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때 부모 따라 벤쿠버 건너가 교사로 일하다 상원의원에 발탁…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사업, 탈북난민 구호 등 한국과 우호활동에 앞장서 와
지난 11월 11일 오전 11시 부산시 전역에 사이렌이 울렸다. 같은 시각 남구 대연동에 있는 유엔기념공원에서는 19발의 예포가 발사됐다.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묵념이 이어졌다.
‘하나되는 순간, 부산을 향하여(Moment to be one, Turn toward Busan)’란 주제로 열린 추모식에는 국내외 6·25 참전용사와 유가족, 참전국 외교사절 등 1000여 명이 참석했다. 6·25 전쟁에서 희생한 유엔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의식이었다. 유엔기념공원은 11개국 2300여 명의 전사자가 잠들어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유엔군 묘지다.
캐나다 사절단에서 친숙한 이미지의 아시아인 여성이 눈에 띄었다. 이번 행사를 위해 외교사절단으로 방문한 연아 마틴(53·한국명 김연아) 캐나다 연방상원의원이다. 마틴 의원과 동행한 조지 퓨리 캐나다 상원의장이 이번에 참전국을 대표해 추모사를 읽었다.
마틴 의원은 한국계 캐나다인이다. 캐나다 의회에서 ‘한국-캐나다의원친선연합’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2007년부터 시작한 추모 행사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해 왔다. 올해는 2년 만의 방문이었다. 나흘 뒤(15일) 서울 코엑스(COEX)에서 그를 만났다.
오랜만에 한국에 왔으니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불과 2년 만에 정말 많은 게 달라졌어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역적(한반도 상황)으로나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게 느껴질 정도예요. 이렇게 다이내믹한 게 한국의 매력이자 강점인 것 같아요.”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난 마틴 의원은 일곱 살 때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했다. 서툴지만 한국말을 곧잘 했다. “아버지가 평안남도 출신”이라고 했다. “캐나다로 떠나는 날이 내 생일이었어요. 캐나다는 시차가 하루 늦으니까 도착했는데도 내 생일인 거예요. 내 일곱 살 생일 선물은 ‘캐나다’였던 셈이죠.”
캐나다 이민 생활은 어땠나요?
“어린 시절에 서양인들과 함께하는 생활을 낯설어하긴 했죠. 하지만 이민 1.5세대가 거치는 평범한 정도였지, 심각하게 혼란을 겪은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제 아버지가 1954년 숭실대를 졸업할 때 이미 셰익스피어 문학을 주제로 논문을 쓰셨고, 저 역시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어요.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 21년간 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어요.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린 딸이 ‘엄마, 나는 왜 다르지?’라고 묻더라고요. 딸이 정체성을 고민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내 아이는 말하자면 혼혈이에요. 나보다 더 혼란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혼혈 아이들이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모임 ‘C3(The Corean Canadian Coactive Socierty)’를 만들었어요. 이것이 정계에 진출하는 계기가 됐죠.”
매년 1월 1일 한국전 참전용사 기리는 행사 열려
C3는 현재 캐나다 내 한인 2세와 입양된 한국계 캐나다인들이 참여하는 ‘캠프코리아’를 비롯해 리더십 컨퍼런스, 멘토링 등을 통해 한국 문화와 언어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운영한다. 2003년에 작은 자원봉사 단체로 시작해 지금은 캐나다에서 대표적인 한인 단체로 성장했다. 단체를 주도한 마틴 의원을 눈여겨본 스티브 하퍼 총리가 2009년에 그를 상원의원으로 지명했다. 한인 사회를 대표할 수 있고, 여성이며 교사 출신이란 점이 발탁 배경으로 꼽힌다.
한국계 캐나다인의 첫 의회 진출이란 상징성이 꽤 클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지만 그만큼 무게감을 느껴요. 제가 좋은 선례를 남겨야 더 많은 한인들이 기회를 얻을 테니까요. 제가 의회에 들어온 뒤 캐나다의 정치인들은 한국이나 한인사회와 관계된 것을 모두 저한테 물어요. 작년부터 캐나다 정부가 7월 27일을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날’로 정해 기념식을 열고 있어요. 관련 법안을 2012년에 제가 주도해 발의했고, 만장일치로 통과됐어요.”
참전용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상원의원이 된 지 3개월쯤 됐을 때, 저보다 훨씬 오래 계신 상원의원이 말씀하더라고요. ‘네가 해야 할 일이 곧 너를 찾아올 거다.’ 뭘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울 때였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질문이 하나 떠오르더라고요. ‘캐나다 달력에 한국전 참전용사의 날이 있을까?’ 그때부터 캐나다 참전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 봤어요. ‘어메이징’한 스토리가 무궁무진하더라고요.”
6·25에 참전한 캐나다 군인은 2만5687명이다. 당시 캐나다 전체 병력의 절반에 해당한다. 유엔군 참전국가 중에는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특히 참전국가들 중 유일하게 징집이 아닌 순수 자원병들로 파병부대를 구성했다. 516명이 전사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마틴 의원은 “단지 평화를 사랑하는 열정 하나로 먼 이국땅(한국)까지 와서 자유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라며 “아들 5명 중 미성년자인 막내만 빼고 4명을 참전시킨 분도 있을 정도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분들”이라고 말했다.
한국과 캐나다의 오랜 인연을 한국인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역사적으로 캐나다는 한국의 가장 진실한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캐나다 선교사인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명은 석호필·石虎弼, 1889~1970) 박사가 한국에 처음 온 지 130주년이에요.(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3·1운동 때 만세시위현장을 찍어 조선의 독립운동 실상을 해외에 알렸다) 한국의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셨고, 한영사전을 처음 만드셨어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재 연세대 의대)에서 한국 의학의 기초를 만들기도 하셨죠.
한국은 캐나다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첫 번째 아시아국가이기도 합니다. 양국의 오래된 인연만큼 앞으로 교류가 확대될 가능성은 더욱 크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캐나다 사람들은 한국을 무척 좋아해요.(웃음)”
한국은 남북 관계가 크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종전선언이 추진되고 있기도 하고요. 참전 기념행사의 의미가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캐나다에 계신 참전용사님들이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서 진행되는 소식을 아주 관심 있게 보고 있어요. 다만, 너무 서둘러서 휙휙 해치워야 하는 숙제처럼 여기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균형을 맞추며 가야 한다는 거죠.”
한국 거쳐 해외 나간 탈북난민에 좀더 관심을
마틴 의원은 탈북자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 현재 캐나다에는 100여 명의 탈북자가 난민신청을 한 상태다. 캐나다 국영 CBC방송에 따르면 지난 7월말을 기준으로 탈북자 135명이 추방령을 받았다. 이들이 탈북한 뒤 먼저 한국에 정착해 한국 국적을 받은 뒤 캐나다로 건너와 난민신청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마틴 의원은 2016년에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하는 건의안을 발의해 상원에서 채택됐다.
캐나다에도 탈북자 이슈가 있다는 얘기가 생소합니다.
“한국 국민들은 잘 모르실 거예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워낙 많으니까…. 한국은 난민 대상국이 아니어서 난민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캐나다 정부의 입장입니다. 하지만 한국을 떠나 온 탈북자들은 한국에서 차별을 당해서 온 분들이에요. 2016년에 제가 상원 인권소위원회 위원으로 있을 때 북한 인권문제를 정식 안건으로 올렸어요. 그해 3월에 북한인권청문회가 열렸죠. 저는 탈북난민과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 태국 등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탈북난민들을 캐나다가 직접 수용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내에서 탈북자에 대한 차별이 난민 문제의 원인이라고 보시는 건가요?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한국 정부가 탈북자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여 주길 바랍니다. 햇볕정책을 예로 들어 볼까요. 빛이 한쪽을 비추면 그 반대편에는 그늘이 지겠죠? 빛이 모든 곳을 밝게 비추진 못해요. 탈북자들을 위해선 정책이 중요한데, 포커스가 북한으로 가면 이쪽(탈북자 정책)은 그늘이 될 수 있습니다. 너무 밀어붙이면 한쪽이 소외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탈북자 소외는 정책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경쟁이 과도해지는 한국 사회의 본질적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걸 느껴요. 한국은 정말 다이내믹한 나라예요. 그런데 너와 나의 간극이 큰 것 같아요. 경쟁이 심하고, 상대를 지게 만들어야 내가 이긴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습니다. 캐나다는 좀 달라요. ‘윈윈(win-win)’이라고 생각하죠. 법안을 발의할 때나 정책을 만들 때에도 윈윈 솔루션을 바탕으로 컨센서스를 모아 나갑니다.
마틴 의원을 만난 날은 마침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그는 교육 현장에서 오랫동안 종사해 왔다. 한국의 교육 문제와 사회 갈등의 부작용을 치유할 해법이 궁금했다.
다이내믹 코리아 좋지만, ‘한걸음’씩 천천히
“수학능력시험일이라고요? 와우! 다들 좋은 결과 얻기를 바랍니다.(웃음) 한국 사회의 갈등을 치유할 방법은 ‘봉사 정신’을 체질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캐나다의 경우 어려서부터 ‘볼런티어(volunteer)’ 교육과 활동을 체험하고 일상화하게끔 합니다. 점수를 따기 위해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참전용사들이 대가를 바라거나 누군가의 강요로 한국에 온 게 아닌 것처럼 말이죠. 누군가를 돕는 건 결국 스스로를 돕는 거라는 것을 캐나다 사람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어요. 누군가의 봉사가 다른 이에게 옮아가는 것, ‘봉사의 선순환’이에요. 제가 정치에 입문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정치할 마음을 먹고 봉사활동을 벌였던 게 아니기에 가능했답니다.”
마틴 의원은 “한국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했다. 무슨 뜻일까.
“한국에는 ‘품앗이’란 게 있잖아요? 오랜 전통이라고 배웠어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매우 훌륭한 전통을 갖고 있는 거예요. 다만 한국은 뭐든지 빨리빨리 하려고 하는 게 조금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팝송의 제목처럼 스텝 바이 스텝(step by step)으로 가는 게 좋습니다. 지금 세대가 잘하면 다음 세대에서 선순환이 정착될 거예요. 당장 성과를 내야 한다고 너무 서두르면 동티가 날 수도 있어요. 저는 그걸 경험을 통해 깨달았어요.”
경험으로 깨달았다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2011년부터 의회에서 한인 1.5세대들을 위한 인턴십 프로그램을 해오고 있어요. 한인 이민자 후세들이 정치에 입문할 기회를 넓히는 겁니다. 여러 주의 한인단체들로부터 추천을 받아서 1년에 한 명씩 의원실에서 일할 인턴을 뽑아요. 제가 공동의장으로 있는 한국-캐나다의원친선연합 멤버 의원들께 인턴들을 추천해 주기도 하고요. 7년쯤 되니 제자들이 많이 생겼어요. 부모를 따라 캐나다에 온 1.5세대들은 한국 사람 특유의 성실성을 타고 났어요. 그리고 실력도 뛰어나고요. 아마 저들이 성장해서 주류가 된다면 그 후대(2세대)들은 저 같은 1.5세대보다 더 많은 곳에서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저희 세대들의 역할이고, 저는 이걸 ‘봉사의 선순환’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한국인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저는 캐나다 시민이에요. 동시에 한국인이기도 하고요. 남북한이 잘 되면 저와 같은 해외 이민자들이나 교포들도 다 같이 ‘윈윈’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올 때마다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작은 나라인데도 스토리가 대단합니다. 저력도 있고요. 저에겐 무척 큰 힘이 됩니다. 한국을 위해 먼 이국 땅에서 참전해 헌신한 분들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떠올릴 때마다 새로운 영감을 얻으실 수도 있을 거예요. 캐나다와 한국은 좋은 친구입니다. 경제적으로도 훌륭한 파트너가 될 거라고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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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는 순간, 부산을 향하여(Moment to be one, Turn toward Busan)’란 주제로 열린 추모식에는 국내외 6·25 참전용사와 유가족, 참전국 외교사절 등 1000여 명이 참석했다. 6·25 전쟁에서 희생한 유엔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의식이었다. 유엔기념공원은 11개국 2300여 명의 전사자가 잠들어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유엔군 묘지다.
캐나다 사절단에서 친숙한 이미지의 아시아인 여성이 눈에 띄었다. 이번 행사를 위해 외교사절단으로 방문한 연아 마틴(53·한국명 김연아) 캐나다 연방상원의원이다. 마틴 의원과 동행한 조지 퓨리 캐나다 상원의장이 이번에 참전국을 대표해 추모사를 읽었다.
마틴 의원은 한국계 캐나다인이다. 캐나다 의회에서 ‘한국-캐나다의원친선연합’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2007년부터 시작한 추모 행사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해 왔다. 올해는 2년 만의 방문이었다. 나흘 뒤(15일) 서울 코엑스(COEX)에서 그를 만났다.
오랜만에 한국에 왔으니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불과 2년 만에 정말 많은 게 달라졌어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역적(한반도 상황)으로나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게 느껴질 정도예요. 이렇게 다이내믹한 게 한국의 매력이자 강점인 것 같아요.”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난 마틴 의원은 일곱 살 때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했다. 서툴지만 한국말을 곧잘 했다. “아버지가 평안남도 출신”이라고 했다. “캐나다로 떠나는 날이 내 생일이었어요. 캐나다는 시차가 하루 늦으니까 도착했는데도 내 생일인 거예요. 내 일곱 살 생일 선물은 ‘캐나다’였던 셈이죠.”
캐나다 이민 생활은 어땠나요?
“어린 시절에 서양인들과 함께하는 생활을 낯설어하긴 했죠. 하지만 이민 1.5세대가 거치는 평범한 정도였지, 심각하게 혼란을 겪은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제 아버지가 1954년 숭실대를 졸업할 때 이미 셰익스피어 문학을 주제로 논문을 쓰셨고, 저 역시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어요.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 21년간 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어요.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린 딸이 ‘엄마, 나는 왜 다르지?’라고 묻더라고요. 딸이 정체성을 고민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내 아이는 말하자면 혼혈이에요. 나보다 더 혼란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혼혈 아이들이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모임 ‘C3(The Corean Canadian Coactive Socierty)’를 만들었어요. 이것이 정계에 진출하는 계기가 됐죠.”
매년 1월 1일 한국전 참전용사 기리는 행사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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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캐나다인의 첫 의회 진출이란 상징성이 꽤 클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지만 그만큼 무게감을 느껴요. 제가 좋은 선례를 남겨야 더 많은 한인들이 기회를 얻을 테니까요. 제가 의회에 들어온 뒤 캐나다의 정치인들은 한국이나 한인사회와 관계된 것을 모두 저한테 물어요. 작년부터 캐나다 정부가 7월 27일을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날’로 정해 기념식을 열고 있어요. 관련 법안을 2012년에 제가 주도해 발의했고, 만장일치로 통과됐어요.”
참전용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상원의원이 된 지 3개월쯤 됐을 때, 저보다 훨씬 오래 계신 상원의원이 말씀하더라고요. ‘네가 해야 할 일이 곧 너를 찾아올 거다.’ 뭘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울 때였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질문이 하나 떠오르더라고요. ‘캐나다 달력에 한국전 참전용사의 날이 있을까?’ 그때부터 캐나다 참전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 봤어요. ‘어메이징’한 스토리가 무궁무진하더라고요.”
6·25에 참전한 캐나다 군인은 2만5687명이다. 당시 캐나다 전체 병력의 절반에 해당한다. 유엔군 참전국가 중에는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특히 참전국가들 중 유일하게 징집이 아닌 순수 자원병들로 파병부대를 구성했다. 516명이 전사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마틴 의원은 “단지 평화를 사랑하는 열정 하나로 먼 이국땅(한국)까지 와서 자유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라며 “아들 5명 중 미성년자인 막내만 빼고 4명을 참전시킨 분도 있을 정도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분들”이라고 말했다.
한국과 캐나다의 오랜 인연을 한국인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역사적으로 캐나다는 한국의 가장 진실한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캐나다 선교사인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명은 석호필·石虎弼, 1889~1970) 박사가 한국에 처음 온 지 130주년이에요.(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3·1운동 때 만세시위현장을 찍어 조선의 독립운동 실상을 해외에 알렸다) 한국의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셨고, 한영사전을 처음 만드셨어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재 연세대 의대)에서 한국 의학의 기초를 만들기도 하셨죠.
한국은 캐나다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첫 번째 아시아국가이기도 합니다. 양국의 오래된 인연만큼 앞으로 교류가 확대될 가능성은 더욱 크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캐나다 사람들은 한국을 무척 좋아해요.(웃음)”
한국은 남북 관계가 크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종전선언이 추진되고 있기도 하고요. 참전 기념행사의 의미가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캐나다에 계신 참전용사님들이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서 진행되는 소식을 아주 관심 있게 보고 있어요. 다만, 너무 서둘러서 휙휙 해치워야 하는 숙제처럼 여기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균형을 맞추며 가야 한다는 거죠.”
한국 거쳐 해외 나간 탈북난민에 좀더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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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도 탈북자 이슈가 있다는 얘기가 생소합니다.
“한국 국민들은 잘 모르실 거예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워낙 많으니까…. 한국은 난민 대상국이 아니어서 난민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캐나다 정부의 입장입니다. 하지만 한국을 떠나 온 탈북자들은 한국에서 차별을 당해서 온 분들이에요. 2016년에 제가 상원 인권소위원회 위원으로 있을 때 북한 인권문제를 정식 안건으로 올렸어요. 그해 3월에 북한인권청문회가 열렸죠. 저는 탈북난민과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 태국 등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탈북난민들을 캐나다가 직접 수용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내에서 탈북자에 대한 차별이 난민 문제의 원인이라고 보시는 건가요?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한국 정부가 탈북자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여 주길 바랍니다. 햇볕정책을 예로 들어 볼까요. 빛이 한쪽을 비추면 그 반대편에는 그늘이 지겠죠? 빛이 모든 곳을 밝게 비추진 못해요. 탈북자들을 위해선 정책이 중요한데, 포커스가 북한으로 가면 이쪽(탈북자 정책)은 그늘이 될 수 있습니다. 너무 밀어붙이면 한쪽이 소외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탈북자 소외는 정책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경쟁이 과도해지는 한국 사회의 본질적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걸 느껴요. 한국은 정말 다이내믹한 나라예요. 그런데 너와 나의 간극이 큰 것 같아요. 경쟁이 심하고, 상대를 지게 만들어야 내가 이긴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습니다. 캐나다는 좀 달라요. ‘윈윈(win-win)’이라고 생각하죠. 법안을 발의할 때나 정책을 만들 때에도 윈윈 솔루션을 바탕으로 컨센서스를 모아 나갑니다.
마틴 의원을 만난 날은 마침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그는 교육 현장에서 오랫동안 종사해 왔다. 한국의 교육 문제와 사회 갈등의 부작용을 치유할 해법이 궁금했다.
다이내믹 코리아 좋지만, ‘한걸음’씩 천천히
“수학능력시험일이라고요? 와우! 다들 좋은 결과 얻기를 바랍니다.(웃음) 한국 사회의 갈등을 치유할 방법은 ‘봉사 정신’을 체질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캐나다의 경우 어려서부터 ‘볼런티어(volunteer)’ 교육과 활동을 체험하고 일상화하게끔 합니다. 점수를 따기 위해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참전용사들이 대가를 바라거나 누군가의 강요로 한국에 온 게 아닌 것처럼 말이죠. 누군가를 돕는 건 결국 스스로를 돕는 거라는 것을 캐나다 사람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어요. 누군가의 봉사가 다른 이에게 옮아가는 것, ‘봉사의 선순환’이에요. 제가 정치에 입문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정치할 마음을 먹고 봉사활동을 벌였던 게 아니기에 가능했답니다.”
마틴 의원은 “한국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했다. 무슨 뜻일까.
“한국에는 ‘품앗이’란 게 있잖아요? 오랜 전통이라고 배웠어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매우 훌륭한 전통을 갖고 있는 거예요. 다만 한국은 뭐든지 빨리빨리 하려고 하는 게 조금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팝송의 제목처럼 스텝 바이 스텝(step by step)으로 가는 게 좋습니다. 지금 세대가 잘하면 다음 세대에서 선순환이 정착될 거예요. 당장 성과를 내야 한다고 너무 서두르면 동티가 날 수도 있어요. 저는 그걸 경험을 통해 깨달았어요.”
경험으로 깨달았다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2011년부터 의회에서 한인 1.5세대들을 위한 인턴십 프로그램을 해오고 있어요. 한인 이민자 후세들이 정치에 입문할 기회를 넓히는 겁니다. 여러 주의 한인단체들로부터 추천을 받아서 1년에 한 명씩 의원실에서 일할 인턴을 뽑아요. 제가 공동의장으로 있는 한국-캐나다의원친선연합 멤버 의원들께 인턴들을 추천해 주기도 하고요. 7년쯤 되니 제자들이 많이 생겼어요. 부모를 따라 캐나다에 온 1.5세대들은 한국 사람 특유의 성실성을 타고 났어요. 그리고 실력도 뛰어나고요. 아마 저들이 성장해서 주류가 된다면 그 후대(2세대)들은 저 같은 1.5세대보다 더 많은 곳에서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저희 세대들의 역할이고, 저는 이걸 ‘봉사의 선순환’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한국인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저는 캐나다 시민이에요. 동시에 한국인이기도 하고요. 남북한이 잘 되면 저와 같은 해외 이민자들이나 교포들도 다 같이 ‘윈윈’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올 때마다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작은 나라인데도 스토리가 대단합니다. 저력도 있고요. 저에겐 무척 큰 힘이 됩니다. 한국을 위해 먼 이국 땅에서 참전해 헌신한 분들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떠올릴 때마다 새로운 영감을 얻으실 수도 있을 거예요. 캐나다와 한국은 좋은 친구입니다. 경제적으로도 훌륭한 파트너가 될 거라고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