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난감(大略難堪)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까지 되어보니, 되려 더 잘 보이고 잘 들렸다
먹먹한 시야로 흔들리는 풍경의 매듭마다 덥수룩한 수염이 자라나고,
마을 입구에서 의젓하게 짖어대는, 개 주둥아리의 목청도 오늘은 유난히
낭낭했다
등에 땅을 깔고 누워서 편지를 전하러 오는 우체부를 기다리다가,
그가 오기까지 딱 백 번만 물구나무서기를 하기로 한다
그건 생뚱하니 고된 일이지만, 그에 대한 예우의 표시이기도 하다
한 번은 아무 것도 안 하고 멀뚱하게 있다가 그에게 야단을 맞고,
머리에서 뜨신 김 오르게 토끼뜀을 열 나게 뛴 적도 있었다
아무 노력의 댓가 없이 무얼 바라는 건 도둑놈이나 할 짓이라는 핀잔을
억수로 퍼붓는 소나기처럼 들으며...
저 번의 편지엔 뜬금없이 깊은 어둠을 드러낸 섬이 바다에 떠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바다로 넓게 트인 방이 되어 환한 창문을 열어야 했다
또, 밝은 창문을 엄청 미워하는 밤의 거센 바람 소리도 들어야 했다
청맹과니에 농인(聾人)까지 된 오늘은 이것 저것 보고 들을 일 없으니,
그 어떤 나쁜 소식을 전하는 편지라고 해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편지봉투에 압착(壓搾)된 우표처럼
복지부동의 자세로 땅바닥에 붙어있으면 될 뿐
그런데, 혹여 좋은 소식이면 어쩌나? 갑자기 눈과 귀가 가려워진다
꽤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겨냥하는 우체부가 아무도 모를 소식을
전하러 온다, 아니 이미 대문 앞에 거의 다 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갑자기 용변이 급해진다, 조바심치고는 가장 불길한 것,
안 보이고 안 들린다고 해서 마음 편한 신세는 결코 못 되는 것이다
신경계통의 예민한 길 위에서 파아란 글자와 숫자가
느닷없이 솟아난다 내 흉칙한 보금자리의 주소가 된다
그것도 새로 바뀐 도로명 주소로, 더 헷갈리게 만드는,
첨단의 불편한 주소로 뚝딱 문패를 단다
이제, 어쨌던 우체부는 어김없이 도착할 것이다
내가 부끄럽게 볼 일을 보는 시각이라도,
대략난감하게...
- 안희선
<시작 Note>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난감한 상황이 어디 한 둘이겠느냐만
이따금, 본래의 자기로 부터 벗어난 일탈(逸脫)의 존재로서 자리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대체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혹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부득이 하게 장님도 되고,
귀머거리도 되고, 한꺼번에 맹盲 . 농聾人도 되는 - 이를테면, 상징적 비유로서 말하자면)
그럴 때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자기 정체성(正體性)의 결핍 같은 거와
그에 따라 치루어야 할 댓가로서의 고통 같은 게 있을까
반드시, 있는 것이다
최소한, 지금까지 살아오며 내가 맛 본 삶에 의하면...... 그렇단 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