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에게 만일 자기의식(自己意識)이 있었다면,
자신 외에 의식을 가진 피조물(被造物)은 결코
창조해 내지 않았으리라' - 칼 구스타프 융
몸서리 쳐지는 세상의 낡은 권위 앞에서
소박한 분노를 잉태한 가슴이,
가늘게 경련합니다
환상(幻相)으로 위장한 땅과 하늘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살던 피조물들을
몽땅 신(神)에게 돌려 보내고
어디에서 용기가 솟아났는지 발가숭이가 되어,
굴복(屈腹)의 울타리를 넘어 온
먼 우주의 순수한 빛에 몸을 적십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청결한 욕망으로 까만 영혼을 세탁하는,
그리하여, 죽음마저도 향기로운
이 세례적(洗禮的)인 행위를
신(神)은 애써 이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의 비천한 삶을 누군가 대신하지 않았음에,
그나마 편한 마음이 됩니다
문득,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망설이던 선택으로 비로소 자유로운,
새로운 날들 앞에서
그러니, 신(神)이여 용서하소서
이 맹랑한 마침표를
[詩作 Memo]
모두冒頭에서 구차하게, '융'의 말을 인용해 본다.
발가숭이가 된, 수치심을 어느 정도 무마시키기 위해,
더 평화스러운 무념무상을 꿈 꾸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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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시를 읊은 삶, 칼 구스타프 융을 회상하며
전 철
군대라는 음울한 사각지대에서 국어사전을 통째로 암기했다던
젊은 작가 김소진이 며칠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음이 아팠다.
오늘 아침에는 몇 년전 종로서적 문학 파트를 스쳐 지나가다
세인의 죽음과는 달리 시인(詩人)의 죽음은, 사뭇 잊고 살았던
시인의 언어가 자명한 사물을 교란시키듯이, 시인의 죽음은
시인의 죽음은 모든 존재가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와해되는
어쩌면 시인에게 있어서 암울한 현실은 언제나 면역 결핍의
오히려 시인의 고향은 삶 저편의 신성한 숲일런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자 쉘러는,
바로 하늘의 문화가 숨쉬는 시인의 정신에 있어,
오히려 세계는 잔혹한 여정이었을 것이고,
죽음은 오히려 곱게 다가오는 구원의 빛일런지도 모른다.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도 마찬가지이다.
융은 우리네의 삶의 진정한 의미를 건네 준다.
단지 인간 존재는 육 십년의 삶 한줌을 살아가는 서글픈 존재가
이런 의미에서 단지 그의 언어는 의학과 심리학의 소독냄새가
시인에 있어서 꿈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시인의 꿈이 자명한 현실이듯이, 두말할 나위 없이
더 나아가 융은 신화와 전설, 환상과 같은 몽환적 분위기들을
융에 의하면, 애초부터 인간은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화와 전설, 꿈이나 환상이 인간 전체를 드러내는
인간 전체의 중심인 <자기>는 언제나 어두침침하다.
그 수천 해리의 기저에 흐르는 중심인 <자기>를 향해
일찌감치 포기해 버렸다고 융은 단언하는 것이다.
지상의 화려한 도시에 영혼이 팔린 우리의 문명은,
양 쪽으로 길다랗게 놓여진 저 포풀러 가로수를 사랑하였던
우리 모두는 한여름밤의 아름다운 꿈을 기억한다.
그 아름다움에 숨이 멎은 나머지, 우리는 저 공룡의 도시와 같은 현실로 귀환하기를 애써 발버둥치며 거부한다.
단아하게 수놓아진 꿈의 풍경들을 산산히 조각낸다.
어쩔 수 없이, 수면에서 의식의 경계로 진입하는 그 찰나,
끈적끈적하게 남아있기에, 그 아름다운 꿈을 개꿈이라고,
이미 한 여름밤의 꿈은 바싹 증발해 버린다.
융은 망각의 기능을 상실한 운명의 소유자였다.
그러하기에 꿈의 무덤에 묻혀 있거나 망각의 늪에 고여있는
있다고 애써 놀라며 직시하였던 것이다.
융은 꿈에 미미하게 반영된 <자기>의 각양각색의 그림들을
그리고 하나의 장중한 그림을 그려낸다.
더 나아가, 그 <자기>의 풍경 - 실로 융에게 있어서 <자기>는 신적인 영역이다 - 은 거부할 수 없는 자명한 현실이고,
물론,우리는 <자기>의 세계를 <자아>의 그물로
그러나 우리는 <자기>의 세계 위에 이미 서 있다.
그 예표가 바로 불편한 현실에 대한 백색 저항이다.
가난한 대지 앞에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은
삭막한 대지에 대한 불안은 우리가 근원적으로 <자기>(Self)를
그것은 이미 싸늘한 대지에 대한 시인의 저항이 신성에
목소리이다. 세계에 대한 설명의 한계에 직면할 때에
융은 설명 가능한 세계만이 전부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융은 우리 각자의 生이 매우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인간 심성의 뿌리에는 저 깊은 무의식의 세계,
그렇다면 각자의 生은 결코 가볍거나 보잘 것 없는 生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生은 우주를 닮아 있다.
영원의 세계인 무의식의 현현이 각자의 生인 것이다.
플레로마의 세계에서 클레아투라의 세계로 뛰어든
우리의 生은 불멸의 무한한 세계가 유한한 세계 속으로
더 나아가 우리의 生은 끊임없는 성숙을 지향하는 존재이다.
그 지향이 바로 '개성화'인 것이다.
우리는 융을 통하여 살아있음(生)이
이제 생은 환희이고 생명은 경이로움이다.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펄럭거리며 비상하는 저 새를 보자.
새는 날기 위하여 얼마나 지난한 시간동안
인간은 인간이 되고 싶어서 얼마나 긴 계절을
인간은 백 년의 삶을 만나기 위하여 백 만년 동안,
백 만년 겨울잠의 기나긴 제의를 통하여
우리 삶의 밑둥에는 백 만년의 지난한 세월을 견뎌온 뿌리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단지 백 년을 사는 삶이 아니다.
우리는 백 만년을 몸으로 살아가는 푸른 생명나무이다.
그 생명나무가 가장 찬연한 열매를 맺는 그 순간,
그러기에 生은 저 영원의 빛의 드러남이다.
또한 지금의 生은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구현(Individuation)
시인에 있어서 인류를 구원하는 길은 시(詩)이듯이,
융은 꿈이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에게 예언한다.
꿈이란 <자기>와 <자아>가 체험하는 두 지대의 합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은 삶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중심의 소리이다.
꿈은 삶의 해리를 통합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고백하였다면, 융은 "꿈이 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왜냐하면 구원은 꿈을 타고 우리에게 건너오기 때문이다.
바로 융은 우리가 여기에서 안주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이제 우리는 더디게, 하지만 차근차근 <자기>로 나아간다.
꿈, 신화와 전설, 환상이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아련한 그 자리,
바로 시인의 마을로 우리는 조금씩 가까이 다가간다.
1997년 6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