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음악은 알버타의 교민 음악가 Claude Choe - Love Is Just A Dream라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여전히 알버타에 사시는지 궁금하군요.
늘봄님, 안녕하세요.
여기 게시판은 public space이기 때문에 올린 글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게시판에서 늘봄님은 역사적 예수, 예수의 새로운 상 등을 매번 글을 올릴 때마다 언급하셨고, 예수 세미나 정회원으로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아래 포스트에서 늘봄님은 이렇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말해, 초자연적인하느님, 하느님예수, 원죄론, 구원론, 창조론등은종교적문맹의산물이다. 30여년전미국에서예수세미나학회(www.westarinstitute.org)가종교적문맹퇴치운동을전개했으며, 이제는이것이급속도로전세계로확산되었다. 나는 1998년에이학회에가입해서지금까지그운동을위해활동하고있다."
이번 기회에 예수 세미나에서 구성한 역사적 예수상을 간략히 소개해 주실 수 있습니까? 역사적 예수를 말씀하실 때, 로버트 펑크, 마커스 보그, 존 도미닉 크라슨, 클로펜버그의 어느 예수상인지 아니면 늘봄님께서 이들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늘봄님 자신이 정리한 역사적 예수상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 아시다시피 (여기서 여러번 언급했기에), 알버트 슈바이쩌의 "묵시론적(종말론적) 예수 [The Apocalyptic Jesus]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늘봄님께서 삼층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을 퇴치하기 위해 인용하신 바트 어만 (Bart Ehrman; 또는 바트 이어만) 리챠드 호슬리 (Richard Horsley)도 해석상의 차이는 있을 지 모르지만 슈바이쩌와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호슬리는 예수가 하느님의 심판을 굳게 믿은 분으로 생각하고 있구요. 예수 세미나의 포뮬라인 예수는 "지혜를 가르치는 선생" (wisdom teacher)이라는 데 대해서, 호슬리는 상당히 비판적으로 님께서 참고문헌에 언급하신 Jesus and Empire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사상과 논리 또는 단순한 에세이에서도 반대증거에 답변할 준비가 되었을 때 자기 주장이 신빙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일반 평신도나 성서비평학에 별로 노출이 안된 보수복음주의자들 앞에서 사기를 행하는 행각과 다를 바가 없다고 봅니다. 늘봄님의 서가에 호슬리의 책 [예수와 제국주의]가 있다고 100% 믿기에 호슬리의 주장에 반대되는 즉 예수 세미나적 답변을 늘봄님으로부터 기대해 봅니다. 서문만 읽으셔도 호슬리의 생각이 바로 드러납니다.
이런 질문을 올리는 것은 여기 게시판에 "종교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하고 계시는 늘봄님의 사상적 근간에 대한 질문과 깊은 연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래서 종교문맹은 종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을 일컫는다고 말씀드렸는데 늘봄님 당신께서 혹시 제가 생각하는 종교문맹이 아니신가 해서 질문을 드리는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늘봄님의 답변이 기다려집니다.
부연 1
예수 세미나는 기존의 "역사적 예수" (the historical Jesus)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 다시 새롭게 해보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모임이 로버트 펑크 사망 후 앞으로 어떻게 갈지 불명확합니다. 마크스 보그 선생도 세상을 떠났구요. 한 때 반짝 했지만 예수 세미나에서 새로운 연구물이 나왔나요? 엄밀한 학자들의 모임만이 아닌 목회자들까지 참여해서 투표해서 한 결과물인데 학문의 엄밀성을 인정받았나요? 엡데이트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에 속하는 것입니다. 펑크가 제창한 교리로부터 독립한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를 밝히자는 것이 아니었나요? 그리고 역사적 예수를 제대로 소개한다면, 기존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이러저러 했는데 예수 세미나에서 밝혀낸 것은 이런 면이 있고 이런 면에서 기존의 역사적 예수 이해를 극복하였다는 즉 비교적 객관적 평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세미나가 역사적 예수의 다수는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 세미나가 무슨 운동 단체가 아니라면 역사적 예수 연구의 대안단체가 될 수 없습니다. 동일한 말씀을 이 게시판에 여러번 드리게 되는군요.
부연 2
호슬리의 입장은 복음서의 예수를 현대의 관점에 맞지 않는 것, 가령, 기적, 신화, 환상적인 것을 다 제거하면 온전한 예수상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탄생한 사회 경제적 조건, 문화적 전통, 그런 조건과 전통에서 예수라는 지도자의 등장과 특별한 사회적 역할 그리고 그의 행적에 반응하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운동 모두를 고려할 때 예수상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호슬리의 주장들이 늘봄님의 생각과 다 배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를 각자, 지혜자, 깨달음의 선생으로 제한할 경우 당시 유대사회의 묵시론적 비전과 예언자 전통을 부각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내면의 깨달음과 외면의 신앙은 사라집니다. 인도의 불가촉천민인 달리트의 불교나 기독교에로의 집단개종(mass conversion)은 내면의 깨달음의 문제라기보다는 바로 헌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문화적 카스트로부터의 탈출입니다. 말콤 엑스나 권투선수 고 무하마드 알리의 전통적 이슬람으로의 개종 역시 내면적 문제라기보다는 공동체적 연대와 사회적 조건에 반응한 면이 더 강합니다. 현대 이슬람의 등장과 테러리즘도 호슬리의 분석을 따르면 더 잘 이해될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들의 교리적 신념체계와 유신론을 비판한다면 호슬리가 비판하는 본질주의 (essentialism)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담론은 정치적이며, 사회/경제적 조건을 반영합니다.
늘봄님, 저의 소박한 질문에 두개의 긴 답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에 댓글 또는 답글을 올려야 할지 망설여져서 그냥 제 포스트에 댓글을 달겠습니다.
제 질문은 역사적 해석에 대한 질문입니다. 늘봄님께서 신학을 전혀 하지 않으시고 고대사를 공부하는 역사학도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예 기독교적 배경이 없고 종교에도 아예 관심이 없는 그냥 역사학도로서 기원 1년을 전후로 한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다가 그 당시 살았던 “예수”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예수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가? 만일 실재했다면 그 예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역사학적 고민을 철저히 한 사람이 늘봄님께서도 잘 아시는 저 유명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Albert Schweitzer가 아닙니까요? 그가 1906년 출판한 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 (History of Life-of-Jesus research/예수의생애연구사; 영문판으로는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가 아닙니까요? 이 책 하나로 그동안 해온 역사적 예수 연구는 바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계몽주의의 발흥과 더불어 활발히 해온 역사적 예수 연구는 역사적 예수의 본모습을 밝혔다기 보다는 이러한 역사적 예수를 탐구한 연구자의 시대를 반영한 것이라고 슈바이처는 정리하고 있습니다. 가령, 예수는 도덕적 화신이나 혁명가다 등등요. 그러니까 예수상이라고 하는 것이 조선인 홍길동이라고 하면 예수가 갓쓰고 등장한 조선인일 수 있고, 일본인이라면 칼찬 사무리아인 아베신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연구자의 시대적 이미지를 반영한 것(Jesus in their own image)이 그동안의 예수 연구였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로빈슨의 역사적 예수를 다시 보자는 문제 제기, 그리고 그의 사업가에 가까운 로버트 펑크가 야심차게 연 예수 세미나도 신학운동 대신 진짜 예수(real Jesus)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는데 결국 문제는 신학운동이 되어 버렸습니다.
리챠드 호슬리가 예수 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제기한 문제는 이른바 서구학자들의 역사적 연구가 사실은 서구의 진보적 개인주의적 학자들의 현재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는 겁니다. 늘봄님께서 달아주신 답글은 훌륭한 신학적 진술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진술은 “역사적” (historical) 예수라기 보다는 늘봄님의 신학사상의 거울에 비친 예수상입니다. 이것은 역사학도가 경계해야 하는 첫번째 준칙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호슬리는 “탈역사화된”(de-historicized) 예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예수는 훌륭한 신학적 성찰일 수 있습니다. 성서에는 분명히 wisdom Jesus를 연상시킬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호슬리도 이것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과학적 세계관에 무장된 사람들에게 Real Jesus는 당혹스러운 모습이라서, 이 당혹스러운 모습을 제거한 예수는 역사적 예수상과는 무관한 나의 기대치를 투사한 일그러진 예수, 왜곡된 예수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늘봄님께서 지금 소장하고 계실 리챠드 호슬리의 [예수와 제국]에서 제기된 질문에 답변하시는 대신 긴 신학적 선언문을 왜 다시는지 더 궁금해지는군요.
아래서 클립보드님께서 볻받아라 님의 글에 대해서 “적어도 교회에서 신자들 앞에서 설교하시는 것보다야 다중을 상대하는 공론장에서 ‘전도활동’하시는 것이 수 백 배는 어렵고 험난한 작업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늘봄님께도 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역사적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역사적” 질문은 나의 신학이이나 선입견이 배제된 노력이어야 합니다. 현대 과학적 세계관에 길들여진 예수(tamed Jesus)가 아닌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야생의 예수(wild Jesus)를 보고 싶군요.
아뭏든 늘봄님께서 답글 달아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호슬리의 문제 제기에 대한 늘봄님의 답변은 기다려지는군요. 신학적 판단이 배제된 “역사적” 예수 말씀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