 도둑으로 성도들을 몰아서 헌금을 착복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들을 참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 시대의 유일한 가치 척도는 돈이며 우리 시대의 유일한 종교는 그 돈을 숭배하는 맘모니즘이라는 데 이의를 다실 분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그렇게도 강조하신 것이 바로 이 시대의 가치관이요 종교인 물질숭배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모습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빙자하여 물질 숭배에 빠져 있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선명하며, 거짓된 십일조 강요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십일조의 잘못을 알고도 많은 분들은 십일조가 없으면 교회가 어떻게 운영되느냐고 항변하는 소리들을 저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생각들이야말로 얼마나 인본주의적이며 물질주의적입니까? 돈이 교회를 움직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돈이 합니까? 예, 실지로는 다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그러니 좀 모순은 있지만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의 주인은 돈이며, 지금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 일하는 시대라고. 이 얼마나 악하고 패역한 소리며, 믿음이 없는 소리입니까? 진정한 하나님의 일이 돈이 없어서 안 되는 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사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성전건축을 빙자하여 초 호화판 교회를 짓고 그것이 끝나면 교육관 짓고 그 다음에는 아예 그린밸트에 수양관과 묘지를 짓고... 그래서 압력 넣고 뇌물 쓰고... 과연 이 짓들이 진정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너무나도 분명한 우리 시대의 선악과는 '돈'입니다. 그리고 돈을 믿는 믿음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불신앙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불신앙의 한 가운데 바로 오늘 한국교회들의 '십일조'가 서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도적들이 모인 모임은 강도의 굴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길어지기에 더 언급하진 않겠습니다만 예수께서 당시의 성전을 돌아보시고 뒤집어엎으시며 그곳을 '강도의 굴혈'로 정의하신 것은 실로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강도들의 굴혈은 강도 짓 한 것들을 모아 저장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강도들의 굴혈은 강도 짓을 마치고 그곳으로 돌아와 한숨 쉬고 안심하며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강도들의 굴혈은 철저하게 계급사회로 유지되면서 강도 짓을 더 담대하고 잘할 수 있게 부추기는 두목의 훈시를 듣고 새로운 내일의 강도 짓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물론 철저하게 자기들만의 세계를 유지하며 배신자는 조직의 쓴맛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도 도둑과 강도들이 모이면 강도의 굴혈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겠지요. 망하기 전 성전의 모습은 강도의 굴혈이었음을...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십일조>
십일조 도둑이 과연 누구인지가 분명히 밝혀졌기에 이제는 남은 문제인 '온전한 십일조'와 '시험'에 대하여 살피겠습니다.
일차적으로 누구에게 주신 말씀이겠습니까? 10절의 이 말씀 역시 일차적으로는 제사장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즉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의 곳간에 바르게 들임으로 시험해야 할 사람은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온전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콜'인데 이는 앞선 9절에 나왔던 '너희 곧 온 나라가...' 할 때의 그 all의 의미입니다.
히브리어 '콜'은 단순히 '모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분량을 다 채웠다는 의미의 '온전함'으로 쓰이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역시 이 말씀이 일반 백성에게 대한 책망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자의적이고 잘못된 번역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떼먹지 말고 다 드리라는 의미에서 강조된 말씀이 아니라, 제사장들을 향하여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도적질하지 말고 '모두 다' 성전 곳간으로 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십일조를 도적질했던 제사장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신 경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 왔습니까? 성도들을 향하여 모든 소득을 철저하게 계산하여 정확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윽박질렀지요. 그런데 과연 누가 정확한 십일조를 드릴 수 있습니까? 그리고 도대체 얼마가 그야말로 '온전한' 십일조입니까? 월급을 받으면 세금을 공제하기 전 명목상의 임금으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까? 아니면 세금 공제 후 실제 수입으로 드려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월급을 타서 십일조를 하고 나머지 돈으로 정기적금을 들었는데 그 적금을 타면 다시 또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어떤 교수는 지방으로 가서 특강을 하고 강의료를 받았는데 가는 동안 비행기 값이며 식사비는 제외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또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은 빚을 먼저 갚아야 합니까? 아니면 십일조를 먼저 해야 합니까? 아니면 남편이 믿지 않는 한 주부가 남편 몰래 남편의 월급에서 십일조를 드렸다가 발각되어 남편이 교회를 향하여 그 돈을 다시 돌려달라고 할 경우가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모든 논란들이 '온전한 십일조'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오늘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근본적으로 '돈'으로 드린 것이 아니며 오히려 돈으로는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건 다음 글에서 밝혀드리죠. 아무튼 결국 어떻습니까? 율법처럼 지키게 될 때에 나타나는 자연스런 결과가 바로 이런 것들이며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시대에 살지 않고 은혜의 시대에 살기 때문에 지금은 십일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의 이나 심지어 십의 구까지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십일조가 율법이라는 걸 알기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그래서 십이조나 십삼조까지 드리자는 겁니다. 도대체 이런 엉터리 논리가 어디 있습니까? 십일조가 폐지된 율법이라고 분명히 말해놓곤 결론은 십이조나 십삼조를 드리자니? 구약에 따르면 십일조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이조, 십 삼조를 바치는 것은 율법에 의하면 오히려 부정한 것을 바치는 것에 해당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결국 이 같은 현상들은 '온전한 십일조'에 대한 몰이해와 돈에 환장한 교회들이 낳은 넌센스일 뿐입니다.
'나를 시험하여'라는 말씀도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엉터리 적용의 또 하나 중요한 예입니다. 이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할 때 '시험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나싸'와는 전혀 다른 말인데, 말라기 3:10의 말씀에선 '나싸'가 아니라 '빠한'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빠한'의 원 뜻은 '증명하다(prove)'입니다. '나싸'는 헬라어 '페이라조'인데 이는 글자 그대로 '시험하다(test, tempt)'의 뜻이지만 '빠한'은 '마음의 상태를 증명하다'라는 뜻으로 헬라어로는 '도미카조'라고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헬라어, 영어 모두 이 두 단어를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하며 번역하고 있으나 우리 성경은 구분 없이 모두 '시험하다'라고만 번역함으로써 혼동을 일으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을 증명한다라는 의미는 하나님 앞에 인간의 마음을 드러냄으로써 그 상태를 증명해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문맥을 따라 그 뜻을 바르게 새겨 보면, 하나님께선 지금 제사장들을 향하여 그들이 십일조를 바르게 관리, 사용하며 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온전하게 드림으로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섬기기를 원하는 그들의 마음을 증명해 보이라고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 좀 더 명확한 예는 고후 13:5인데,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이 말씀에서 '페이라조'와 '도미카조'가 모두 사용되고 있으며 뒤에 나오는 '확증하라'가 바로 '도미카조', 즉 마음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3:10의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십일조를 많이 바치라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씀이며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 10절에서도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도 물론 확증하라는 뜻의 '도미카조'가 사용되었으며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란 그 앞 절에서 이미,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나타나는 빛의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경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씀은 모두가 마음으로 그리고 삶으로 입증하고 확증하라는 뜻의 말씀이지 하나님을 향하여 뭔가 흥정을 하라고 사용된 경우는 한번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면 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십일조로 하나님을 흥정하고 시험하라고 부추킴을 받았으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뿐만 아니라 10절의 후반부 말씀인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는 말씀도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래 한글 개역 성경에도 '쌓을'이라는 단어는 원문에 없다는 뜻으로 아주 작은 글씨로 써놓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문에 없는 그 작은 글씨를 언제나 가장 큰 소리로 읽고 또 가장 소리로 강조하였지요. 결국 말라기 3:8-10은 기복주의적인 가치관을 전제로 성경이 번역된 아주 고약한 번역의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입니다. 당시의 그 도적놈 제사장들이지만 그들이 돌이키고 그 마음과 삶으로 다시 신실함을 증명한다면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선 용서하시고 오히려 그들을 향하여 다시 복을 내리시겠다는 은혜의 말씀인데, 오늘 한국 교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팔아먹고, '십일조를 온전히 바치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 그러니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하자'고 거짓되고 왜곡된 사실을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속여 선포하였으니, 그 엄청난 죄악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의 일 점 일 획을 누구보다 중히 여기며 또 성경 외에 더하거나 감하는 일을 저주라고(계 22:18-19) 우리는 알고 있으며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이단들에게서나 발견되는 현상일 뿐 우리는 아니다고 사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글을 쓰면서 늘 다시 느끼며 던지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말 그러한가라는 것입니다. 조금만 문맥을 살피고 조금만 본문을 꼼꼼히 보면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 사실 너무 쉽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으로 우리는 내 눈의 들보는 알지 못하고 형제의 티만 찾으며 살아왔습니다. 성경이 가장 경계하는 인본주의 물질주의의 들보가 바로 내 눈에 들어 있었는데 도대체 무엇인들 바로 볼 수 있었겠습니까?
아, 참으로 진리를 바르게 알고 싶으며 그 진리를 따라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진리라는 이름으로 또 우리는 얼마나 왜곡된 진리들을 지금껏 부추김 받았습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인간들의 생각과 돈이 지배했던... 차마 우리들의 교회가 다 그랬다고는 말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모습들이 드러나고... 사실은 그랬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쉽게 말해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또 본질적임은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은 십일조로 시험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인식에 대한 왜곡된 지식이 입력되었으니 거기서 비롯된 다른 부가적인 산물들이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호세야의 그 음성을 다시 들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참으로 힘쓰고 애를 써서 바르게 여호와를 알아야 할 것이며, 그 길만이 우리가 살길임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돈이나 우리들의 얄팍한 행위의 그 어떤 것으로 시험할 수 있는 대상이 결단코 아닙니다. '십일조' 그 본질은 돈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십일조는 그 어떤 다른 이유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왜곡된 가르침을 증거하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합니다.
<진짜 십일조를 찾아서>
그렇다면 하나님께선 십일조를 통하여 무엇을 가르치고 싶으셨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십일조를 드려야 했다면 그 십일조를 통하여 과연 그 어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웠어야 했을까요? 지난 글에선 십일조 도둑놈 찾기를 통해 '하나님을 시험하는 십일조'의 문제를 풀어갔었는데, 오늘은 먼저 진짜 십일조 찾기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십일조'에 접근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진짜 십일조라니? 그럼 가짜 십일조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예, 물론 가짜도 있지요. 현재 한국 교회들에서 강조되고 있는 십일조가 바로 가짜 십일조입니다. 진짜 십일조는... 이제 한번 찾아볼까요?
우선 십일조가 세 가지 정도라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이 세 가지 십일조들이 각기 다른 '세 개의 십일조'인지 아니면 '한 십일조의 세 가지 다른 국면'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저 성경에서 언급하는 순서대로 첫째, 둘째, 셋째 십일조라고만 이름 붙여서 언급하겠습니다.
"첫째 십일조"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십일조로 "레위인과 제사장과 나눠먹는 십일조(레 27:30-33, 민 18:21-32)"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의 십일조는 레위기 27:30-33에서 언급된 후 민수기 18:21-32에서 좀 더 확장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땅과 거기 속한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며 그 모든 소산들은 여호와의 은혜'임을 고백하면서 그 고백을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주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스스로 취하시는 십일조입니다. 또한 이것은 구별되어 성전을 섬길 직분을 맡음으로 땅 분배에서 제외된 레위인들을 위한 생계의 대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들 역시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에서 다시 십일조를 떼어 제사장들에게 주어야 했습니다. 이 십일조는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고 또 교회에서도 가장 많이 들었던 십일조의 용도입니다.
"둘째 십일조"는 "축제에서 가족과 함께 나눠먹는 십일조(신 12:5-19, 14:22-27)"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신 12:5, 11, 14:23)'으로 가지고 나와 '온 가족(12:7, 12, 14:26)'이 함께 먹고 즐기라는 명령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 제사의 큰 주제인 '여호와 앞에서의 음식 나눔'에 내포되어 있는 '거룩한 식사와 축제'라는 신학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으며,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가 함께 축제하며 또 함께 나눠 먹는 정신은 신약의 애찬(love-feasts)과 성찬으로도 이어지고 있어서 언약 공동체 내에서 영속적 가치와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유월절 등 절기 축제에 참여하는 경비와 또 함께 음식 나눔을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튼 중요한 것은 십일조를 제사장과 레위인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 가족들과 함께 즐기며 나누어 먹음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십일조는 레위인의 생계를 위한 것이다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이해가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십일조"로는 "이웃과 나눠 먹는 십일조(신 14:28-29, 26:12-15)"가 또한 명령되고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매 3년마다 한번씩 행하는 철저하게 나눔에 목적이 있는 십일조였는데, 수혜 대상은 레위인들과 객(이방인, 개종자들)과 고아와 과부들이었습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들은 알다시피 구약에서 늘 언급되는 나눔과 구제의 대상이었기에 이 십일조는 특별히 약자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용도로 실시되었던 십일조였으며, 또한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복에 대한 선포는 오직 이 십일조를 지키는 것에 대하여 선포되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십일조 하면 워낙 '복'을 밝히는 백성인지라 좀 강조하여 밝혀야겠습니다.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당연한 하나님의 것을 바치는 것이기에 오히려 안 지키면 저주만이 선포되고 있지만, 가난한 이웃을 위한 구제의 십일조는, 물론 이 십일조도 명령이지만, 이 십일조는 잘 지킬 때에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9)"는 축복의 약속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 받기 위해 십일조 하시는 분은 전략적으로라도 반드시 구제의 십일조를 하셔야 그토록 원하는 복을 받을 수 있으므로 복 받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라면 이웃과 나눠 먹는 구제의 십일조를 하는 것이 훨씬 더 논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양상의 십일조가 구약 성경에 율법으로 언급된 십일조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둘째 십일조'와 '셋째 십일조'에 대하여는 지금 처음 들으시는 분도 꽤 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우리는 여지껏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잘 알고 있었는데 정작 십일조를 온 가족이 함께 나눠먹었다 라든지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는 삼 년에 한번씩 따로 다시 십일조를 했고 특히 그 십일조에만 사실은 축복이 선포되고 있음을 왜 우리는 여지껏 제대로 몰랐을까요?
서두에서 현재 한국 교회들에서 강조되고 있는 십일조가 바로 가짜 십일조라고 말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십일조는 정작 십일조의 일부분뿐이었고 또 레위인이 사라진 지금 우리가 십일조를 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오히려 둘째 십일조와 셋째 십일조가 강조되어 십일조를 했어야 하는 게 논리적으로 맞는데, 전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관련되어 또 하나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는데, 십일조는 처음부터 성전 유지를 위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성전 유지는 성전세로>
위에서 이미 언급되었지만, 세 가지의 십일조 모두 '나눠 먹는다'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철저하게 나눠 먹을 수 있는 음식에만 국한되었으며, 그야말로 '나눠 먹는 것',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성전 유지를 위해서는 '성전세(Temple tax)'가 있어서 그것으로 충당되었고, 건축을 할 때는 주로 자원하는 특별 헌금이나 헌물이 따로 드려졌습니다. 성경에는 성막을 만들었던 기록과 성전을 두 차례 건설하는 모습과 또 몇 번 성전을 보수하는 기록이 있지만 그 목적을 위해 십일조가 사용되었다는 언급이나 정황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십일조는 그냥 나눠 먹는 것일 뿐이었으니까요.
반면에 성전세는 출 30:11-16에 나타나 있는데, 성전을 위한 속전으로 20살 이상 된 성인 남자가 반 세겔을 드리도록 제정되었으며, 출 38;24-31에서 처음 거둬들인 성전세의 세목과 또 그 성전세가 성막 건축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대하 24장에 보면, 요아스 왕이 여호야다 제사장 생전에 성전 보수를 하기 위하여 성전세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으며, 요시야 왕은 성전 보수를 하다 율법책을 발견하고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는데 그때에도 성전세로 거둔 은으로(왕하 22:4) 성전을 보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지난 글에서 대대적인 십일조 회복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느헤미야도 성전을 위하여는 십일조와는 다른 별도의 성전세를 거두었음(느 10:32)을 알 수 있는데, 느헤미야 시대에는 1/3세겔을 성전세로 바쳤습니다. 즉 성전세는 원칙적으로 1/2세겔을 바치도록 되어 있었으나 느헤미야의 시대와 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대에는 그 세를 감하기도 하는 융통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십일조와 성전 유지는 상관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오늘날도 십일조를 꼭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많은 분들이 '성전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십일조는 성전 유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에 이 말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으며, 정히 그러하다면 지금도 예배당 건물 유지를 위해서 특별한 헌금을 하거나 아예 성전세처럼 일종의 회비를 내는 것이 훨씬 더 성경적이며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잘못된 성경해석을 들이밀며 왜곡된 관점과 의도를 가지고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종교적 횡포일 뿐 결코 정당하고 바른 목회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돈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자인하며 고백하는 행위에 다름이 아니며, 결국은 돈 때문에 진리를 팔아먹는 행위라고 지탄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전세는 세겔이라는 돈으로 드렸지만 십일조는 아예 돈으로 바칠 수도 없었습니다. 구약 성경 어디를 보아도 토지 소산과 가축 이외의 다른 소득에 대하여 십일조를 내라고 한 경우를 찾을 수 없을뿐더러 돈으로 십일조를 낼 수도 없었습니다. 구약에서는 돈으로 십일조를 내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4:24-27을 보면, '둘째 십일조'인 축제의 십일조가 설명되고 있는데,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를 가지고 가기에 성소가 너무 먼 경우에는 일단 돈을 가지고 가서 성소가 있는 곳에서 다시 십일조에 해당하는 물품들을 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레위기 27:31에 보면 '사람이 그 10분 1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5분 1을 더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시 말해 돈으로 대신하려면 10분 3에 해당하는 금액을 내야 한다는 말이며, 더구나 제사장은 그 돈을 십일조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십일조에 해당하는 물품을 사야만 했습니다. 쉽게 말해 돈으로는 안받겠다는 말씀이지요.
어찌보면 참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법규정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멀리 있는 사람이야 당연히 돈으로 바치는 게 훨씬 쉬울 것이며, 제사장들이 모든 돈을 거두어서 일괄 구입하여 분배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며 경제적입니다. 그리고 예리하신 어떤 분들은 그 당시는 화폐 유통시대가 아니었다 할런지도 모르겠는데, 그것도 전혀 아닙니다. 이미 화폐는 아브라함 이전부터 널리 유통되고 있었고(창 23:12-16) 또 십일조보다 앞서 성전세는 이미 돈으로 내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돈으로 내려면 3배를 내라고 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억지로라도 그것들을 이고 지고 끌고 성전까지 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선 왜 이렇게 비합리적인 요구를 십일조에 하고 계실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십일조는 단순히 하나님의 것이기에 바치라는 것 이상의 그리고 복 받기 위해 바치라는 것 이상의 하나님의 특별하신 의도와 목적이 있음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것을 성전까지 네가 직접 이고, 지고, 끌고 와서 예배와 축제를 드리며 바쳐야 하고 레위인들과 온 가족들과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나눠먹어야 한다"라는 것이 십일조에 대한 정확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개혁할 때가지 맡겨 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십일조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며 그리고 헌금이라는 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이 십일조와 헌물은 제사 제도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제사 제도와 성전이 필요 없게 되었고 또 실지로 사라진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9-10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막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예물과 제사'는 폐지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십자가상에서 대신 치러주실 때, 우리가 일생 동안 바쳐야 할 십일조와 헌금까지도 다 바치심으로 십일조 예물과 헌금 예물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냥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심으로 폐지하셨습니다. 왜 이 사실을 믿지 않습니까? 처음부터도 그랬지만 이제는 참으로 하나님께 돈을 일체 바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왜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그 잘난 돈 몇 푼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며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습니까?
도대체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믿는 다는 말입니까? 참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왜 여전히 나의 행위로 뭔가를 과시하고 이루어보려고 합니까? 제발 좀 예수 믿고 삽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구원에 관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예물과 제사는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히 7:12)"
모든 것이 이미 다 변했고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십일조는 이미 폐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돈을 드릴 이유는 처음부터 없었거니와 물론 지금은 더더욱 없습니다. '개혁할 때가지 맡겨 둔 것'들이 개혁된 지는 이미 지나도 한참을 지났으며,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루어졌고 다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헌금한다고 말함으로 자멸의 구덩이를 제발 파지 파십시오. 헌금은 그냥 교회의 운영과 선한 사업들을 위하여 그대로 하면 됩니다. 그것 자체가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재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빌 4:18)"입니다. 빌립보서의 이 말씀도 빌립보 성도들이 복 받을려고 충동되어서 바친 헌금들이 아니라 바울의 선교사역을 돕기 위한 연보였고 선교헌금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연보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헌금을 필요로 합니다. 그 헌금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동기가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동기가 아니라 바울과 그의 선교 사역을 단순히 돕겠다는 선한 동기였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하나님께 한다는 거짓 가르침에 속아 억지로나 또는 생색내며 헌금하지 말라는 것이며, 이제는 그 십일조와 헌금에서 마땅히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말했던 바울의 말씀처럼 이제는 자유해야 하며 더 이상 십일조와 헌금이라는 또 다른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어지는 6장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고 말씀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기복주의와 무속신앙으로 점철된 인간 종교의 역사는 끊임없이 신에게 뭔가를 제공함으로 신으로부터 그에 따른 수혜(복)를 입을 수 있다는 패러다임을 유지해 왔습니다. 구약에서 그토록 경고하고 있는 우상 숭배가 바로 그러한 이방종교들의 패러다임에 대한 경고였으며,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그토록 강력한 비판을 받았던 것도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내세우며 자기 의에 빠진 모습들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셨고 예수께서 다시 반복하신 말씀들은 이와 같은 일반 종교의 패러다임에 대한 전복(顚覆)이었으니 즉, 네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이웃을 향하여 나타내라는 것이었으며, 십일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고백인데 그 표현은 레위인과 객들과 과부와 고아들과 나눠 먹는 것으로 표시되어야 했습니다. 즉 돈은 신(神)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는 가히 모든 종교의 페러다임을 깨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고 싶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지 말고 그것을 오히려 네 이웃에게 주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으며 물론 동일하신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돈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번도 없으며, 예수님의 줄기찬 메시지는 "네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 막 10:21)"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 받는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사실 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십일조를 철저히 하고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주어야 하냐면 눅 6:38 그 말씀의 전문맥을 보면 '원수'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 달라며 교회에 바친다고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원수에게 주는 것이 오히려 복의 조건인데, 그토록 복을 좋아하고 갈구하면서 왜 이 말씀은 큰 소리로 가르치지 않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예수를 만나고 성령으로 충만했던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은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져,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셨으며 그 가운데 한 사람도 핍절한 자가 없지(행 2:44-45, 4:32-35) 않았습니까? 심지어 고넬료는 이방인었고 로마의 군대장관이었으며 아직 성령을 알기 전이었지만 그의 '구제와 기도(행 10:31)'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 않았습니까?
교회는 구제단체가 아니고 자선기관이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주라!"고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음성 앞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는, 인색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기에 율법으로는 되지 못하였고 결국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며, 초대교회의 역사가 보여 주듯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으로 마침내 가능하지 않았습니까? 성령의 충만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니 하나님이 원하셨던 대로,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돈을 나누는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을 받고 성령과 동행하는 우리에겐 우리에게 복으로 주시는 물질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만이 남게 된 것이며, 이것이 진정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며, 이 일을 행하는 도구가 바로 연보입니다. 그러므로 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연보를 통하여 이웃에게 나눠져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45)"는 말씀이 아니었습니까? 거기 심판대에 선 자들은 하나님을 몰랐던 자들이 아닙니다. 염소의 자리인 왼편에 선 자들의 대답(25:44-45)을 들어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몰랐던 것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는 바로 이 사실을 몰랐기에 그들은 결국 염소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종말의 심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비유가 등장합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인데, 한결같은 공통적인 메시지는 하나님을 알되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심판대 앞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신랑이 이렇게 더디 올 줄은 몰랐던(25:5)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을 알았지만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고(마 25:24-26) 그저 자신의 생각대로 그 주인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염소의 자리에 선 그들도 하나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접하는 방법, 즉 그것이 바로 이웃을 향하여 '주는' 것이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는 지 목사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다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어려운 형편에도 하나님께 헌금하는 일에는 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더욱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 순수함을 등쳐먹으면서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들은 엉뚱한 길로 인도하는 소경된 인도자들(마 23:13)' 아니 그 사기꾼 인도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금하라고 엉터리로 가르치며 협박까지 하면서 정작 오늘 우리가 연보 해야 할,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인, 우리의 이웃들을 향하여는 귀 막고 손 접게 만들었던 그 인도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을 복채를 챙기는 우상신으로 전락시키는 발람의 후예들이 교회에서 판을 치게 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 돈을 바친다는 샤마니즘적인 관념을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하루 빨리 뽑아 내야 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하며 그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물론 대부분의 교회들이 어쨌든 많이 헌금된 그 돈을 바르게 잘 쓰고 있으며 특히 이웃을 향한 섬김과 구제의 손길에도 사실은 다른 종교들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통계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불교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카톨릭 보다도 사실은 개신교가 월등히 더 많은 돈을 나눔과 구제에 지출하고 있습니다. 물론 총액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에 가장 돈이 많은 교회가 앞섰고 전체 헌금 중 비율로 따진다면 그렇지도 않지만. 아무튼 그런데 왜 교회는 이웃을 향해 귀 막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겠습니까?
꼭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설교를 통해 선포되는 메시지들의 기복적인 편향성이 그런 인식을 낳은 것 같으며 특히 대형 교회들의 행태가 그러한 문제들의 중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실지로는 80%에 육박하는 목사님들과 사역자들이 생계의 곤란을 겪으면서 사역하고 있고 대부분의 성도들이 어렵고 힘들게 헌금하고 있는 형편을 보면, 저의 이런 글이 필요할까 싶은 생각을 수 백 번도 더 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그렇기 때문에 바르게 밝혀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열심히 헌금하고 있지만 그 열심들이 바른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면(롬 10:2) 결국은 헛되기 때문이며 또 참으로 어렵고 힘들게 사역하는 많은 사역자들에게 바르게 사용되는 연보의 몫이 돌아가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자들의 교회가 되어 버린 교회에서, 헌금 많이 못한다는 부끄러움을 안고 그러나 신실하고 소박한 믿음으로 꿋꿋하게 신앙 생활하는, 참으로 작고 소중한 성도들에게도 이제는 바르게 사용되는 연보의 몫이 돌아가서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참으로 잠시나마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해 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예배 잘 드리면 된다고 우기시는 분도 있겠지만 결코 그것만이 아닙니다. 성경이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은혜와 자유의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헌금과 십일조라는 장애물 때문에 전도의 문이 닫혀 수많은 영혼들을 잃게 된다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무엇보다 '복음'이 온전하게 '복음'으로 선포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만이 예수의 피로 구속 받은 우리의 유일한 소명이며 자랑이며 소망이라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기울어 가는 교회를 바라보며 그 기둥을 다시 부둥켜 안고 세워야 할 소임을 부여 받은 작은 목사로서 참으로 잠 못 이루는 밤들을 보내며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답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것, '복음을 다시 복음 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비록 정답을 알아도 그 여정이 순탄치는 않겠지만 '복음'이 진정 '복음'되어야 한다는 이 정당성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옭아맸던 그 무수한 속박들을 끊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그 자유를 가지고 이제는 예수의 가르침 앞에 순복하는 또 다른 굴종입니다. 그것이 내 힘으로는 될 수 없는 일들이기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아름다운 굴종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함께 은혜와 자유와 평강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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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러한 성경해석을 알면서도 모른척하고 가르친다는데 있습니다.......이름하여 꼼수를
두는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