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이 북측이 발사한 어뢰에 의해 폭침됐다고?
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무덤속에서 튀어나온 망령처럼 다시 나타나 대한민국 하늘 아래 떠돌고 있다.
한국 일부 여론이 북 특사단의 남하를 극력 반대하고 있는 모양인데, 고위급 특사 중 한 명인 김영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특사단의 최고 책임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천안함 사건 당시 대남 비정규전을 총괄지휘하는 정찰총국 책임자였다는 이유에서다.
북측이 남북접촉을 징검다리로 북미화해를 시도하고 있는 이 아슬아슬하고도 중대미묘한 국면에, 만일 그들이 천안함 사건에 책임이 있다면 말썽의 소지가 있는 '사건의 책임자'를 남으로 내려보낼리는 만무하다. 적어도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는 스스로 결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를 내려보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선 한국의 보수진영이 남북화해에 반대하고 문재인 정부를 궁지에 몰기 위해 천안함 사건을 들고 나왔다는 것은 지나가는 소가 폭소를 떠뜨릴만큼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천안함 사건은 2010 년 5 월 20 일 민군합동조사단이 진상조사결과를 발표한 이후 조사결과를 보강해 주는 증거보다는 그 진상조사결과가 엉터리임을 시사하는 반증이 압도적으로 증가해 왔었다.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여론이 흐지부지된데는 그 해 11 월 일어난 연평도포격전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연평도포격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만해도 천안함 침몰에 북코리아가 관련되었을거라고 믿었던 여론이 30 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 포격전 발발이후 무려 80 퍼센트로 치솟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나기 전, 당시 국민들이 합조단 발표를 믿지 않았던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 합조단이 발표한 진상조사결과라는 게 잘못된 질문에서 출발한 엉터리 대답이었기 때문이었다. 합조단이 유일한 증거물로 제시한 어뢰추진체 잔해에 생성된 흡착물질은 용의자로 지목된 북코리아의 행위를 증명하는 필요조건을 만족시키는데 완전히 실패했었다.
당시 합동조사에 참여했던 해외전문가들은 한국측이 어디선가 주워 온 '1 번 어뢰추진체잔해'의 흡착물질에 대한 과학자로서 자신들의 솔직한 견해를 최종보고서 부록에 올린 바 있다. 즉 어뢰추진체 흡착물질이 폭발의 결과로 생긴 산화알루미넘이 아니라 바닷물속에 오래 잠겨 있으면서 생긴 수산화알루미넘이라는 결론이 그것이었다.
합조단에 속한 과학자들이 조사는 ‘과학적’으로 했는데 합조단이 조사결과 발표를 ‘정치적’으로 한 문제에 대해 비난과 재조사 요구가 빗발치는 가운데 사건 당사자인 한국 국방부가 어뢰추진체 잔해에 붙어있던 조개껍질에 묻어있는 침전물을 제거해 버리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유일한 증거물'이 사건과 관련이 없는 역증거로 뒤바뀔 수도 있는 근거에 대한 당시 한국 국방부의 중대한 증거인멸행위는 그 해 11 월 초에 저질러졌다.
다른 대부분의 정황과 조건들이 합조단의 '공식적' 진상조사결과를 부정하고 있던 판국에 그들이 유일무이하게 내놓은 증거인 어뢰추진체 잔해마저 사건 연관성에 대한 과학적 증명이 실패했음은 물론이고 그 증거의 채택과 보존 절차에 치명적 오류가 발생했다면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린데 천안함 미스테리 의혹은 그로부터 19 일 후에 일어난 연평도 포격전을 계기로 더 이상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나서 천안함이 북측의 어뢰공격에 의해서 침몰됐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여론이 80 퍼센트까지 올라갔다. 적어도 천안함 사건에 관한 한 대한민국이 하루아침에 봉숭아학당으로 전락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은 민간인 선원들과 해군 구조대원을 포함해 모두 50 여 명의 인명이 희생됐을 뿐 아니라 1964 년 8 월 2 일 발생한 통킹만 매독스호 어뢰피격사건과 유사하게 전쟁위기를 촉발하는 기능까지 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영구미제사건으로 남겨져서는 안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싸르니아는 지금으로부터 8 년 전 '그 깜깜한 서해바다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 적이 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직전 조용히 눈을 감고 그날 밤 그 초계함의 진행항로를 다시 생각해 봤다.
기록에 따르면 그 초계함은 2010 년 3 월 26 일 오후 9시 21분 57초에 연화리 해안에서 2.71km 떨어진 해상을 항해하던 중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 그 때부터 갑자기 방향을 틀어 약 3 분 동안 서북쪽으로 607 m 더 항해했다. 오후 9시 25분에 연화리 해안에서 2.89km 떨어진 해상에서 초계함의 위치가 해군전술지휘체계 모니터에서 사라졌다. 이 초계함에 무슨 이상이 생겼던 것일까? 이 배가 갑자기 섬을 향해 항해를 시작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무슨 일인가를 당한 뒤 약 3 분 동안 서북쪽으로 607 m 이동하는 과정에서 침수가 시작된 이 포항급 초계함은 어느 순간 무게균형이 깨지는 바람에 함수와 함미가 둘로 쪼개졌다. 함미가 먼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함수는 조류에 밀려 떠내려 오던 중 긴급구조요청을 받고 현장에 달려온 고속정과 해경이 발견했다. 그때까지 물에 떠 있었던 함수 위에 몰려있던 승조원들이 해경에 의해 구조됐다. 구조 이후에도 함수는 계속 조류를 따라 떠내려가다가 백령도 남쪽 해안에서 약 2 km 떨어진 해상에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선체가 절단된 후 상당한 시간 동안 섬과는 반대방향으로 표류를 했는데도 그 거리가 2 km 에 불과했다는 것은 당초 이 초계함이 섬에 얼마나 가까이 근접했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초계함의 위치는 열상감시장비에 자동으로 기록될 뿐 아니라, 사고 순간을 포함한 항해경로가 KNTDS에 좌표로 나타났으므로, 군 당국은 처음부터 사고위치를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게 옳다. 다시 말해 군당국은 함수와 분리된 후 46 명의 승조원들을 안에 가둔 채 먼저 바닷속으로 사라진 함미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군 당국은 사고지점과 멀리 떨어진 해상에서 가라앉은 함미를 찾는다고 사흘 동안이나 시간을 낭비했다. 해군의 첨단수색장비가 사흘이 지나도록 못 찾았다는 함미는 어선이 어군탐지기로 수색을 시작한 지 수시간만에 찾아냈다.
‘어떻게’ 보다 ‘누가’ 에 집착하다 보면 당연한 의심도 묵살하게 되고 자기가 믿고자 결론에 도달하는데 유용한 정보들만 선택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지금은 누가 그 사건을 저질렀느냐 하는 걸 따질 단계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합조단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인 어뢰추진체 잔해는 잘못된 증명과정과 잘못된 증거보존절차에 의해 그 증거능력을 상실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1 년 동안 시간낭비를 한 셈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이 사건 재조사를 시작해야 한다.
북측을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분노하는 건 이해가 간다. 그러나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인 증명절차에 의하지 않고는 함부로 그 분노를 드러내서도 안 될 뿐 아니라 함부로 의심조차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금 합조단이 손에 움켜쥐고 있는 ‘녹슨 잔해’는 결코 진범을 굴복시킬만한 무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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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내가 2011 년 3 월 말 경, 한국의 어느 인터넷매체에 올렸던 글이다. 천안함사건을 전후해서 급변하고 있었던 당시 미국-일본-중국 간의 심각했던 관계변화를 천안함의 주변정황으로 해석했었다.
마음을 비우고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간단하고 소박하게 이런 질문부터 해봤다. 천안함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가장 이득을 본 집단과 가장 손해를 본 집단은 각각 어디일까?
내가 찾은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결과적으로 대박에 가까운 이득을 본 집단은 미국의 오바마 정권이다. 반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을 정도로 손해를 본 집단은 천안함 사건 당시 일본의 집권세력이었던 하토야마 정권이다. 아마 이 답변에 토를 달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천안함 사건덕분에 대일본 통제시스템 붕괴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 미국이, 이 사건에 대한 초기접근부터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더니 지금은 잊어버리고 싶은 귀찮은 존재처럼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아예 피해당사국인 대한민국의 눈치 없는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의 ‘천’ 자만 꺼내도 벌컥 짜증을 내는 형국이 돼 버렸다. 왜일까?
당시 백악관과 하토야마 정권간에 벌어졌던 갈등의 본질이 후텐마 해병대 항공기지 이전 문제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후텐마 기지이전문제는 그야말로 갈등의 현상 중 피상적인 한 부분에 불과했다. 백악관과 하토야마 민주당 정권은 오히려 이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를 상대방을 가격할 도구로 사용했다 뿐이지 애당초 이 기지 이전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양측의 긴장감이 조성됐던 것은 아니다. 그런 관점은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해석은 가능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후텐마 기지이전 문제’란 상대방을 가격할 칼이었는데 천안함 사건 이전에는 그 칼자루를 하토야마 정권이 쥐고 있었고, 천안함 사건 이후에는 갑자기 백악관이 쥐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일 두 나라간에 조성된 긴장과 갈등은 무슨 군사기지 이전 문제 따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보다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것이었다. 일본 민주당 정권은 안보-외교전략의 대전환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 골자는 ‘일본의 의지에 따라 일본의 평화를 지킨다’는 개념을 토대로 ‘미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의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 방편으로 미국과의 동맹보다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과 전략적 유대를 강화하는 외교 혁명을 추진해 나가고 있었다. 물론 하토야마 정권의 아시아 중시 외교가 1940 년대의 대동아공영권과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미국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미일관계는 2 차 대전 종전 이후 최악이라고 할 만큼 일촉즉발의 긴박하고도 위험한 국면을 달리고 있었다.
미국은 놀랍게도 갈등 현안에 대한 타결노력을 경주하기보다는 하토야마 정부의 축출을 목표로 한 정면돌파 공격작전을 구상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야 말았다. 하토야마 정권 8 개월을 전후해서 게재된 오바마 대통령의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몇 달 동안 부쩍 늙었다는 느낌이 오는데 이것만 봐도 양국관계의 심각한 국면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상황이 이랬는데도 당시 국내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기지이전을 둘러싸고 양국 관리들이 벌인 기싸움과 신경전 같은 쓸데없는 정보들만 나열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종-일 밀월과 미-일 갈등으로 동북아 정세지형이 뿌리부터 바뀌고 있었는데도 그 지각변동의 의미와 본질을 추적해서 해설한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으로부터 1 년 여 전, 다시 말해 천안함 사건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2009 년 12 월 9 일 오후 9 시. 백악관 상황실에는 분노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완벽한 도청차단장치가 설치된 이 방에서는 이미 퇴근을 했어야 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해서 미국 내 16 개 정보기관 총괄책임자인 데니스 블레어 국가정보국장,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마이크 멀린 합참의장, 커트 켐벨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등 안보관계 핵심 고위관계자들이 모여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비상대책을 논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같은 시간 일본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전대미문의 희한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었다. 백악관 비상대책회의가 열리고 있던 워싱턴 DC 보다 14 시간이 빠른 10 일 오전, 도쿄 나리타 공항과 하네다 공항, 그리고 오사카-간사이 공항에서는 다섯 대의 전세기가 세 군데 국제공항 활주로를 이륙하고 있었다. 세 군데 국제공항을 동시에 출발한 다섯 대의 전세기는 한반도 상공을 가로질러 서해바다를 건너가더니 약 세 시간 후 중국 베이징 국제공항에 차례로 착륙했다.
북경공항에 도착한 다섯 대의 전세기에서는 민주당 정권의 실세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을 비롯해서 그가 이끌고 온 143 명의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등 총 643 명의 일본 정치인과 고위관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정부는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에게 국가원수의 국빈방문 때나 제공되는 국빈용 방탄 리무진을 제공했고 나머지 방문객들과 수행원들을 수송하기 위해 수 십대의 고급승용차와 리무진 버스를 동원했다. 이윽고 수 십대의 공안사이드카가 앞뒤로 호위하는 가운데 기나긴 차량행렬이 저마다 경광등을 번쩍이며 북경시내에 있는 인민대회당까지 요란한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북경시내 거리의 시민들과 여행객들은 이 느닷없는 차량행렬이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멤버들은 중-일 동맹의 역사적 신호탄이 될지도 모를 이 날의 사건을 경악과 공포에 휩싸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2009 년 12 월 29 일 자 시사IN 보도에 따르면 오자와 일행의 북경방문 약 보름 전인 그 해 11 월 27 일에는 량광례 중국 국방부장이 일본을 방문해서 도시미 일본 국방상과 회담을 갖고 ‘중-일 해상합동군사훈련’ 실시를 비롯한 9 개항을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달 후, 량광례 국방부장은 북경을 방문한 오자와 간사장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군사 고위층 상호 방문, 안보 논의, 장교 및 해군함 교류' 등을 정례화하자고 제안했다.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위험수위를 넘을 정도로 악화된 시점은 2009 년 11 월 14일이었다. 그 전 날인 13 일에는 오바마 대통령과 하토야마 수상간의 정상회담이 있었는데 그 정상회담 역시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백악관은 이 정상회담 일정을 수단으로 삼아 하토야마 정권의 반미의지의 수위를 시험해 보려고 했다. 백악관은10 일로 예정된 군부대 총기난사사건 희생자 추모제를 이유로 방일 일정과 정상회담 날짜를 하루 늦추겠다고 갑자기 통고한 것이다. 양국의 시간차를 고려하더라도 희생자 추모일정 때문에 방일 일정을 하루 늦출 필요는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런 요구를 한 이유는 일본에게 지금 당장 미국과 아시아 중 하나를 택해보라는 협박이 섞인 경고 겸 시험을 해 보기 위해서였다.
사정은 이러했다. 방일 일정을 하루 늦춘다는 의미는 오바마 대통령의 일본출국 일자를 11 월14 일로 하루 연기하겠다는 의미였다. 하토야마 총리는 원래 13 일 오바마 대통령을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싱가포르로 먼저 출국 시키고 나서 그 날 저녁에 싱가포르로 출국할 예정이었다. APEC 정상회의는 14 일에 시작하므로 도쿄에서 싱가포르까지의 긴 비행시간을 고려할 때 당일 출발은 무리였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일정연기를 통고해 온 백악관의 의도를 간파한 일본 정부의 대응은 단호했다. 14 일에 일왕 방문일정이 예정돼 있는 오바마를 도쿄에 남겨놓은 채 하토야마 총리는 13 일 저녁 예정대로 출국을 강행해 버린 것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해석하면 외국의 국가수반을 자국에 남겨놓은 채 그 나라의 국가수반이 자기나라를 떠나버린 중대한 외교적 결례이지만 그 결례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미국의 무례한 협박성 질문에 일본 역시 무례한 거절로 답해버린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약 20 일전인 2009 년 10 월 23 일자 조선일보는 ‘미-일 충돌 일보직전이라는 제목아래 ‘우리를 협박하나 길들이나’ 라는 부제를 달고 양국간의 갈등 현안을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했다. 조선일보의 이 날 보도에 따르면 일본은 자위대 해외파병의 근거법인 PKO협력법을 개정하려 하고 있었다, 오카다 가쓰야 외상이 전날인 22 일 행한 어느 강연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대한 지원을 줄이는 대신 유엔의 승인을 받은 평화유지활동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법개정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하토야마 정권 출범 한 달만의 일이다.
불행하게도 미-일 간 불평등 군사-외교 시스템을 바꾸어보려고 시도했던 하토야마 민주당 정권의 행보는 오래가지 못했다. 민주당 정권을 일거에 파멸로 몰아 넣은 사건 두 개가 연이어 발생한 것이다. 그 하나는 민주당 정권의 두 축인 하토야마 수상과 오자와 간사장의 비서가 도쿄지검에 의해 전격 구속되면서 정치자금 수사가 시작된 것이고, 또 하나는 천안함 사건으로 인해 일본 내의 친미-안보 여론이 우세해 지는 바람에 후텐마 기지의 오키나와 밖 철수를 추진해 온 일본 정부의 계획이 무위로 돌아간 사건이다. 두 달 간격으로 발생한 이 사건들로 하토야마 정권은 치명상을 입었고, 결국 천안함 사건에 대한 민군합동조사단의 발표가 있은 지 딱 13 일 만인 2010 년 6 월 2 일 사퇴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퇴하기 5 일 전인 5 월 28일에는 기지 이전에 대한 수정안을 합의 내용으로 담고 있는 미-일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사민당 당수 후쿠시마 미즈호(福島瑞穗) 소비자-저출산담당장관을 파면했다. 후쿠시마 장관의 파면은 사민당의 연정 이탈을 초래했는데, 하토야마 총리는 며칠 후 사퇴선언을 하면서 이 문제를 자신이 사퇴를 결정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말함으로써 후쿠시마 장관에 대한 파면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자신 스스로에 대한 파면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했다.
2010 년 6 월 2 일 도쿄 AFP 퉁신을 인용한 연합뉴스와 서울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이 날 중의원 회의에서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평화는 일본 국민에 의해서 지켜져야지 미국에 더 이상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토야마 수상은 “그러나 그것이 결국 나의 시대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 고백했다.
난데없이 발생한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후텐마 칼자루를 거머쥐게 된 백악관은 지체하지 않고 하토야마 정권을 고강도로 압박해 목을 날려버림으로써 전대미문의 골치거리였던 ‘반미 일본’을 8 개월 만에 종식시켰다.
여담이지만, 지난 후쿠시마 원전 사태 당시 미국이 ‘원전폐쇄를 전제로 한 냉각기술 제공’을 극비리에 제안한 것은 하토야마 정권과의 갈등사태를 계기로 미국이 일본에 대한 핵공조 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저장소에 보관해 온 약 60 만 개의 폐연료봉은 국제원자력기구의 방조아래 그 동안 미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추진해 온 비밀 핵공조의 증거다.
오늘 이런 생각이 떠 올랐다. 만일…… 만일에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약 80 % 가 믿고 있는 대로 천안함을 수장시킨 장본인이 북한이었다면, 그런 명령을 내린 북한 지도부는 모두 접싯물에 코를 박고 자살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당시의 국제정세 속에서 무슨 보복을 하기 위해 포항급 초계함 따위에 그 위험을 무릅쓰고 어뢰를 발사했다는 군사책임자들은 모조리 국가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정치범수용소에 가야 할 지도 모른다. 아울러 그런 바보 정권이 60 여 년간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불가사의한 사실은 정치-사회학자들이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진실이란 멀리 있지 않다.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는 처음으로 되돌아가 ‘명백한 사실들’만을 가지고 상식적인 추리를 하는 게 정석이다. 진실추구보다는 상업적인 유혹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억측을 늘어놓은 엉터리 해설 기사나 여론을 유도할 목적으로 작성한 거짓말 칼럼 따위를 읽고 혼란에 빠지는 것 보다는 독자 스스로가 명백한 사실정보들에 입각해서 상식적인 추리노력을 하는 것이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는데 훨씬 유용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해답을 찾아내는 논리적인 사고력과 창조적인 상상력, 기사 행간을 읽어낼 줄 아는 추리력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오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이 스스로 피나는 노력을 통해 취득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 아닐까 한다.
2011 년 3 월 26 일 sarnia (clip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