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양식> 톡소플라즈마라는 기생충, 사람에게도?
‘고양이 앞에 쥐’라는 말처럼 쥐는 고양이를 두려워한다.
천적을 피하는 것은 생존 본능이다.
아무리 용감한 쥐라도 고양이의 냄새만으로도 쥐구멍에서 나오질 않는다.
그런데 겁을 상실한 쥐가 있다.
고양이를 무서워하기보다 오히려 고양이에게 호감을 보인다고 한다.
제 정신이 아닌게다. 죽으려고 환장한건가... 맞다.
톡소플라즈마 곤디라는 기생충에 감염되면
이 기생충이 숙주를 옮기기 위해 쥐의 뇌에서 그렇게 작용한다고 한다.
우리의 삶에도 여러가지 공포와 두려움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고소 공포, 폐쇄 공포, 무대 공포...
어떤 사물이나 환경이나 상황에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비슷한 일에도 두려움이 앞선다.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사람은 사람이 두렵다.
다가올 불확실한 미래가 두렵기도 하다. 그 마지막 죽음.
누구나 두려움를 갖진 않는다. 겁을 상실한 사람들도 있다.
본래 담이 커서 겁이 없거나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불안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미리 대비하게 하는 자연스러운 방어 본능이기도 하다.
적당한 두려움은 필요한데, 겁이 없는 것도 문제가 아닐까.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함부로 덤비다가 낭패를 보기도 한다.
믿는 구석이 있으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어떤 이는 재물 (돈으로 안되는 일이 있을까...)
어떤 이는 인맥 (사람이 보물이지...)
어떤 이는 권세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네...)
동의할 수 있다. 어느 범위 안에서는.
백퍼 동의하긴 어렵다. 중대한 예외가 있으니까.
재물로도 안되는 것이 있고
권세로도 불가능한 것이 있고
사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근본적인 문제인 죄와 죽음
그리고 사람을 넘어서는 하나님.
그래서 자신의 무능을 절감하고 두려움을 가질 때
오히려 해답을 찾는 첫 걸음이 되기도 한다.
두려워 할 대상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생명을 얻을 수 있는데
두려운 대상을 우습게 여기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쥐에게 톡소플라즈마 곤디라는 기생충이 아닌가.
때로 재물도 권세도 인맥도 사람에게 그 기생충과 같다.
두려움을 이기는 올바른 믿음, 신앙의 대상은 무엇일까?
무엇으로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을까?
죽음을 이긴 죽음은 예수의 십자가이다.
죄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을 살릴 치료제는 예수의 보혈이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자는 담대하다.
죄와 사망이 그를 지배할 수 없고 자유하기에.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도 때로 연약해서 깊은 두려움과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손 내밀어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강한 듯 보여도 연약한 인생이라, 누구라도 뭐든 믿고 살아간다.
뭘 믿든지 개인의 자유지만,
기왕 붙들고 믿는다면 지푸라기가 아니라
든든한 생명선에 올라타면 좋겠다.
허우적거리며 떠밀려 살아가는 삶이 아닌
안전하고 즐거운 인생의 항해가 되시기를.
덧붙임(postscript) *******
저는 하늘가족교회 목사입니다. 이 글은 지난 주일 하늘가족교회의 설교를 요약하거나 인용한 글입니다. 굳이 이렇게 밝히는 것은 글의 이해를 돕고 조금이라도 오해를 줄이기 위함입니다.
종교적인 글을 읽으시는 분은 교인이거나, 혹은 종교에 비판적이거나, 아니면 마음이 넓으신 분입니다. 글을 읽는 대상 모든 분들이 교인이 아니기에 감안하고 쓰려고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글의 의도가 드러날 수 있고 그것이 각자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한 목사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보다’ 하시면 조금이라도 이해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