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동창회는 과학과 종교가 통합된 우주진화 세계관을 인식하며,
자연과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우주적인 신학과 신앙에 따라 고대 성서를 재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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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도 교회에서는 주일예배에 반드시 참석하고, 십일조와 주일헌금을 열심히 바치면 죽은 후 천국행 티켓이 보장되고 또한 교회에 바친 만큼 천국에서 백배 천배 보상을 받는다는 속임수를 억지로라도 믿으라고 강요한다. 또한 교회 내부에서 헌금 많이 내는 사람이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우선적으로 장로로 추대되는 악습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업에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어 좋은 차와 큰 집을 소유하고, 자녀들이 일류학교에 입학하고 변호사와 의사가 되면 하느님이 축복했다는 증거와 표본이 된다. 그러나 반면에 불치병에 걸리고, 교통사고가 나고, 사업에 실패하면 교회출석이 저조했고 헌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하느님이 징벌을 내렸다고 두려움과 죄의식을 심어준다. 그리고 성수주일에 대한 강박관념에 빠진 교인들은 주일예배에서 예수의 재림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 시간에 교회에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비상식적인 협박을 지겹게 듣는다. 이렇게 교회는 황금만능주의-물질주의-성공주의의 노예가 되어 하느님의 최우선은 물질적인 소유(having)이며, 인간의 존재(being) 즉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성스러움은 하찮은 것으로 치부된다.
2011년 경향신문에서 <한국인에게 명품은 일상>이라는 제목으로 맥킨지 보고서를 인용하여 보도한 적이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세계 주요국의 명품소비 경향을 설문조사한 결과, 세계경제의 위축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응답자의 46%가 1년 전에 비해 명품구입에 더 많은 돈을 썼다고 한다. 이 숫자는 중국(44%), 일본(6%), 미국(6%), 유럽연합(3%) 보다 가장 높았다. 이러한 추세는 수그러들기는 커녕 계속해서 악화되었으며 2018년 중앙일보는 <명품가방 없어서 못 판다 - 한국 시장, 종주국 프랑스 제치고 4위>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는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이란 소유(having)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이 되어야 하는 존재(being)에 있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예수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이야기를 소개했다: “무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했다. ‘선생님, 제 형더러 유산을 제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조심하여 모든 욕심을 물리치라.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그의 재산이 그의 목숨을 늘여 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비유를 말했다: ‘어떤 부자의 밭에 곡식이 잘 되었다. 그래서 그는 궁리한 끝에 속으로 말했다: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어 더 크게 짓고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 쌓아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쓰기에 넉넉한 좋은 물건들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너는 안심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했다: ‘너 어리석은 사람아, 바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느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누가복음서 12:13-21)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오늘처럼 소유욕구와 소비욕구가 높았던 때가 없었던 것같다. 또한 이기심(Ego)과 개인주의 욕구(Individual greed)가 점점 더 심해지기만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고급스러운 옷과 호화스러운 집과 비싼 차와 수입이 높은 직장과 사업을 소유해야 행복하고 존경도 받고, 많은 소유가 우리를 안전하게 하고, 또한 아낌없이 소비함으로써 우리는 특별한 사람으로 대접받는다는 잘못된 가치관과 망상에 빠져있다.
특히 안타까운 일은 오늘 기독교 교회들은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소유가 마치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인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신앙과 삶의 목적과 의미를 변질시키고 교인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이끌어 가고 있다. 교회 내부에서 참 인간의 본성과 존엄성은 황금만능주의와 성서근본주의에 의해서 땅바닥에 떨어졌으며, 오히려 인간의 가치는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으며, 얼마만큼 소비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측정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소유가 인생의 최대의 목적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도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가치관 속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가치가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현대사회는 수입과 소유와 수익을 개인적인 권리로 주장하고 이것들을 성스럽게까지 생각한다.” (참고: <인간의 마음> The Heart of Man, 1965). 에릭 프롬이 54년 전에 지적한 우리의 ‘병든 사회’는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이 여전히 우리의 수입과 소유와 소비가 적으면 우리는 무능력하다는 손가락질을 받기 쉽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다.
또한 에리히 프롬은 인간생존의 두 가지 양식, 즉 재산, 지식, 사회적 지위, 권력 등의 소유(having)에 전념하는 소유양식과 자기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여 삶의 행복을 확신할 수 있는 존재양식으로 구별한다. 그는 비정상적으로 산업화된 현대사회에서 소유양식이 최우선이고, 존재양식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세상 가치관에 큰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참조: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 1978)
소유(having)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존양식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 자신의 존엄성, 혹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에서 바람직하고 옳바른 관계는 우리와 다른 인간들과 생명들과 자연과의 평등한 관계이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따르면 인간과 하느님과의 원초적인 관계는 주종(主從)관계 즉 수여자(授與者)와 취득자(取得者)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는 물질적인 축복과 보상은 종교체계가 만든 상업적인 술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소유가 신앙과 가치관의 핵심이 되면 사회는 끝없이 불필요한 생산과 낭비라는 악순환을 낳게 된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입버릇처럼 외치는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말의 의미는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은 하느님과 동일하거나 또는 하느님 보다 더 소중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인간들은 자신들의 온전한 삶의 방시과 표현을 위해 하느님이란 은유적인 말을 만들었다. 따라서 하느님은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원초적으로 종교는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것이다. (참고: <Religion Is Not About God> Loyal Rue, 2005) 따라서 종교의 주체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야 한다.
소유(having)에 반해서 존재(being)는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속박당하지 않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진화하고 성숙해져 간다. 그것은 하나의 고정된 형식이나 관념적인 태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해가는 과정이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서로 나누어 갖고, 관심을 함께 공유하는 살아있는 관계가 된다. 살아있는 관계는 모든 생명들이 함께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어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한 몸으로 살아 가는 것이다. 이 사실은 종교와 철학과 정치가 간섭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다.
다행히도 오늘 우리는 암흑 속에서 작은 불빛을 보듯이 새로운 희망을 보고 있다. 많은 양심있는 사람들은 내가 외형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라는 과거의 패러다임(Earlier Paradigm)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고, 소유를 떠난 무소유의 자신이 참나(True Self – Soul)라는 새로운 패러다임(Emerging Paradigm)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참나로서 자신을 깊이 안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무엇이 중요한가를 아는 것이다. 외형적인 덧없는 물질들 속에서 안전과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고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할까봐 불안해 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자신의 참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생존의 두려움 때문에 이기심과 사심에 사로잡힌 몸나인 것이다.
기독교인이 되고, 교회에 다니는 목적은 내면의 눈이 뜨여지고 귀가 열려지고, 마음이 열려서 자신의 참나(Soul)를 깨달아 알고, 또한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하느님으로 믿어야 축복받고 구원받는다는 신성론과 구원론을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내면적인 깨달음을 통해 참 인간으로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구원의 길이고 행복의 열쇠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교회와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축복을 받고, 죽은 후에 육신의 부활로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소유의 교리를 만들어서 축복과 구원을 팔아먹고, 사람들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장사꾼 무당의 짓거리에 불과하다.
누가복음서의 예수는 소유와 소비의 외형적인 형상의 꿈에서 깨어나는 용기를 가지라고 도전하고 있다. 예수는 경고하기를 우리의 신앙과 삶의 의미와 목적은 외부적인 소유와 소비 차원에서 발견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외형적인 소유는 잠시 우리에게 편안함과 만족감을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심층적인 깊이가 없고 지속적이지 못하며 순간적이다. 또한 예수는 마태복음서의 산상수훈(5:1-10)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즉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내면적으로 깨달은 삶의 의미와 행복이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의 목적은 분명하다. 기독교인이 되는 목적은 이기심과 사심에 가득한 외형적인 형상들에 있지 않고 내면적인 의식의 전환에 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외형적인 형상들, 즉 육체적인 건강, 물질적인 부유함, 지적인 교육, 사회적인 지위, 등은 나의 신앙과 삶의 목적이 아닐뿐더러 “소위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도 아니다. 이것들은 단지 나에게 맡겨진 소중한 책임이다.
다시 말해, 외형적인 소유들은 예수를 따르는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소유에 집착하면 진정한 행복을 잃고 만다. 창세기 저자의 신앙고백처럼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의 형상을 입고 성스럽게 태어나 아무 필수조건없이 이미 자율성과 창조성과 잠재력과 가능성을 부여받았다. 이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의 여정이며, 최우선의 목적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목적이 삶 속에서 드러나서 완성되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신앙과 삶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 외형적인 소유들을 관리할 뿐이며, 외형적인 소유들의 주인도 아니고, 이것들은 그들의 축복과 행복도 아니다.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이란 외형적인 소유들이 온전하게 쓰여져서 완전하게 될 때에 비로서 깨닫게 되는 내면적인 의식상태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나는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다, 나는 축복받지 못했다, 나는 불행하다’는 죄책감과 불평과 고민에 빠져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느님이란 인간의 외부에 타자로서 인간의 요청에 따라 무엇인가를 주는 수여자로서의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 내면에서 느끼고 깨닫는 지혜와 진리이며 수많은 개체들로 이루어진 광활한 우주에서 궁극적이고 우주적인 통합 비전이다. 즉 하느님은 모든 개체들이 따로따로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을 이루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현실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폄하하고 이분법적으로 징벌하고 심판하는 그런 옹졸하고 편협한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이고, 사랑은 하느님이다. 사랑을 느끼면 하느님을 느끼는 것이다. 하느님이 외부에 타자로서 존재하면서 인간에게 축복과 사랑에 대한 필수조건을 부쳐서 누구에게는 더 많이 주고 누구에게는 덜 주는 보상관계의 이분법적인 교리는 믿음체계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상업적인 수단이다. 문제는 하느님의 의미를 자율적으로 느끼고 깨닫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장애물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교회의 잘못된 원죄론과 외형적인 축복론과 이분법적인 구원론의 교리와 우리 자신의 욕심, 이기심, 사심, 편견, 두려움이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역사적 예수는 선포하기를,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럽고, 살면서 성스럽고, 죽을 때에도 성스럽고, 태초로부터 축복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고, 계속해서 받을 것이고, 항상 행복하고 계속해서 행복할 것이다. 예수는 종교체계나 사회제도나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사람들을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밝혔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의 목적은 나 홀로 만의 목적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인종과 종교와 사상의 경계 넘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동의 목적이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이 공동의 목적을 받아들이고, 많이 가졌던 적게 가졌던, 많이 배웠던 적게 배웠던, 높은 자리에 있던 낮은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구원과 행복과 풍요로움의 원천은 외부적인 형상과 소유에 있지 않고 내부적인 상태와 존재에 있다. 구원과 행복과 풍요로움은 원초적으로 이미 우리의 내면에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타자로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필수조건들을 수행하는 조건으로 우리에게 보상으로 주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구원과 행복과 풍요로움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꼭 무엇을 소유하고 소비하는데 있지 않다. 영원한 풍요로움과 행복은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에게 온다. 이것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고, 그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도전하는 메세지이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