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노트를 사러 가며
외로운 날엔 흰 노트를 사러 갑니다. 소복소복 흰 종이 위에 넋을 묻고 울어야 합니다.
황혼이 무서운 곡조로 저벅저벅 자살미사를 집전하는 우리의 불길한 도회의 지붕밑을 지나 나는 흰 노트를 사러 갑니다. 면죄부를 잔뜩 사는 탐욕스런 노파처럼 나는 흰 노트를 무섭도록 많이 삽니다.
간호부-수녀-어머니- 흰 노트는 피에 젖은 나의 정수리를 자기의 가슴으로 자애롭게 껴안고 하얀 붕대로 환부를 감아주듯 조심조심 물어봅니다. 고독이 두렵지 않다면 너는 과연 무엇이 두려운가. 무엇이 고통스러운가고
세상에는 너무나 무능하여 성스럽게 보이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무능한 순정으로 무능한 순정으로 흰 노트는 나를 위해 정말 몸을 바칩니다.
외로운 날엔 흰 노트를 사러 갑니다. 미칠 듯한 순정으로 미칠 듯한 순정으로 또박또박 흰 종이 위에 나는 또 내 슬픔의 새끼들을 수북이 낳아야 합니다.
- 김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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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경향신문》에 시 <그림 속의 물>이 당선되어 등단, 1994년 《동아일보》에 소설 <산타페로 가는 사람>으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태양 미사》 《33세의 팡세》 《솟구쳐 오르기》 《산타페로 가는 사람》 等
<감상 & 생각> 우리들은 우리 자신 안에 (원래 內在해)있는, 순정純正한 사랑을 너무 경시輕視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가뜩이나, 삶의 일기日記가 사랑의 일기인 일은 드문 이 때에...
나 자신, 진정으로 나 아닌 이웃에게 순정한 사랑의 눈길을 돌려본 적이 있던가.
살아오며, 그런 척 한 적은 많았겠지만...
시를 읽으며, 나는 나의 흰 노트에 무얼 쓸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순정한 고해告解를 기다리고 있는 그 흰 노트에...
창백한 나의 영혼은 무얼 쓸 수 있을까.
시인은 수북이 쌓여가는 슬픔이라도 적겠다고 하지만, 과연 나는 무얼 쓸 수 있을까.
이때껏 나만을 위해 살아왔던, 나는...
- 희선,
Ave maria (Angeles) - Emiri (Viol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