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굴)
미국 이민 100주년 기념일이라는 2003년 1월 15일
눈발이 흩날리는 워싱턴 달라스 공항에 9살, 11살 두 아이의 손을 붙들고,
타는 목마름과 8개의 이민가방과 함께 우리 가족의 이민의 삶은 시작되었다.
복잡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제주도같은곳에 가서 약간 느린듯, 부족한듯 그렇게 살고싶다는 열망이 어느날 갑자기 이민이라는 길로 우리를 내몰았을때
당사자인 우리 부부는 물론, 주변의 누구도 우리가 미국으로 떠나게 되리라는걸
상상하지 못했다.
부족한, 아니 전혀 안된다의 가까운 영어와, 전문기술 하나도 없음.
미국내 친척이나 지인, 전혀없음.
미국에 와본 경험또한 없음인 우리 가족이 지난 4년을 어떻게 미국에서 살아왔는지,
때때로의 절망과 나락에 떨어지는듯 싶었던 아스라함,
희망과 눈물들, 웃지못할 해프닝들을 이제는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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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공장 노동자로 이민을 신청하겠다는 나의 상담에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내던 시 고모님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불편한 다리를 절룩이며 단숨에 날 찾아오셨다.
가족도, 친구도 하나 없는 곳에 부모,형제 다 놔두고
무슨고생을 하려고 가느냐며
가능치고 않고 될수도 없는 이야기 하지 말라며 역정을 내셨다.
다행이 하나뿐인 시누의 반응은 & #44318;찮다.
"여보, 얘내들 이민가겠다는데 어쩌죠?"
"그래. 갈수나 있으면 한번 가봐라."
이게 농담처럼 나눈 시누 부부의 허락이였다.
이민국 사무실에서 딱딱한 의자에 앉아 벽에 세워진 성조기의 별을 세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피곤에 지치고, 긴장한 두 아이들은 아무말도 없이 큰 눈만 깜빡거리며 눈치를 본다.
우리 말고 서너팀의 사람들이 드문드문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린다.
과연 저들은 무슨 사연으로 태어나 자란 제 나라를 두고 오늘 이자리, 미국이란 나라의 이민의 벽을 두드리는가.
또, 나는 왜 저 어린것들의 손을 붙들고 이자리까지 와서 앉아있나?
나는 실패자인가? 나는 미적응자였나? 나는 내 나라를 버린것인가?
과연 나의 선택은 옳은것인가?
가슴속에 때늦은 근심과 후회와 절망이 밀려오며 찬바람이 불어온다.
'어이구, 어찌 살아야 하나?'
탄식과 함께 밀려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꿀꺽 삼키는데 마음 한구석 또다른 생각이 슬며시 떠오르며 불안을 달랜다.
'재밌잖아. 안심심하고. 참 인생 스릴있게 사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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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ggage claim에는 우리 가족의 이민가방 8개만이 남아 뱅글거리며 돌아간다.
어지러웠겠다. 벌써 세시간째 저리 돌고 또 돌았으니....
검색대에서 가방 8개 중 1개만 샘플로 검사하겠다며 내용물을 묻는다.
옷, 주방용품, 이불, 약간의 식료품, 멸치라는 작고 마른 생선약간이 있다며 남편이 진한 눈웃음을 보낸다.
사실, 우리 가방엔 온갖게 다 들어있다.
겨울인지라 당장 덮어야할 이부자리만도 한가방을 가득 채우고 남았고,
두꺼운 겨울옷 한가방에 코펠, 도마, 숟가락, 젓가락,
또 남편몰래 충동구매로 홈쇼핑에서 사서 숨겨둔 후라이팬 한세트(5개),
밥그릇, 국그릇 4개씩에 라면 한상자, 햇반 10개,
아이들 심심할까봐 가져온 만화책 몇권에다가 시어머니가 싸주신 김장김치 두통,
오일장에서 산 명란젓,창란젓,오징어젓,갈치젓 등,
북어 20마리 찢어 말린것, 각종 양념, 젖갈에 절군 깻잎 한통과
영광까지 가서 장만한 굴비 2두릅에
커피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한 봉지커피 한보따리,
아이들을 위한 과자 종합세트,
정말 왠만한집 살림을 옮겨놓은듯 온갖것들을 랩으로 감고 지퍼팩에 담아 플라스틱 통에 싸고 또 싸서 여기저기 구겨넣었다.
그런데 하필, 검색대 위에 올라간 가방이 x-ray를 통과하는데
굴비의 큰 눈이 금방이라도 껌벅거릴듯 쾡하니 선명하다. 이걸 어쩌나....
손가락 한마리를 가리키며 정말 요만하다고 했던 멸치라는 작은 고기가 언제 이리 커져버렸나.
또 한 구석에는 처치하기 곤란해서 가져온 결혼 패물들.
너무 구식이라 팔아먹지도 못할 반지, 시계 등이 작은 주머니에 담겨져 빙그레 웃으며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시킨다. 눈치도 없는것들 같으니....
검색대 직원들이 낄낄거리며 손가락으로 굴비를 가리키고 쑥덕거리며 누군가를 부르고 난리 버거지를 피웠다. 참 이상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니들이 굴비맛을 알어?
하얀 쌀밥에 노릇노릇 구은 굴비살 얹어먹는 밥맛을 니들이 아냐고?
빼았기리라 채념했던 굴비를 다행이 그들은 눈감아 주었고
우리는 그 사연많은 굴비를 거의 1년동안 아끼고 또 아껴가며,
쪽쪽 소리내며 손가락을 빨며 뼈까지 오독오독 씹어서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