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선언이 미국측의 판깨기로 무산됐다. 27 일 밤과 28 일 새벽 하노이 호텔방에서 팍스뉴스를 시청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트럼프 대통령의 심경에 심각하고도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하노이를 떠나기 전 기자회견에서 피곤에 지친 표정으로 '내가 원했으면 백퍼센트 합의문에 서명했겠지만, 오늘은 서명하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서명하지 않았다'는 희한한 말을 남겼다.
사전에 합의문을 준비했고, 그 합의를 토대로 서명을 약속하고 두 사람이 하노이에 왔지만 '오늘은 서명하기 좋은 날'이 아니라 서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영변지구 플루토늄 및 우라늄 농축시설과 대조선제제관련 유엔결의 중 미국의 결심으로 실행이 가능한 5 개항 해제를 맞교환하는 것을 골자로 한 역사적인 합의서는 하룻밤 사이에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트럼프가 뜬 눈으로 호텔방안을 미친놈처럼 왔다갔다하며 날밤을 세우고 있던 그 시간, 미 하원 정부감독개혁위원회 청문회에서 무려 여섯시간에 걸쳐 쏟아져나온 자신에 대한 증언들은 대부분 새삼스러운 내용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온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정치적 반대자의 말이 아닌 수족과도 같은 최측근 집사 겸 변호사의 생생한 증언이었기 때문이다. 이 청문회는 이미 예정되어 있던 거였지만 막상 청문회에서 코언이 퍼부은 피맺힌 절규와도 같은 저주가 트럼프에게 준 정신적 충격은 대단했을 것이다.
특히 그가 코언에게 했다는 말 "내가 병신이냐? 베트남전에 가게?" 야말로 가장 사소한 폭로인 것 같으면서도 미국인들에게 더 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게 해 줄만한 한 마디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5 만 8 천 여 명이 전사했고 30 여 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트럼프 또래의 그 전쟁 희생자들 중 상당수는 아직도 생존해있다. 구정공세가 있었던 1968 년을 기준으로 한 시기에 58 만 여 명의 미국인들이 군인의 신분으로 베트남 땅을 밟고 서 있었다.
그들이 모두 마침 베트남에 가 있는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라는 작자에 의해 하루아침에 '병신이어서 전쟁터에 끌려나간 한심한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군인들 전부를 졸지에 '병신'으로 만든 장본인이 베트남전 당시 적국의 수도 하노이에서 조선에 대한 굴복합의문에 서명을 한다는 것은 미국의 입장에서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트럼프 자신도 스스로의 처지를 깨닫고 화들짝 놀랐을 것이다.
이미 파장을 예측했던 나쁜 상황이라도 그 상황이 실제 도래하게되면 그 파장의 강도가 예측했던 수준과 비교할 수 없이 확대악화되는 경우가 많다. 2019 년 2 월 28 일 하노이의 미국측 협상팀의 상황도 그랬을 것이다. 미리 마련되어 있던 조미합의문의 수준으로는 위기상황의 정면돌파는 커녕 오히려 재난이 배가될 수 있겠다는 판단은 논리적인 근거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위기에 몰린 맹수와 같은 직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러시아간첩혐의에 더해 적국 조선에 대한 외교적 배임혐의까지 뒤집어쓰면 살아남을 방도가 없었다.
상황전개를 사실에 가깝게 추론하기 위해서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단독회담후 정원을 산책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드러난 두 사람의 표정을 면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고, 그에 비해 비교적 밝은 편이었던 김정은 위원장의 표정에서는 간혹 의아함과 황당함을 엿볼 수 있다. 그 복잡한 표정이 무엇에서 기인한 것인지 당시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 단독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실무진들이 보고한 합의문과는 몹시 동떨어진 엉뚱깽뚱한 요구를 김정은 위원장에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요구 앞 뒤로는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이 봐요, 체어맨, 아니,, 나의 사랑하는 친구, 나 한 번 만 살려 줘. 나중에 크게 보상할게"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결렬 후 기자회견에서 '조선이 제재의 전면해제를 요구했기 때문에 회담이 결렬되었다'는 그 거짓말을 역으로 추론해 보면 이런 결론이 가능하다. '영변 외에 핵물질 생산시설과 탄두 리스트를 나에게 제공하면 전면제재해제를 약속하겠다'는 제안을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했을 가능성이 압도적이다. 적어도 이 정도는 받아가야 미국에 가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는 계산이 스쳤기 때문에 이런 요구를 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갑작스런 요구는 외교관례를 벗어난 문제를 떠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결코 들어줄 수 없는 황당한 망발이나 다름없었다. 첫째 대조선제재 유엔결의는 트럼프가 멋대로 변경을 약속하고 말고 할 사항이 아니었다. 그런 사정을 잘 아는 조선 역시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둘째, 회담의 본질이 사실상 미래의 군축이므로 영변지구 외의 핵물질 생산시설은 비록 서로 알고 있다 하더라도 거론을 하지 않기로 합의한 사항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견고하게 구축된 그 합의를 이제와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깨는 것도 용납할 수 없으려니와, 밑도끝도없이 구걸하는 표정을 하며 이런 황당한 요구를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야 기자회견에서 최선희 조선 외무성 북아메리카 부상이 한 말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의 협상문화를 이해할 수 없어한다'는 고백에서 지칭한 미국은 사실 미국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 개인을 의미한다. 말은 고상하게 표현했지만 사실 이 말은 '세상살다 그런 미친놈은 처음 봤다'는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조선이 이 날의 파국적 결과가 미국측이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기획한 설계에서 비롯됐다고 판단했으면 김정은 위원장과 조선측 대표들의 얼굴표정에서 분노와 증오가 조금이라도 엿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회담 결렬 후 그들이 보인 표정은 무언가 상대측의 내막을 알고 있는 듯한 황당함과 어이없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조선에서 온 날고기는 협상전문가들이 아니더라도, 바보스런 음모론자만 아니라면 저게 미국측에 의해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기획된 설계가 아니라는 것쯤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들은 미국측 카운터파트인 대안우파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강대한 the establishment 의 파상공세에 너무 쉽게 굴복하지 않고 페이스를 지켜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실망 속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인내심과 침착함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그건 그렇고
싸르니아는 지금으로부터 2 개월 전인 지난 해 12 월, 일찌감치 파국의 조짐을 느끼고 '잘못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 글에서 이런 말을 했다.
미국에는 트럼프 백악관만 있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강대한 국제주의 개념의 패권주의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들은 조미협상타결 조건으로 조선에게 전략무기체계 전체 리스트를 내 놓으라는 요구를 하라며 트럼프의 멱살을 붙잡고 닥달을 하고 있는 중이다.
즉 백기항복하면 친구도 되어주고 투자도 해 주겠다는, 상대가 전혀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협상이 깨지다라도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니 꿈을 깨고 좀 더 현실적인 조건을 제시해야 할 것인데 그들은 고집불통이다. (너네라면 리스트 다 주고 무기 내려놓겠니? 차리리 협상을 깨고말지)
더 큰 문제는,
그들의 표적이 조선이라보다는 트럼프를 실각시키는데 대조선협상실패를 하나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엎친데 겹친격으로 현재 조선과 좋은 캐미컬을 유지해왔던 트럼프는 그 주변인맥이 지리멸렬하고 있는 정도를 넘어 혼자 외톨이처럼 남겨진 형국이다.
지금 온 신경을 집중하고 주목해야 하는 포인트는 김정은 위원장이 언제 방남하고 어디 어디를 방문할 것인가가 아니라,
특검수사결과발표를 앞두고 갈수록 사면초가에 몰리기만 하고 있는 트럼프가 언제까지 파상공세를 견뎌내며 대조선협상국면의 페이스를 지켜나갈 수 있을지 여부다.
허송세월의 책임은 조선이 아닌 미국에게 있는데,
시간이 조선편이 아니라는 점에 고약한 딜레마가 있다.
이 시간이 너무 빨리 도래해서 혼란과 정체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미담판의 결과를 가까운 미래에 다시 볼 가능성은 사실상 반감되었지만,
그렇다고 천둥벌거숭이처럼 제 세상이나 만난 듯이 멍충이처럼 날뛰고 있는 한국의 태극기부대의 희망사항처럼 판이 거둬진 건 아니니까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