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님,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종교 전문이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몇가지 제 생각을 달겠습니다.
1)
종교 성장을 위한 기본 요인들 (factors)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이상적으로는 종교가 유신론적 신념을 가질 것,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신앙과 종교 자기 정체성이 강할 것, 그리고 그 종교에 대한 신자들의 헌신의 정도가 높을 것 등입니다.
저는 미국 종교는 이 모든 것을 다 갖췄다고 생각합니다.
2) 종파 (sect)와 교파주의 (denominationalism)의 변증법
미국 종교의 성격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청교도들이 세웠다는 이 한마디가 다 설명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미국이 청교도들이 모든 기초를 세운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상징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유럽 이민자들의 저장소 역할을 했습니다. 재세례파 (대륙), 침례교도 (영국), 감리교, 장로교, 구세군 등등 유럽에서 넘어온 종파들 뿐 아니라 미국에서 자라난 안식일교회, 몰몬교회, 여호와의 증인, 순복음 계통의 성령파들 수많은 종파 운동의 본산지가 되었습니다.
신학자이자 사회학적 시각을 견지한 리챠드 니버는 교파란 종파가 세속화된 형태라고 했는데, 미국에서 기독교는 바로 종파와 교파를 오가면서 발전한 종교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진술이 시사하는 바는 강한 조직의 정체성과 헌신성이 강한 사람들의 집합체인 종파 운동이 미국 기독교 성장의 근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파적 운동 뿐 아니라 18-9세기에 불어닥친 부흥 운동은 종교들의 성장에 결정적 기여를 했겠지만, 이것이 사회적 조직으로 발전된 계기는 미국에 유입되었거나 자생한 종파적 교파적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3) 미국이 이신론자나 불가지론자 같은 토마스 제퍼슨이나 기독교의 비판가 토마스 페인 같은 미국 건국에 참여한 사람들이 지도자 층에 있었다 하더라도, 이들의 종교적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4) 한국 기독교의 성장은 미국의 교파와 종파주의의 복제판
이와 비슷한 예로 한국 기독교의 성장 역시 강력한 종파의식과 다양한 교파의 경쟁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하느님 사상에 유일신적 관념을 심어준 것도 기독교이고, 불교나 다른 종교 조직들이 자기 종교의 정체성을 돌아 본 계기도 바로 기독교의 영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증산교나 대순진리에서 보여주는 상제 사상은 기독교의 유신론적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장할 수 밖에요.
5)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미국 종교의 성장을 유럽과 비교해서도 설명될 수도 있습니다. 유럽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국가종교입니다. 독일의 경우, 성직자의 봉급은 국가가 지급하고, 많은 사회복지 단체들은 국가가 지원하고 기독교에서 운영합니다. 비록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유럽에서 종파는 거의 사교로 간주되어 탄압 또는 경멸을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국가 종교의 특징 (사회학적으로는 이것을 전형적인 church/ 교회형 조직이라 합니다)은 신자들이 그저 부모나 조상으로 부터 대대 손손 내려운 종교 의식을 문화적 요인으로 수용해서 종교적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나갈 열정도 없습니다. 성직자도 공무원같아서 나태에 빠져 있습니다. 당연히 종교 개종이 가져다 주는 삶의 변화나 도전도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텅텅 빌 수밖에 없는데, 교회형 조직이 아닌 종파적 조직이라는 강한 전통을 가진 미국은 전혀 이와는 다릅니다. 지금도 미국에서 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개신교는 바로 이런 종파적 원천을 갖고 있는 조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의 보고에 의하면 유럽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기독교는 바로 미국에서 수출되는 빌리 그레이엄 류나 다른 미국계 종파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유럽에서 종교로서 세금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는데도 급성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종교 사회학자들이 종교를 religious economy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시장이론을 끌어 들이는 것도 일리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종교는 서로 싸우고 경쟁해야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경쟁력이 없는 종교는 죽고, 경쟁력이 강한 종교는 살아 남습니다. 이런 면에서 미국 종교사는 보수 복음주의가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가 되었고, 자유주의는 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자유주의의 종말은 아닙니다. 승자는 안일해지고 자기 조직 유지에 급급하게 되는데, 이런 과정은 바로 신학적 자유주의 또는 기성종교화의 길을 걷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갖는 종파, 교파주의의 저장소는 끊임없이 새로운 종파를 산출해내는 무한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부시와 같은 대통령이 계속 배출될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합니다.
6) 어설픈 글맺음
그러니까 미국 종교사는 세속화의 역사가 아니라 종교화의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우리가 가끔 착각하는 것이 종교의 강함이 사상이라고 하는데, 이 사상이 신도들의 헌신이 따라주지 않으면 말짱 황이라는 것입니다. 한때 미국에서 세속화 신학이니 신의 죽음의 신학이니 하는 신학들은 공동묘지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신학적 쌈박함이 신도들의 동의를 못얻는 것이지요.
** 이태리나 프랑스에서 천주교는 국가 종교적 형태를 취하지만, 미국에 와서는 교파 중의 하나가 되어 다른 개신교 교파가 되어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라는 곳입니다.
*** 교회 (church type)형과 종파형 (sect type)의 유형론은 사회학자 막스 베버와 신학자이면서 사회학자인 언스트 트뢸취가 처음으로 주창한 것으로서 교회형은 수용적이고 기성화된 종교 조직을 말하고, 종파형은 배타적이고 기성 사회에서 일탈된 종교 운동을 의미합니다. 이런 종파형이 기성화되면 교회형으로 발전되는데, 미국은 어느 개신교도 주도적인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형태를 설명한 것이 바로 교파주의 (denominationalism)이라는 개념입니다.
이것을 다시 설명하면
교회형===교파형===종파형
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 교파형이 준 교회형이 될 수도 있고, 준 종파형이 될 수도 있지만,
미국 상황에서는
교파형<===========>종파 형의
스펙트럼에서 종교 조직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이런 유형론이 시사하는 바로 바로 종교간의 경쟁과 상호 발전입니다.
그러니 제가 볼 때 미국이 유럽과 같은 종교 구조를 형성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뭣도 모르고 막가파식 말씀을 드렸습니다.
☞ 종교 님께서 남기신 글
>한국인 기독교인들의 단기 선교에 대해서는 앞으로 지속적인 성찰을 요한 것이며, 지금의 상황으로선 최소의 희생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기를 빌어야 할 것같습니다.
>
>좀 바빠서 유일신론 (유신론; monotheism)에 대해서 아주 개론적인 저의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고 제 손이 움직이는대로 몇자 적겠습니다.
>
>대영제국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빅토리아 시대에 유럽 각국은 아프리카로 아시아로 식민지를 확장했고, 선교사들이나 무역인들, 상인들이 함께 식민지 루트를 따라 갔습니다. 이 때 활발히 논의된 이론이 사회 진화론입니다. 소위 미개한 식민지인들을 보니 문명화된 유럽과 차별을 요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이러한 진화론적 이해는 신에 대한 이해에서도 적용되었습니다.
>
>페티시즘->애니미즘=>다신론=>유일신론이라는 구도였습니다. 이런 구도는 기독교를 부정하는 일환, 즉 유일신론이라는 것이 결국 원시적 애니미즘이 발전된 형태이니 특별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와 반대로 종교 퇴행론을 주장하는 이도 있었지요. 유일신론이 퇴행한 형태가 다신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
>이런 진화론적 구도에 비판적 평가를 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종교사학자 페따쪼니라는 사람인데, 다신론에서 유신론으로의 발전은 단순히 진화적 발전이 아니라 혁명적 전복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조로아스트교에서 볼 수 있는 아후라마즈다 신은 어떤 신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절대적 권위를 부여 받았습니다. 이러한 신관념 하에서는 어떠한 신도 아후라마즈다와 비교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신들은 척결의 대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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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이런 신관의 변화에 대한 것은 사회인류학자 에반스 프리챠드 (E. E. Evans-Pritchard가 쓴 [Theories of Primitive Religion]. Oxford: The Claredon Press, [1965] 1971. 을 참조하십시오. 122 페이지의 짧은 책이지만 원숙한 인류학자의 빛나는 강의가 숨결처럼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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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유일신론적 절대성은 이스라엘 신의 가나안 정복, 기독교가 로마이 국교가 되면서 형성된 한 황제 (로마제국), 한 종교 (기독교)라는 절대성, 그리고 이슬람의 알라가 갖는 절대적 권위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절대적 신은 어쩔 수 없이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이워론적 사상을 배태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네 종교가 이원론적 사상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하실 수 있지만, 이들 종교가 만들어 낸 신념체계 또는 문화는 이원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바로 조로아스트교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고 봐야지요.
>
>이런 종교들은 강력한 종교적 자기 정체성 (self-identity)를 갖추고 있으므로 자기 종교적 경계 또는 울타리가 매우 강하고, 이 종교에 대한 신도들의 봉헌 또는 헌신 (commitment)의 정도가 어떤 종교보다 강합니다.
>
>이런 종교적 헌신이 다른 문화로 전이될 때 이것을 우리는 선교라고 합니다. 물론 불교 역시 역사적으로 이런 선교적 열의가 강한 적도 있었지만, 이들 유일신교에 비해서 상당히 낮습니다. 이런 선교적 열의가 강한 종교는 성장을 잘합니다. 기독교에서 보면, 소위 진보적, 자유주의적 교파는 교세가 줄고 근본주의적 종교가 득세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몰몬교나 여호와 증인 같은 것도 이런 근본주의적 신념체계를 갖추고 있으므로 강한 성장세를 보이지요.
>
>이런 유일신관은 신도들의 열성도 있지만, 이런 열성들이 자기들이 신봉하는 신 개념에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속성을 부여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고상하고 절대적이고, 순수한 속성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지고한 모든 것을 신에게 투사해서 자기들의 신념을 고수한다는 것이지요.
>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단기 선교를 갔다는 것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이런 종교의 자기 정체성, 헌신, 그리고 배타적인 신관념이 사회적 표현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합니다.
>
>따라서 이 세상에 이런 종교적 비극과 갈등이 해소되기 위해서는 종교가 세속화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또 다른 말로 선교에 대한 이해를 달리해야 하는데 그러한 변화의 가능성은 0%일 것이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종교와 정치가 결합되는 종교의 폭력, 또는 선교적 열정이 만들어 내는 종교 신념체계의 제국주의적 확장은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세속화된 유럽이나 캐나다의 성공화와 연합교단과 같은 진보적 교단이 화해의 신학, 대화의 신학, 평화의 신학을 주창한다 하여도 현실적으로는 이것은 작은 목소리, 아니 목소리가 점점 작아질 것이라는 가능성이 저를 점점 더 염세적으로 만들어 갑니다.
>
>기독교의 절대적 관념이 위험하듯이 이슬람 역시 무서운 종교입니다. 종교가 형성된 이후 단 한번도 순수히 종교적인 것만이 고립된 채로 존재하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종교와 문화, 종교와 정치, 종교와 예술은 인간 삶의 중요한 하나의 표현이었지요. 이런 면에서 이슬람과 기독교는 정치적 종교라는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종교다원주의를 가르치거나 기독교 신학자가 부다상에 참배했다간 당장 학교에서 쫓겨 나듯이, 북미의 세속화된 하바드나 프린스튼 같은 데서 가르치는 역사학자나 종교학자가 이슬람 비판했다간 살해위헙이나 테러위협을 당합니다.
>
>이런 못된 종교들 틈새에서, 어떤 이데올리기 (종교신념을 포함해서)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합리적 사고와 열린 마음이 중요하지요. 자기 신념이 변화될 수도 있고, 비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열어 놓는 것은 저 아래서 강현님과의 대화에서 언급한 과학 철학자 칼 포퍼가 지향한 것이었습니다.
>
>우리가 어떤 종교를 갖고 있든 이런 태도를 가진다면 세상은 그렇게 부정적인 것마은 아닐 것입니다.
>
>몇마디 두서없이 적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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