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양식> 지성(至誠)이 없어도 감천(感天)은 있습니다. 아버지기에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대화라 할 수 있다.
만남을 통해 친밀한 기쁨과
간구를 통해 충족의 감사를 누린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호흡과도 같아 생존의 필수이다.
기도가 왜 어려울까?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응답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이 있을까?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한 비유의 말씀을 주셨다(눅11:5-8).
늦은 밤중에 친구가 찾아왔는데 마침 음식이 떨어졌다.
할 수 없이 이웃하는 친구를 찾아가 음식을 빌리려 했다.
그런데 이미 가족과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줄 수 없다 한다.
예수님께서 덧붙이신다.
비록 벗됨을 인해 주지 않을지 몰라도
계속 간청하면 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얻을 때까지 귀찮게하고 끈질기에 간구하면
결국은 얻을 것이니 그렇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일까?
우리 말에도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다.
조상들은 새벽에 목욕재계하고 정한수 떠놓고 빌고 빌었다.
결국 하늘이 감동하여 그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면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다른 사람은 어떠하든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아닌가?
막무가내로 떼쓰면 다 응답받을 수 있는가?
정성을 보시고 응답해 주신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까?
‘적어도 열흘은 금식해야지 겨우 사흘 굶고 들어달라고 그러니’
‘그 정도 기도 제목은 적어도 백일기도는 드려야지, 40일 갖곤 안되겠는데’
그건 오해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 아니시다.
예수님 비유의 말씀을 살펴보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눅11:7)
이 문장은 의문형이다. 누구든지 대답할 수 있는 쉬운 질문이다.
친구가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데 번거롭고 귀찮다고 거절하겠는가?
친구라면 그럴리 없다. 거절하는 사람은 친구도 아니다.
대부분은 그럴리 없지만 설령 거절하는 친구가 있다 하자.
그러나 간절한 요청에 결국은 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친구인가?
자기가 불편하다고 친구의 필요를 외면하는 그런 친구인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주는 그런 친구인가?
우리들의 보통 친구들도 친구의 필요를 외면치 않을진대,
하물며, 선한 친구이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욱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겠는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세상의 어떤 부모도 요구해야만,
그것도 귀찮을 정도로 요청해야 겨우 들어주는 부모는 없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는가?
어느 부모도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노심초사하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더욱 들어주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울고불고 단식하며 난리쳐야 들으시는 분이 아니다.
끈덕지게 졸라대야 겨우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마음이 없어 안들으실리 없고
능력이 없어 못주실리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초대하신다.
두 팔 벌려 기다리시며 우리 신음조차 들으신다.
더 이상 아무 방법이 없어 포기하려 하신다면
한가지, 기도할 수 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 하십니까?
덧붙임(postscript) *******
저는 하늘가족교회 목사입니다. 이 글은 지난 주일 하늘가족교회의 설교를 요약하거나 인용한 글입니다. 굳이 이렇게 밝히는 것은 글의 이해를 돕고 조금이라도 오해를 줄이기 위함입니다.
종교적인 글을 읽으시는 분은 교인이거나, 혹은 종교에 비판적이거나, 아니면 마음이 넓으신 분입니다. 글을 읽는 대상 모든 분들이 교인이 아니기에 감안하고 쓰려고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글의 의도가 드러날 수 있고 그것이 각자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한 목사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보다’ 하시면 조금이라도 이해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