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거리를 방문한 70이 훨씬 넘은 교회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아마도 75세는 되셨을 겁니다.
제가 다녔던 작은 교회에 잠시 출석하셨다가 한국으로 가셨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저 순복음 계열의 교회에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으로만 여겼습니다.
아마도 75세는 되셨을 겁니다.
제가 다녔던 작은 교회에 잠시 출석하셨다가 한국으로 가셨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저 순복음 계열의 교회에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으로만 여겼습니다.
이 권사님께서 함께 예배도 참석하셨고 성서공부에도 참석하셨습니다.
설교는 그냥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형성의 배경과 그 메시자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서
공부 역시 문자적인 독해를 지양하고, 성서를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전제한 것이었습니다. 가령, 예수의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은 그 복음서가 형성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나중에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는 때에 권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전에 들었던 설교나 성서 공부는 그냥 믿어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자세하게
설명을 해 줘서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나 중에 개인적으로 전화통화를 했는데, 그 말씀이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없이 예배와 성서공부에 참여하는 권사님의 내심에는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열정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성서를 통독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성서를 제대도 이해하려면 성서 이해를 위한 안내서도 필요합니다.
한번 보십시오. 레위기나 신명기를 백번 천번 읽는다 해서, 그 것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이나 그 텍스트가 생산된 자리, 저자의 의도를
고민하지 않고 한줄이나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런 말씀은 지나친 판단일 수 있습니다. 성서에 대한 배경이 전혀 없는 분이라도 이 텍스트가 나름대로의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성서 통독도 참 좋은 일입니다.
이러한 통독에 성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면 더 좋겠습니다.
그 권사님께서 그동안 받은 자료를 한국에 가셔서 다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삶에 대한 열정이 있구나. 그 열정은 다름이 아니라 머리가 굳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새로움을 향한 열정, 그곳에 삶의 기쁨이 동반됩니다.
부부끼리라도 언제나 처음 만난 순간처럼 대한다면, 마음은 파도처럼 설레이며, 성서를 보더라도 애인처럼 소중하며,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 또는 메신저가 됩니다.
이 말씀은 성서통독에 대한 비판은 아닙니다. 그 열정에 좀더 비판적 노력이 가미된다면 산을 옮길만한 희망속에 살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숨쉬고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일인지요. 그 중심에는 세상의 모든 인간이 최소한 공유될 수 있는
인간됨됨이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그런 말씀들 드리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