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 일 오전 11 시 17 분, 캐세이퍼시픽 한 대가 밴쿠버 국제공항 국제선 M 터미널에 도착했다. 이 비행기는 같은 날 오후 3 시 58 분 홍콩 첵랍콕 국제공항 68 번 게이트를 출발한 CX 838 편이었다. 그 날 따라 강한 편서풍의 영향으로 평소보다 짧은 비행시간인 11 시간 19 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한 이 비행기에 보딩브릿지가 연결되고 일등석과 비즈니스석 사이에 있는 출입구가 개방됐다.
출입구 앞에 두 열로 늘어선 승무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가장 먼저 내린 승객은 세련된 용모의 40 대 동양계 여성이었다. 마치 한국 탤런트 김희애와 김혜선의 얼굴을 합성해 놓은 듯한 이 미모의 중년여성은 다소 피곤해 보였지만 꼿꼿한 자세로 비행기 밖으로 걸어나갔다. 일행으로 보이는 두 명의 30 대 여성은 감색 투피스 정장차림이었다. 수행원들인 것 같았다.
김희애와 김혜선을 반반씩 닮은 그 중년여성 일행이 입국심사장으로 가는 대신 환승게이트로 들어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 순간 느닷없이 여섯 명의 사내들이 어디에선가 나타나더니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복차림의 사내들이었는데, 그 중 두 명은 동양계였고 나머지 네 명은 유럽계(백인)나 히스패닉계으로 보였다. 그 중 동양계 한 명이 CBSA(캐나다국경관리청) 공무원 신분증을 들이대며 중년여성에게 영어로 말했다.
"여권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정중했지만 싸늘한 말투에 옆에 있던 30 대 여성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무도 그 질문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꾸는 커녕 30 대 에게는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중년여성이 잠자코 여권을 내 보이자 CBSA 요원이 태블릿으로 여권을 스캔한 후 스크린에 나타난 기록을 검토했다. 검토를 끝낸 CBSA 요원은 나머지 사내들에게 고개를 끄덕하더니 혼자서 입국심사장 쪽으로 사라졌다.
CBSA 요원이 사라지고 난 후 이번에는 인도계인지 히스패닉인지 인종을 종잡을 수 없는, 짧게 올려 깎은 흑발의 40 대 사내가 중년여성 코 앞에 A4 규격의 종이쪼가리 한 장을 흔들어보였다. 사내는 마치 책을 읽어내려가듯 건조하고 빠른 영어로 말했다. 사내의 말을 듣는 동안 중년여성의 얼굴색이 갈수록 창백해지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멍안저우 씨. 우리는 RCMP 특별수사국과 연방검사실에서 나온 수사관들입니다. 멍안저우씨를 금융거래법위반혐의로 체포합니다. 여기 밴쿠버 연방법원에서 발부한 체포영장이 있습니다. 귀하는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귀하가 한 말은 법원에서 불리한 증거로 채택될 수 있습니다. 귀하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변호사 선임할 돈이 없으면 언제라도 말씀하세요. 법원에서 선임해 줄 것 입니다. 혹시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이상이 싸르니아가 언론보도와 FlightAware, 공항 체포현장의 지도를 면밀하게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추론한 중국 정보통신기업 Huawei 의 CFO 멍완저우 캐나다 밴쿠버 국제공항 M 터미널 체포현장 스케치다.
체포과정은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아직 공식적인 브리핑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런지 멍 CFO 체포를 놓고 억측과 추론이 난무한다.
그 억측과 추론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공교롭게도 그가 체포된 날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미-중간 관세휴전이 있던 날이라, 미국이 중국의 뒤통수를 가격해 향후 관세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사전 시나리오라는 루머다.
둘째,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캐나다 정부가 미국의 요구대로 멍 CFO 를 체포해 미국 수사당국에 인도하기 위해 그를 체포했다는 추론이다.
이런 식의 루머와 추론은 취재에 게으른 나머지 이 사건에 대한 기초지식초차 확보하지 못한 한국의 일부 기자들이 제멋대로 써 갈기고 있는 엉터리 소설극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이 차세대 이동통신 기술을 선점하기 위한 미-중간 기술전쟁의 일각인 것은 분명하나, 그 두 나라간에 벌어지고 있는 관세전쟁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사건은 12.1 미-중 관세휴전국면에서 유리한 협상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 먹기 위해 갑자기 급조한 시나리오가 아니라, Huawei 와 그 방계회사들의 주거래은행인 HSBC 내부자를 첩보원으로 포섭해서 활용하고 있는 FBI 가 오바마 대통령 시절인 2012 년부터 끈질기게 금융거래정보를 수집해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FBI 는 지금으로부터 4 개월 전에 일찌감치 법원으로부터 멍 CFO 에 대한 법원의 체포영장을 발부받아놓고 그가 미국이나 캐나다 공항으로 들어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려 오던 중 이었다.
NYT 는 멍 CFO 가 2017 년 부터, 즉 자신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기 1 년 여 전부터 FBI 가 자신과 자신이 이사로 있었던 Skycom Tech 이라는 회사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Skycom 은 Huawei 의 방계회사인데 그 회사의 테헤란 지사가 미국 HP로부터 기술이전받아 생산한 첨단부품을 이란의 정보통신회사에 돈을 받고 팔아넘겼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문제는 멍 CFO 가 이 회사의 시실상의 CEO 역할을 하고 있던 2008~9 년 무렵,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근데 왜 이 사건에 미국과 캐나다 사법당국이 각각 개입하여 미국은 캐나다 사법당국에 멍 CFO를 체포해서 미국으로 넘겨줄 것을 요구하고, 캐나다는 캐나다대로 그를 밴쿠버 공항에서 체포한 것일까?
미국이 멍 CFO 에게 거는 혐의는 대이란규제위반혐의다. 멍 CFO 는 당시 문제의 정보통신회사 Skycom Tech 의 일개 이사에 불과했지만 모회사 오너의 딸로서 시살상의 모든 경영의사결정권을 행사했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이란-HP 사건의 주모자로 그를 지목해 온 것이다.
캐나다가 멍 CFO 에게 거는 혐의는 금융거래법위반이다. 캐나다로서는 미국이 걸고 있는 대이란규제위반혐의 따위는 알 바가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나온다. 즉 왜 캐나다가 외국인(중국인)이 외국(이란)에서 외국은행(HSBC)을 상대로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하느냐 하는 점이다. 아마도 당시 멍 CFO 가 캐나다 영주권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캐나다에 살 당시 Sabrina 또는 Cathy 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2009 년 무렵 중국으로 영구귀국하면서 캐나다 영주권을 포기했다. 캐나다 사법당국 뿐 아니라 Revenue Canada (국세청)조사관들 또한 탈세 등을 이유로 연방검사실에 얼굴을 내밀고 그를 조사할 핑계가 있는 것이다. 멍 CFO 로서는 미국루트를 피해 멕시코로 가는 경유지로 캐나다를 택한 것 같지만, 별로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사건은 두 나라 간 무역전쟁과는 달리, 지금까지 표면에 별로 드러나지 않았던 두 나라간 제 5 세대 이동통신망 기술선점을 둘러싼 진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개전 신호탄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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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나는 지난 주 이 사건을 계기로
카메라 기능이 가장 뛰어나기로 유명한 저 회사의 P20 Pro 라는 이름의 새 기기를 새로 주문했다. 잘했죠?
갤럭시(집)와 아이폰(직장)만 주구장창 쓰던 터라 좀 망설이긴 했지만,
소심하게 살지말고 이번 기회에 다른 것도 좀 사용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