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잘읽었습니다.
맺는말에서 하신
"안티 운동이 성공하려면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개혁운동으로 발전하거나 대안적 운동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동반되어야겠지요."
라는 대목에 동감합니다.
안티운동이 그저 "박멸하자" 라는 수준의 구호로 끝난다면 극과 극의 첨예한 대립을 하는 극단주의자들의 오류를 또한 번 밟게 될것입니다.
대안도 여러각도에서 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가 그시대에 역할을 잃어버리고 세속과 연합하여 자기배만 불린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민중들의 몫으로 오기 마련입니다.
저 개인역시 님이 말씀하셨듯이
단지 센세이션을 불러일이키는 시도에서 벗어나
민중들 스스로가 ,지금 의현상을 직시할수 있는 역사적안목을 볼줄아는 시야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이 연대하며 운동을 벌여나가는 것은 이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적지않은 사이트들이 그런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21세기 정보화시대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있고, 종교적 패러다임도 바뀔것입니다..
종교적기득권을 유지해온 사람들은 이제 빨리 다른줄로 바꿔서야 할때가 올것이다..언제나 그랬던것 처럼...
밑에글은 그냥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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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기독교의 새로운 흐름
이 글은 앞으로 기독교 문명이 새롭게 탈바꿈하는 방향성과 그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인 대변혁으로써 패러다임 전환과 실천운동을 모색한 글이다.
나는 이러한 기독교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가 꼭 한국의 상황에만 소급되지 않는다고
본다. 이미 세계 기독교의 새로운 변화에 자각한 사람들은 이 새로운 변화의 바람과 기운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오늘날의 세계는 복잡화·다원화돼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더는 폐쇄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이전의 것과 다른 새로운 경험을 직면하게 됐다. 21세기 기독교는 바로 이같은 다원주의 시대를 맞아 급속하게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성공회 신부 죤 쉘비 스퐁은 '새로운 기독교'(a New Christianity)라고 하기도 하고, 유명한 신약학자 마커스 보그는 '새로
등장하는 기독교'(a Newly Emerging Christianity)라고도 얘기하며, 더러는 '신세계 기독교'(a New World
Christianity)라고도 했다.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는 현재 기독교의 이러한 근본적 변화의 기운을 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같은 일종의 '탈바꿈'(metamorphosis)이라고 할 정도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상 이것은 '새로운 대안적 기독교
신학'에 대한 갈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대안적 기독교 신학은 적어도 기존의 전통 기독교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잘못된
오류들과 비극을 극복하고 다시 전면적으로 새롭게 재정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오류와 비극에 겸허하지 않은 종교나 기독교 신학이야말로 위험한
것이며 건강한 문명의 창조적 전진을 가로막는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신학의 위기, 교회의 위기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에 분명한 희망적 비전을 던져주고 있는가. 오히려 현재의 한국 기독교
상황은 '신학의 위기'이자 '교회의 위기'가 아닐는지. 예컨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국가보안법에 찬성하는 저 보수 기독교도들의 어이없는
작태야말로 이들이 가진 신학과 신앙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건강한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반인들에게 그냥 다가가서 물어보라.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우리 사회에 희망의 빛을 던져주고 있는지를 말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해 회의적일 것이다. 이 땅에 오신 역사적 예수는 낮고 천한 자들을 위하며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쳤건만, 오늘날 한국교회가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나라가 아닌 '교권'과 '교리'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 중심주의>와는 다른 <교회 중심주의>로
드러나고 있다. 즉 한국교회가 말하는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것도 고작해야 저 세상에서 영원복락 추구나 이 땅에서 '기독교신자 불리기'로 이해하는
게 일반적 수준인 것이다.
특히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은 온갖 게이트의 주역이며, 사회적으로도 많은 지탄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심심찮게 신문 지면에 등장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 알겠지만, 열혈 친미주의와 시대에 뒤떨어진 반공주의자중에는 보수 기독교인들이 꽤
많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는 여성안수 반대와 여성비하가 신학적·성서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는 서글픔이 현존한다.
또 한국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우리네 전통문화와 타종교에 대해선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불상이나 장승을 베어가고 절에 불을 지르는 것조차도 복음을 위한 전투적 사역이라고 생각하는 한심한 이들까지 나올
지경이다. 도대체 이들을 어떻게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성서 문자주의에 얽매인 기독교인이 어찌 민주화운동에 신경을 쓰겠는가. 남한 사회의
기독교인이 1천만 명에 가깝다고 하는데도 우리 사회의 거리는 날로 불신이 팽배해지고 각박해져만 가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한국 기독교가 왜 이러한 지경에까지 처한 것이며, 이같은 한국 기독교가 세계 열방에 무슨 놈의 희망이나 비전을 던져줄
수 있겠는가.
진정한 기독교라면 이 땅에서부터 전체를 하나님나라로 변혁시키려는 종교여야 마땅할 것이다.
참 종교란 그 사회가 추구하는 궁극적 답변이어야 할진대, 우리네 기독교는 전혀 그러질 못하고 있다. 나로서는 무언가 본질적이고도 심각한 왜곡이
기존 기독교 본질의 내부 안에서부터 작동되고 있다고 본다.
진보진영의 표류
다원화된 사회에서 여전히 한국의 기독교는 전투적·배타적이며, 가장 진보적이라는 '기장'
교단조차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선 공식적 입장 하나 없는 현실이다. 진보의 요람이라는 한신대학교의 신학도 옛말이다. 기장도 그렇고 NCC도 예전
같지 않게 서서히 보수화되어 가는 분위기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지금의 NCC가 아닌 80년대의 NCC였다면 작금의 한기총 같은 단체와의
에큐메니컬 연합은 터럭만큼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한국신학으로서 진보적이라는 기존의 민중신학도 한계와 위기를 보이면서 표류하기 시작한 때는
1990년대 이후부터 점점 표면화되었는데, 이는 신학적 이론 자체의 한계와 함께 당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국내의 군사독재정권에서
문민정권으로의 이양 그리고 사회적 계급담론에서 생태환경문제로의 관심의 전이들이 가져온 요인들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진보적이라는 기장 교단조차도 90년대 이후부터 횡행했던 구름 잡는 영성론의 유행과
더불어 대형교회의 성장주의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결과적으로는 매우 보수화된 경향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목회현장에서
'교인수제일주의'만큼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도 없잖은가.
이러한 진보 진영의 문제는 '신학현장'과 '목회현장'의 이분화 현상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특히 감신의 경우는 이것이 매우 뚜렷한 사례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반적 흐름들은 이젠 보수화된 교계 시스템이 오히려
자유롭고 창조적이어야 할 신학진영마저 통제하려는 분위기로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전환기의 흐름에 있어서 작금의 진보 기독교
진영조차 아직 기독교 신학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 부재하거나 모호하여 결국은 표류하고 있는 현실이다. 단지 느슨한 정도의 일반적이고도 추상적인
수준에서 대안을 말할 뿐이지, 더 분명하고 구체적인 신학적 좌표가 부재하기에 이에 따른 대안적인 기독 운동조차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겠다.
즉 말 그대로 진보 진영 역시 흔들리고 있으며 이같은 한국 기독교의 위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양식 있는 사람들은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과 회의를 가지고서 교회를 아예 떠나기도 하는 실정이
아닌가.
대안을 찾는 사람들
하지만 반면에 이러한 반작용의 효과인지는 몰라도 나는 특히 최근에 이르러 건강한 기독교를
일궈나가기 위한 여러 사회적 공감들이 하나둘씩, 깨어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무언가 점점 형성되어가고 있다고 본다. 이는 현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반감을 의도하는 안티기독교 사이트의 기하급수적 증가와는 달리 이들은 적어도 현재의 기독교에 대한 책임 있는 답변과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자들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기존 기독교로서는 더이상 안된다. 지금까지의 오류와 온갖 비극에도 반성하지 않은
기독교로서는 결코 안된다. 바뀔 건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살 수 있잖은가. 바야흐로 이제 그 한계와 폭발이 점점 정점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사적으로도 2천 년 서구 기독교 문명은 그 한계에 이른 게 아닌가 싶다.
절대자·군주자로서의 '초월신관'은 결국은 이 땅에 수많은 비극들을 야기했고, 현재의 미제국주의 이라크 침략 역시 기독교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는 이
참담한 현실은 무엇보다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생각건대 금번에 부시를 당선케 한 미국 남부지역의 기독교 정서와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
정서는 거의 다르지 않을 듯싶다(한겨레 2004년 11월 11일자 참조). 즉 이같은 친밀한 유대의 뿌리에는 국지적 제약을 넘어서까지 이들을
결속케 하는 인식의 완강한 공유점들이 있다는 말이다. 사실상 이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역사에 밀착되어 면면히 각 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와 은연중에
달라붙어 온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나로서는 이러한 시점에서 현재의 기독교가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가장 기초적이고도
근본적인 베이스부터 새로운 변혁운동이 이뤄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고 있다. 그 기초적 뼈대부터가 근본적으로 뒤바뀌어야 그 위에 새로운 살을
돋아나게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즉 선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악한 열매는 이미 악한 나무에서부터 돋아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