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택시운전사'다.
영어제목은 A Taxi Driver 다.
로버트 디니로와 조디 포스터가 열연했던 Taxi Driver 와는 부정관사 'A' 가 붙느냐 안 붙느냐 차이로 구별된다.
상영관에 들어 온 관객 대부분은 한국사람들 같았다.
상영시간이 두 시간이 훨씬 넘는 비교적 긴 영화였다.
두 시간이 넘는 영화 대부분은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라도 어느 순간 지루함을 느낄 때가 있는데
택시운전사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택시운전사가 잘 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영화에 진영논리를 가져다 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진보진영판 '국제시장'을 본 느낌이라고나 할까?
우선 감독이 보안사 요원들과의 추격신을 왜 그토록 황당하게 묘사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장면들 때문에 말미에 영화가 삼류오락영화가 되어버린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큐멘터리 영화가 아닌 이상 상황묘사에 픽션을 가미하거나 modifying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개연성이 있어야 하고,
특히 사건의 핵심에 해당하는 순간에 대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은 신중하면서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사건은 5 월 21 일 오후에 있었던 도청앞 집단발포사건이다.
영화에서는 이 사건 직후인듯한 상황을 묘사하면서
계엄군이 도청 방어라인을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총상을 입고 도로에 쓰러져 있는 부상자들을 구하려는 시민들을 조준사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서울택시운전사 주인공 송강호와 광주택시운전사들은 매우 용감하게도 계엄군 저격수들의 사로 안으로 택시를 몰고 들어가 택시로 엄폐물을 구축한 후 부상자들을 안전지대로 끌고 나온다.
감독은 평범한 소시민 '이자 이방인 '서울택시운전사'가 비극적인 현장경험을 통해 관찰자가 참여자로 변화한 극적인 순간을 묘사하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장면이 감동적이든 어쨌든 관계없이 '중요한 순간을 modifying 했다는 이유를 들어 전두환 측이 소송의사를 제기함으로써
당시 도청 일대에서 집단발포후 소강상태에서 조준사격이 있었으냐 없었느냐 하는, 부차적인 논쟁으로 시간을 낭비하게 생겼다.
조준사격 여부에 대한 이의제기를 하려면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이나 현장 지휘관이었던 11 여단 61 대대장 안부응이 하는 게 정상이다.
지금까지 '자기는 지휘계통에 없었기 때문에 책임없다'는 주장을 되풀이 해 온 전두환이 이제와서 왜 중뿔나게 나섰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집단발포사건 진상규명의 핵심은 조준사격 여부가 아니라,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개시한 이유가 무었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영화평론을 하려고 자판 두드리기 시작한 게 아니지만
영화가 집단발포사건의 후속장면을 묘사하다가 전두환 측으로 부터 엉뚱한 시비를 받고 있으니 쟁점의 중심을 제 자리로 돌려 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도청앞 집단발포사건의 원인과 이유에 대해서는 정파에 따라 상이한 가설과 주장이 난무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국 국무부 기밀해제문서와 당시 현장상황을 관찰자 입장에서 면멸하게 목도한 외신기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압축한 설득력있는 가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육군 보병사단 결전부대 (당시 육군 제 20 사단, 현재의 육군 제 20 기계화보병사단) 61 연대의 도청진입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집단발포는 우연히 발생한 게 절대 아니고 결전부대를 지휘통제할 수 있는 작전권자가 계획하고 명령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당시의 20 사단 61 연대는 현재는 61 여단으로 부대단위가 격상되었으며, 도청앞 집단발포의 주범으로 지목된 부대인 11 공수여단 61 대대와는 다른 부대이니 혼동하면 안된다.
여기에는 편제상 시위진압에 적합하지 않은 특전사 소속 부대들 대신 시위진압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은 수도권 충정부대인 결전부대 (사령부가 경기도 양평에 있었다) 를 교체투입하려는 신군부의 판단과 의사가 반영되어 있지만,
한미연합사의 지휘를 받을 필요가 없는 특전사 소속부대와는 달리 한미연합사의 지휘를 받는 결전부대 투입 결정과정에는 그 부대의 지휘통제권한을 보유하고 있었던 미국이 소극적 승인 이상의 역할을 했다는 서류증거들 역시 폭로된지 오래다. 백악관이 승인을 한 것은 물론이고 작전수립 역시 개입하거나 지휘했을 가능성이 압도적이라는 이야기다.
이 가능성이 압도적인 근거는 10.26 사태 이후 지미 카터 행정부가 비밀리에 가동한 한국사태비상대책반이 작성한 극비문서 Cherokee File 인데,
이 문서에 따르면 신군부의 군병력 운용에 대한 승인 계획을 5.17 비상계엄확대조치가 실시되기 열흘 전인 5 월 7 일부터 수립한 것으로 되어있다.
대첵반은 국무장관이 직접 지휘했고, 한미연합사를 통제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정책담당관들과 미국군 합참본부의 장관급 장성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대책반을 수립한 국무장관은 사일런스 밴스이지만 그는 그 해 4 월 말 이란대사관 인질구출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므로 광주민주화운동 국면에서 이 조직을 지휘한 책임자는 후임 국무장관 에드먼드 머스키다.
한국 육군 결전부대를 진입시키는데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면, 그 명령은 반드시 한미연합사령부를 통해 하달되었다고 봐야 한다.
수송용 헬리콥터가 도청 일대로 병력을 전개하는데 필요한 공간이란 두 말 할 것도 없이 도청 옥상과 도청앞에 있는 주도로인 금남로였을 것이다.
따라서 금남로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시위군중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소개시키라는 명령은 결전부대 투입작전의 한 부분으로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과적으로 결전부대는 투입되지 않았다. 11 공수여단 61, 62 대대가 주력이었던 도청방어 계엄군은 집단발포 직후 금남로를 장악하고도 한동안 머물다가 오후 네 시경 또다른 사상자를 내면서 엄호사격을 해가며 차량편으로 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새 부대 투입 대신 일단 전 병력 철수로 작전을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가설 (결전부대 투입 공간확보를 위해 집단발포)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도청앞 집단발포의 원인으로 주장되었던 '우발적 충돌설'과 '신군부 수뇌부의 명령설'은 둘 다 폐기 또는 수정되어야 한다.
미국정부는 더 이상 배후나 소극적 승인자 정도가 아니라,
신군부와 함께 발포명령과 민간인 학살의 공동정범으로 새로 지목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