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기독교인들의 단기 선교에 대해서는 앞으로 지속적인 성찰을 요한 것이며, 지금의 상황으로선 최소의 희생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기를 빌어야 할 것같습니다.
좀 바빠서 유일신론 (유신론; monotheism)에 대해서 아주 개론적인 저의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고 제 손이 움직이는대로 몇자 적겠습니다.
대영제국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빅토리아 시대에 유럽 각국은 아프리카로 아시아로 식민지를 확장했고, 선교사들이나 무역인들, 상인들이 함께 식민지 루트를 따라 갔습니다. 이 때 활발히 논의된 이론이 사회 진화론입니다. 소위 미개한 식민지인들을 보니 문명화된 유럽과 차별을 요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이러한 진화론적 이해는 신에 대한 이해에서도 적용되었습니다.
페티시즘->애니미즘=>다신론=>유일신론이라는 구도였습니다. 이런 구도는 기독교를 부정하는 일환, 즉 유일신론이라는 것이 결국 원시적 애니미즘이 발전된 형태이니 특별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와 반대로 종교 퇴행론을 주장하는 이도 있었지요. 유일신론이 퇴행한 형태가 다신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진화론적 구도에 비판적 평가를 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종교사학자 페따쪼니라는 사람인데, 다신론에서 유신론으로의 발전은 단순히 진화적 발전이 아니라 혁명적 전복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조로아스트교에서 볼 수 있는 아후라마즈다 신은 어떤 신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절대적 권위를 부여 받았습니다. 이러한 신관념 하에서는 어떠한 신도 아후라마즈다와 비교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신들은 척결의 대상이 됩니다.
* 참조: 이런 신관의 변화에 대한 것은 사회인류학자 에반스 프리챠드 (E. E. Evans-Pritchard가 쓴 [Theories of Primitive Religion]. Oxford: The Claredon Press, [1965] 1971. 을 참조하십시오. 122 페이지의 짧은 책이지만 원숙한 인류학자의 빛나는 강의가 숨결처럼 느껴집니다.
이러한 유일신론적 절대성은 이스라엘 신의 가나안 정복, 기독교가 로마이 국교가 되면서 형성된 한 황제 (로마제국), 한 종교 (기독교)라는 절대성, 그리고 이슬람의 알라가 갖는 절대적 권위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절대적 신은 어쩔 수 없이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이워론적 사상을 배태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네 종교가 이원론적 사상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하실 수 있지만, 이들 종교가 만들어 낸 신념체계 또는 문화는 이원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바로 조로아스트교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고 봐야지요.
이런 종교들은 강력한 종교적 자기 정체성 (self-identity)를 갖추고 있으므로 자기 종교적 경계 또는 울타리가 매우 강하고, 이 종교에 대한 신도들의 봉헌 또는 헌신 (commitment)의 정도가 어떤 종교보다 강합니다.
이런 종교적 헌신이 다른 문화로 전이될 때 이것을 우리는 선교라고 합니다. 물론 불교 역시 역사적으로 이런 선교적 열의가 강한 적도 있었지만, 이들 유일신교에 비해서 상당히 낮습니다. 이런 선교적 열의가 강한 종교는 성장을 잘합니다. 기독교에서 보면, 소위 진보적, 자유주의적 교파는 교세가 줄고 근본주의적 종교가 득세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몰몬교나 여호와 증인 같은 것도 이런 근본주의적 신념체계를 갖추고 있으므로 강한 성장세를 보이지요.
이런 유일신관은 신도들의 열성도 있지만, 이런 열성들이 자기들이 신봉하는 신 개념에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속성을 부여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고상하고 절대적이고, 순수한 속성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지고한 모든 것을 신에게 투사해서 자기들의 신념을 고수한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단기 선교를 갔다는 것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이런 종교의 자기 정체성, 헌신, 그리고 배타적인 신관념이 사회적 표현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이런 종교적 비극과 갈등이 해소되기 위해서는 종교가 세속화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또 다른 말로 선교에 대한 이해를 달리해야 하는데 그러한 변화의 가능성은 0%일 것이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종교와 정치가 결합되는 종교의 폭력, 또는 선교적 열정이 만들어 내는 종교 신념체계의 제국주의적 확장은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속화된 유럽이나 캐나다의 성공화와 연합교단과 같은 진보적 교단이 화해의 신학, 대화의 신학, 평화의 신학을 주창한다 하여도 현실적으로는 이것은 작은 목소리, 아니 목소리가 점점 작아질 것이라는 가능성이 저를 점점 더 염세적으로 만들어 갑니다.
기독교의 절대적 관념이 위험하듯이 이슬람 역시 무서운 종교입니다. 종교가 형성된 이후 단 한번도 순수히 종교적인 것만이 고립된 채로 존재하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종교와 문화, 종교와 정치, 종교와 예술은 인간 삶의 중요한 하나의 표현이었지요. 이런 면에서 이슬람과 기독교는 정치적 종교라는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종교다원주의를 가르치거나 기독교 신학자가 부다상에 참배했다간 당장 학교에서 쫓겨 나듯이, 북미의 세속화된 하바드나 프린스튼 같은 데서 가르치는 역사학자나 종교학자가 이슬람 비판했다간 살해위헙이나 테러위협을 당합니다.
이런 못된 종교들 틈새에서, 어떤 이데올리기 (종교신념을 포함해서)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합리적 사고와 열린 마음이 중요하지요. 자기 신념이 변화될 수도 있고, 비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열어 놓는 것은 저 아래서 강현님과의 대화에서 언급한 과학 철학자 칼 포퍼가 지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종교를 갖고 있든 이런 태도를 가진다면 세상은 그렇게 부정적인 것마은 아닐 것입니다.
몇마디 두서없이 적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