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문로를 사이에 두고 경복궁쪽 동네가 통의동이고 인왕산쪽 동네가 통인동이다.
통인동 주변에는 누상동 옥인동 체부동 등 작은 동들이 많다.
골목 하나 사이를 두고 동이 바뀌는 바람에 어디가 무슨 동인지 구별하기가 쉽지않다.
우리은행 효자동 지점을 기준으로 대강 북쪽이 통인동 옥인동이고 남쪽이 체부동, 서쪽이 누상동이다.
박노수 미술관은 옥인동, 윤동주 하숙집터는 누상동, 이상의 집은 통인동, 육영수가 배화여고 유학시절 머물렀던 부친 육종관의 넷째 걸프랜드 큰 개성댁 집터는 체부동에 있다.
서촌이라고 부르는 이 동네에는 일부러 찾아와서 먹어볼만한 명가의 음식들이 많다.
그 중 하나는 삼계탕이고 다른 하나는 기름떡볶이다.
서촌 체부동의 삼계탕 집은 노무현 전 대통령 때문에 더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그런 것하고는 상관없이 그 전부터 지역주민들에게 명성이 자자하던 곳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이 삼계탕집을 처음 소개한 사람들은 아마도 1990 년대 중반 꼬마민주당 소속 종로구 출신의 활동가들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 바람에 상업화되어 국물맛이 다소 천박해 졌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다.
나는 1989 년 당시 광화문 사무실에서 도보거리에 있는 이 식당에 몇 번 찾아 간 적이 있다.
28 년 여 만에 다시 찾은 이 집의 국물 맛이 예전처럼 심심하지 않고 좀 강해진 느낌이 들긴 들었다.
명가 음식의 특징은 간단하다.
첫째, 세월이 지나도 맛에 변함이 없다.
둘째, 맛이 강하지 않고 담백하다,
셋째, 먹고나서 포만감이나 부담감이 덜하다.
명가의 음식이라고 해서 경천동지할 정도로 특별한 맛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처음 먹는 사람들이나 조미료 입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이게 뭐지?' 할 정도로 전혀 특별하지 않게 다가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집들에는 수 십 년을 한결같이 찾는 단골들이 넘쳐난다.
다만 위 사진에 나오는 100 미터 정도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넘쳐나는 단골들'이라기보다 소문을 듣고 전 세계에서 벌떼처럼 모여든 여행자들이다.
통인시장 기름떡볶이라는 음식도 그렇다.
기름과 간장 또는 고춧가루로만 볶은 이 떡볶이는 오로지 통인시장에만 있다.
이 떡볶이 집의 역사는 약 60 년에 달한다. 분위기 자체에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다.
그 중 한 집에 특별한 사진이 붙어있었다.
나는 한 눈에 그 사진의 주인공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동양사람은 김성 전 주한미국대사이고 그 옆에서 열심히 떡볶이를 먹고 있는 사람은 존 케리 전 국무부장관이었다.
주인 할머니는 무슨 이유로 저 사람들이 이 집에 와서 떡볶이를 먹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이야기해줬다.
김성 씨는 꼬마시절 통인시장 기름떡볶이집 단골고객이었다.
그가 40 여 년 만에 주한미국대사가 되어 한국에 부임한 후 통인시장 떡볶이집들을 다시 찾게 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웬 서양사람들을 데리고 통인시장에 불쑥 나타났다. 한국을 방문 중었던 국무장관 일행이었다.
국무장관과 미국대사 일행이 떡볶이를 먹으러 들이닥쳤던 그 날, 통인시장의 동서 양방향 출입구는 봉쇄됐고 경찰특공대와 중무장경호원들이 떡볶이집 주변을 에워쌌다. 암튼 그 이후로 이 가게에는 주한미국대사관 사람들이 단골이 되어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게 주인인 정 할머니는 김성 씨가 꼬마시절 통인시장 떡볶이 단골이었다는 사실만 알고 계셨을 뿐, 그의 아버지가 누구이며 왜 그가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쫓겨갈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계셨다.
내가 그 사연을 설명해 드리자 몹시 놀라워 했다.
김성 씨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3 학년을 마치고 아버지 김기완 씨가 주일공사로 부임하자 도쿄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다. 알려진대로 그의 아버지 김기완 씨는 1973 년 8 월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및 살해미수사건을 현장지휘했던 책임자였다. 그는 작전이 실패하고 정보가 노출되자 이 사건의 전모를 당시 주일 CIA 지부장이었던 도널드 그레그에게 모두 털어놓고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먕명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성 씨가 미국 외교정보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데는 미국 당대 해외첩보공작의 일인자 도널드 그레그와 자기 아버지 김기완 사이에 맺어졌던 인연의 역할이 컸다.
조금 의아한 점이 있기는 했다, 통인동에서는 꽤 먼 성북동에 살았고, 종로구가 아닌 동대문구에 소재한 사립학교인 은석초등학교에 다녔던 그가 어떻게 통인시장 기름떡볶이집의 꼬마단골이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정 할머니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사람의 입맛에 대한 기억이란 참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떡볶이를 열심히 볶고 있는 저 아주머니는 가게 직원이 아니라 손님이다. 타이완에서 왔다고 한다.
무슨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싸르니아는 한국에서 여핼할 때마다 타이완에서 온 여행자들하고 곧잘 만나 어울리게 되곤 한다.
나는 간장 떡볶이 1 인분만 시켰었는데 결국 고춧가루 떡볶이와 깻닢전 하나를 공짜로 얻어먹게 되었다.
나는 그저 깻닢전과 빨간 떡볶이 맛은 어떠냐고 물어보았을 뿐인데 결국 깻낲전 하나와 고춧가루 떡볶이 열 개가 내 접시 위에 놓였다.
맛집 블로그나 TV 먹방에서 부풀려 놓은 엉터리 맛집이 아닌, 진짜 음식의 명가들에는 역사와 함께 사연이 숨어있다.
그런 명가들은 반드시 수 십 년이 지나도록 그 집을 찾는 무시 못할 숫자의 충성단골들이 존재한다.
그 단골 중에 유명인들이 있으면 그 식당들은 결국 상업적으로 뜨기 마련이지만, 중요한 것은 유명인이건 뭐건 그들도 이미 그 집들의 수 십 년 단골들 중 한 사람이었을 뿐 이라는 점이다.
서촌에서 만난 이 두 집도 음식의 명가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배고플 때 가면 아무데나 다 맛집이지만, 이 두 집은 별로 배가 안 고플 때 가서도 음식을 싹싹 비우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심심하고 시간나실 때 한 번 쯤 방문해 보실것을 권유드린다.
체부동 삼계탕집에서 반주로 나오는 인삼주를 곁들여 삼계탕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도보 5 분 거리에 있는 통인시장으로 이동해 기름떡볶이를 후식으로 먹으면 된다. 길건너 통의동에 가면 역시 오랜 전통을 이어 온 떡집이 있는데 이 곳에서 팥빙수로 깔끔하게 마지막 입가심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