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무기 사용의 위협으로 오늘 한반도는 또다시 130년 전 주변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는 꼴이 될까 염려된다. 따라서 한반도 중립화론의 원조인 유길준의 주장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구글링하여 수집한 한반도 중립화에 대한 여러 자료들에 나의 생각을 첨가해서 소개한다. [특히 박노자 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너무 흡사해서 그 분의 글을 약간 수정해서 그대로 전달한다. 이 점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한반도 중립화론은 한국 근대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실제로 한국 근대사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 역사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그 전에는 수많은 서양 열강들의 이권 각축전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이제이 (夷以制夷)라며 다른 서양 열강들에 의존하는 데 매몰하는 지배층의 경향까지 내비치기도 하면서 우리나라의 의존성은 극에 달하였다. 우리의 민족성이 그랬었는지, 아니면 사상적 문화가 기반하였었는지, 또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는지 많은 궁금증이 가시질 않는다.
한반도 중립화론이 등장하게 동기와 목적은, 주변 강대국들의 이권다툼형의 간섭에서 독립을 유지하는 방편으로서 중립화는 남북한의 자율적인 결정이 되어야 하며, 남북한이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이해조정의 주도권을 쥐고, 한반도의 정치적-경제적-외교적-군사적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한반도 중립화론이 거론된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일본 정부가 제의한 국외중립론, 1884년 갑신정변 직후 독일의 총영사 대리 부들러가 조선 정부에 권고한 영세중립론, 1885년 거문도사건 직후 다변적인 세력관계 상황에 착안해서 유길준이 제기한 중립화론, 청일전쟁 이후 승전한 일본과 러시아가 각축을 벌이던 시기에 제기된 것으로 미국인 고문 샌즈가 조선 정부에 권고한 스위스 모형의 영세중립론, 1900년 의화단사건 직후 일본·러시아 사이의 협정 과정에서 러시아 정부가 추진하려 한 러·일·미 3국 보장 하의 한반도 중립화안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고비로 한반도가 일본에 예속되는 과정을 밟게 됨으로써 이 시기에 제기된 한반도 중립화론은 모두가 무위의 공론이 되고 말았다.
중립화에 대한 기회가 물러간 직후 한국은 경제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인 파국에 치닫게 된다. 방곡령에 목숨 걸고 강국들의 전쟁이 무려 두 번이나 국내에서 일어나는 등 지배층은 위기를 보자 가까스로 중립화론을 마련하기에 이르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열강의 이권 침탈은 이 떄부터 본격화 되어, 점차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점령 야식이 그러한 이권들을 잠식한다. 누구보다 서세동점의 세를 빨리 알아챘던 일본이었다. 그들은 서양 열강들의 신속하고도 은밀한 협약을 진행해갔고 한국은 몸 둘바도 모른 체에 국가의 주권을 빼앗기도 만 것이었다.
중립화론이 받아들여졌다면 어땠을까. 한반도가 지난 세월의 풍파를 견디고 그 자리를 지켜온 나라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런 지정학적인 위치가 한국인의 독자성에 더욱 빛을 발하게 하지 않았을까. 실패한 중립화론에 의해 한국은 실제로 자신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만큼, 독자성과 자주성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 적어도 의존에서부터 비롯된 배타의식, 추종이 또 다른 차별을 낳고, 또 다른 서열화를 낳게 되듯이 그렇게, 한국의 모습도 또 다른 배타의식과 선민의식으로 그리고 성리학에 너무나 권태스럽게 몰두하다 드러난 독립과 변화라는 개념이, 끊임없는 개화 지식인들의 선례에 대한 학습을 방해해 왔다. ‘우리는 이렇다’라는 보수적 개념이 결국 새로운 인재와 시대의 진정한 열쇠임을 망각하게 했고, 많은 개화지식인들을 죽게 했으며, 전쟁과 분단으로 오늘의 한반도 정세를 만들었다
1950·60년대의 중립화 통일론
사실 한국 공론의 장에서 한-미 안보관계가 성역화되고 한-미 동맹에 대한 일체의 수정론들이 모두 용공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시대와 그 이후의 일이다. 한국 정치를 후퇴시킨 박정희가 대미 안보관계를 신성 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어 이 분야에 대한 현대적인 비판적 사고를 원천 봉쇄하기 이전에는 한-미 안보관계의 근본적 수정을 전제로 하는 중립화 통일과 같은 주장들을 흔히 들을 수 있었다.
미군 철수를 전제로 하는 한반도 중립화론을 처음 제기한 것은 1948년 미소공동위원회의 일부 참가자와 6·25 동란 이후의 국무장관 덜레스 등의 미군 관변쪽이었다. 동서 양 진영의 틈새에서 중립을 지키는 오스트리아나 핀란드 등을 한반도를 위한 모범으로 제시한 1950년대 미국의 한반도 중립론자들은, 일단 남한의 극우 반공 체제의 지원·유지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미국쪽 비용을 줄이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1950~70년대에 함께 중립화 목소리를 높였던 재미·재일동포 학자·언론인의 논리는 폭력적인 분단 체제를 극복하고 평등한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정치 공론의 공기가 맑아진 4·19 혁명 이후의
서울에서도 세계 공산주의와 독점 자본주의의 폭력을 모두 제거하는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은 대학교 시국토론회와 심포지엄의 인기 토픽이었다.
남북한 간 통신의 두절이 바로 인간 기본권 침해라는 사실도 많이 거론됐다. 국제
인권법의 논리를 생각해보면 50년 넘게 한반도의 반대쪽에서 사는 친척들과 한장의 편지도 주고받지 못하는 이산가족들이
그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남북한 양쪽의 정권들을 국제 법정에 제소할 수 있는데, 분단 체제의 규율이 내면화된
상태에서 감히 상상조차 못하는 대목이다.
2공 당시의 비소비미(非蘇非美) 자주노선과 평화통일의 기수는 혁신계의 대변지 <민족일보>였다. 5·16 이후 군부에 의한 야만적 유혈 숙청으로 혁신계가 몰락하고 나서 국내에서 중립화 통일을 이야기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반공, 즉 비이성적 친미와 무조건적 반북은 말 그대로 제1국시이자 일제의 장교 박정희가 한국 땅에서 재현한 현대판 제국이 되고 말았다.
물론, 2공 시절 혁신계의 중립화 통일 주장에는 다소 관념적 측면이 없지 않았다. 현재 같으면 어떤 형태의 통일도 남한 위주로 이루어질 것이 상황의 논리인데, 현재와 반대로 북한 경제가 우월했던 1960년대 초기에 과연 이북의 지도자들이 중립적 통일을 진행할 의사가 있었는지 의문을 가져볼 만하다. 어쨌든, 미국이 혈맹 그 이상의 혈맹이 돼버린 1961년 5월16일 이후의 한국에서는 중립 주장이 곧 반국가 범죄쯤을 의미하게 됐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극우 체제하에서 학교마다 학생들이 근대 한국 중립화 논리의 원조를 한국 개화의 선각자를 통해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다름 아닌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다.
유길준이 걱정한 러시아의 남하
1885년 12월, 조선 사상 최초의 도미 유학생 유길준은 갑신정변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자마자 정변 연루 혐의로 연금 조치를 당한다. 일본·미국 신문을 통해 그가 이해한 조선을 둘러싼 국제적 상황은 그야말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으로 전통적 종주국 청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고 예속화 정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성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민씨 척족 위주의 수구파는 철저하게 친중국적 성향을 지킨다. 또 한편으로는 기존의 동아시아 패권국가 청나라에 대한 도전세력으로서 연해주 경략에 큰 힘을 쓰는 러시아와 부국강병을 이루어가는 일본 등이 부상한다. 한반도가 동아시아에서의 헤게모니 싸움의 터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나라를 보존하는 묘책이 무엇일까 미국에서 국제법적 개념으로서의 중립에 대해 충분히 공부한 유길준은 한반도 중립화를 보국(保國)의 묘안으로 제시한다.
1885년 말께 그가 쓴 <중립론>의 주요 문제의식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어떻게 막는가였다. 그는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극동지역의 두 신흥세력 중에서 러시아를 훨씬 더 큰 위협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공로의식(恐露意識·러시아에 대한 무조건적 두려움)이야말로 일본의 당국자들이 중국·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열심히 주입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견해에 문제가 있다 해도 당시의 시무책(時務策)치고 그의 세계 대세론은 대단히 현실적이었다.
예컨대, 고종을 비롯한 당대의 수많은 정치 거물들이 미국을 천하에 가장 공평한 나라로 보고, 위급할 때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유길준은 그 기대들을 일축한다. 경제적 이득만 챙기려는 미국과 통상은 할 수 있지만 더 이상의 도움은 기대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그의 예측은, 미국의 필리핀 식민화에 대한 일본의 인정을 대가로 조선의 식민화를 허락해준 1905년에 그 정확성을 인정받았다. 유길준은 곧 다가올지 모를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지켜줄 세력은 미국이 아닌 기존의 종주국인 중국으로 보았다.
그러나 조선에 미리 중국 병력을 주둔시키는 것은 긁어서 부스럼 격으로 침략 세력을 자극하는 부작용밖에 낳지 않을 실책이므로, 조선이나 중국으로서 가장 적절한 계책은 다름 아닌 조선의 영구 중립화라는 것이 유길준의 지론이었다. 즉 중국의 주도 아래 일본·러시아·영국·프랑스 등 조선에서 이권이 있는 당사자들이 회동하여 다같이 조선의 영구 중립을 조건으로 조선의 자주와 평화·안정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유럽의 벨기에 등의 약소국처럼 조선이 침략으로부터 국제법적 보호를 얻는 동시에 중국은 형식상의 속국에 다른 열강이 쳐들어오지 않을 보장도 받으며, 다른 열강들도 여러 현실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주변 강대국들 틈에서 간섭을 피하고, 자율적인 독립을 찾는 길
연금 중의 불온 인물 유길준이 발표조차 하지 못한 그의 <중립론>은 당시의 국내외 상황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중국과 민씨 척족의 집권세력들이 그대로 현실에 안주하는 반면, 고종의 일부 측근들은 러시아나 미국의 보호를 갈망하는 등 중립보다는 단순한 대외의존을 지향했다. 그러나 외세에 의존해봐야 침략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중국과 러시아가 일본으로부터 패배를 당한 뒤에야 분명해졌다.
130년 전에 한반도에서 중국이 누린 헤게모니를 지금 미국이 누리고 있다. 갑신정변 진압 이후에 군대를 철수한 중국과 달리 미국은 군대를 주둔시켜놓고 있다. 130년 전 기존의 헤게모니에 도전장을 던지는 세력이 러시아와 일본이었다면, 오늘날 그것은 중국이 되고 있다. 배역이 달라졌지만, 한반도가 여러 제국주의 세력들의 각축의 무대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은 그대로다. 기존 국제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도전세력을 자극할 수 있는 기존 패권국가 군대의 주둔을 피하고, 열강의 틈새에 놓여 있는 한반도를 중립화해 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 유길준과 1960년대 혁신계의 중립화 통일 논리였다. 그 논리에 비현실적 요소가 있다 치더라도 일단 한반도의 진정한 자주·독립의 보장을 핵심으로 하는 그 아이디어가 적어도 다시 공론화될 가치는 있지 않을까 유길준의 생각을 무시해버린 130년 전 통치자들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반복하지 않았으면 한다."
(출처: 박노자 오슬로국립대학 교수 http://h21.hani.co.kr/arti/COLUMN/33/72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