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을 떠난 지 반세기도 훨씬 지났습니다. 그중 25년이란 세월을 캐나다에 정착해 살면서 요즘 여러 가지 상념에 잠기는 때가 많습니다. 캐나다 시민이 되어 참정권을 행사한 것과 세금을 낸 것, 캐나다 법을 준수하며 살아온 것으로 캐나다 시민의 의무를 열심히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 캐나다 이민 생활에 회의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매해 뉴스거리 하나인 세계에서 살기 좋은 나라 중에서 캐나다는 언제나 높은 점수를 얻고 (5위 내 순위), 타 국민이 이민하고 싶은 나라로는 항상 1, 2순위에 해당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도 25년 전의 나처럼 캐나다가 복지의 천국이란 환상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하게 됩니다. 과연 캐나다의 어떤 매력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불러오는 걸까요.
1) 캐나다의 장점은 공해가 없어 공기가 깨끗하고 자연환경이 아름다우며 공원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겨울이 6개월이나 되어 추위를 장시간 견뎌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자주 분노를 하거나 쉽게 싸우지 않습니다. 파업도 자주 일어나지 않고 서울이나 모스크바처럼 큰 광장이 없으니 사람이 많이 운집한 시위 행렬도 보기 쉽지 않습니다. 모두가 매사를 이웃과 비교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분수만큼 조용히 살아갑니다. 그래서 생기는 상대적 박탈감이 없습니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생활방식입니다.
2) 25년 전에는 인종차별이 심했지만 지금은 법률로 인종차별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차별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아직 존재합니다.
3) 유치원부터 고교까지 무상교육이지만 무상 급식은 없습니다. 그래서 초등학생의 경우 도시락을 가져오지 못하는 빈곤층 아이가 있으면 학교 자체에서 일반 학생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교과서는 대체로 자비로 사야 하며, 전문대학, 일반대학도 한국 대학들에 버금가는 상당한 등록금을 내야 합니다. 그 대신 등록금이 없는 학생은 정부에서 대출을 해주고 졸업해서 직장을 잡으면 바로 정부에 갚기 시작해야 합니다.
유치원 과정 1년은 초등학교에 속해 있어 무료입니다. 그러나 직업을 가진 부모의 유아들이 지내는 유아원은 무료가 아닙니다. 한 달에 50만~70만 원(한 자녀당) 정도의 교육비를 개인이 유아원에 내야 합니다. 유아원에 보낼 수 없는 부모는 집에서 아이 돌보미를 고용해야 하는데 한 아이당 100만 원 이상 듭니다. 물론 여러 명을 돌보는 동네 아줌마에게 맡길 때는 그보다 비용이 적죠.
4) 저소득층 가정이 자녀지원금을 정부에서 받는 경우는 아주 까다롭고 한 달에 10만 원 수준입니다. 소위 우윳값이라고 주는 거지요. 한 가정의 부부 소득이 1년에 캐나다화 2만 달러(약 1,700만 원) 미만이면 2만 달러를 채워주는 정부 최저소득 지원금을, 1인 소득이 1년에 1만 달러 미만이면 그에 합당한 지원금을 받습니다. 최저생활비 보장제도입니다.
5) 캐나다는 세금이 무척 높습니다. 최고 수준 소득자의 소득세는 43~47%이며 매번 외식이나 상품, 식품, 약품 등 물품과 집, 자동차를 구매할 때마다 부가가치세 13%를 냅니다. 그러나 미국처럼 주택 융자와 자동차 융자의 이자에 대한 소득 공제액이 없습니다. 그 대신 상속세는 없으며 한 가구 한 주택에 대한 양도 소득세도 없습니다.
6) 노인 연금은 40년 캐나다 거주자(영주권 취득 후 실제 거주기간)에게는 캐나다화 540달러(46만 원) 전액을 지급하고 20년 거주자에게는 540달러의 절반 정도인 270달러에서 소득세를 뺀 나머지 240달러를 지급합니다. 국민연금(직장인들이 직장에서 내는 연금 저축)인 캐나다 펜션도 40년 거주자에게는 많은 경우 800~1,200(68만 원~102만 원 정도)달러가 지급되지만 40년 거주자가 아니면 거주한 기간만큼만 계산되는 것입니다. 25년 거주자인 나는 비록 시민일지라도 노인 연금을 245달러(21만 원)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이민법은 이민자에게는 매우 불리하고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소득세를 수십 배 더 낸 20년 거주 이민자보다 소득세를 많이 내지 않은 40년 거주자가 더 많은 정부 연금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되니까요. 이민자에게는 매우 차별적인 정책입니다.
7) 캐나다는 많은 식품과 일상용품을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 나라입니다. 또 국가 면적은 넓은데 각 주에서 주까지, 도시에서 도시까지 연결되는 인프라가 잘 되어있지 않아 운송이 쉽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생활비가 미국보다 30%는 비쌉니다. 특히 한국 식품비가 매우 비싸서 한국인은 더 많은 지출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생활비와 미국이나 일본, 한국에 비해서 월등 높은 세금으로 생활비가 많이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주택 구입비도 7년 동안 300% 폭등하여 심각한 상황입니다. 물론 부동산 임대는 1년 단위의 인상률을 법으로 정해서 연 3% 이상 올릴 수 없습니다.
8) 교통 문제는 최악입니다. 온타리오주의 상징적 도시인 토론토가 세계에서 최악의 교통도시 1위로 선정된 것을 아시는지요? 그만큼 제조업의 요충지 GTA(Great Toronto Area)가 교통 체증으로 한계를 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산이 없어 지하철 확장이나 버스 노선 확장에 큰 계획을 세울 수 없어 내가 살아온 25년 동안 새로 건설된 고속도나 대로가 별로 없습니다. 공공 교통시설이 잘되어 있지 않으니 자동차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 체증은 당연하지요. 그동안 많은 이민자가 일거리가 많은 온타리오주, 토론토 근교로 몰려와 주택 건설업만 붐이 일어났고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습니다. 그러나 길은 예전과 같으니 늘어난 자동차를 감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9) 문제 많고 빛 좋은 개살구 격인 캐나다의 의료정책에 대해서 말해볼까요?
심각한 수준을 넘어 국민의 건강에 치명적입니다. 얼마 전 캐나다인 친구가 말하길 엉덩이 고관절 수술 예약이 정체되어 대기자 명단에 지금 올리면 2년 기다려야 수술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충격적입니다. 20년 전 내가 암 수술을 받을 때만 해도 암 확진 후 2개월 만에 수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의사가 부족하여 응급실에 가도 의사가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의사가 할 일을 간호사가 함으로써 손바닥뼈가 부러진 나의 지인은 간호사가 응급으로 해준 깁스가 엉터리여서 치료가 끝날 때까지 매우 고생을 했습니다. 나 또한 가정의에게서 받은 진료의뢰서로 위장 대장 내과 전문의의 진료 예약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무려 4개월이 넘었지만 아직도 전화가 없습니다. 전문의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지요. 그런데 의사 기다리다가 죽을 것 같은 환자는 무조건 병원 응급실로 가라는 가정의의 전언입니다. MRI, CT 검사는 최소 2~5개월 기다려야 합니다. 피검사는 예외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1년에 한 번입니다. 마음대로 한국처럼 병원 찾아다니며 진료와 검진을 받거나 수술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민영 치료기관이 법적으로 불가능한 캐나다 의료 시스템은 이민자가 늘어나는 데다 무료인 데 반하여 의료수가는 낮아서 많은 의사가 미국으로 떠나기 때문에 의사 품귀현상으로 수술 대기자, 검진 대기자들이 끝도 없이 기다려야 하는 처지입니다. 내 주변에서 많이 목격한 것은 특히 70세 넘은 노인들이 병원에 들어가서 의사 기다리다가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적체에 대한 불만이 쌓여 국민들의 청원도 있었던 탓인지 온타리오주 정부는 이번에 부분적으로 일부 병원 검진센터 민영화 정책을 시행하자는 의제를 냈습니다. 무료가 아닌 개인 지불 의사가 있는 환자에게는 빠른 검진과 치료, 수술을 받게 하는 법안을 상정하겠다고 했으나 현재 반대에 부딪혀 있는 상황입니다. 무료 의료의 허상이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고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만, 돈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은 위화감 조성이라는 이유로 모든 병원이 아닌 일부 병원의 민영화조차 좌파(자유당)세력과 저소득층의 반대로 무산될 것 같다고 합니다.
작년 온타리오주 총선에서 10년간 정권을 유지했던 트뤼도 총리가 당수인 좌파 자유당이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말실수를 자주 하던 총리의 인기가 떨어졌지만 최저임금 급격인상으로 인하여 물가는 오르고 부동산가격도 치솟아 집 사기가 어려워진데다 실업률이 높아진 것입니다. 서민층뿐만 아니라 중산층의 삶 또한 점점 어려워지는데도 인권 국가, 복지국가만을 자부하는 좌파 자유당의 정책에 염증을 느낀 온타리오 주민들의 반기였습니다. 자유당 좌파 시의원은 3석을 얻어 당명까지 없어지는 창피한 상황이 돼 온타리오 자유당은 정부의 어떤 지원도 받을 수가 없게 됐습니다. 많은 난민과 이민자들이 몰려왔으나, 일하지 않고 정부에서 생활보조금을 타서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며 꼬박꼬박 세금 내는 국민의 박탈감과 원성이 높아진 탓입니다. 캐나다 시민이 된 후 선거 때마다 계속 좌파 자유당을 지지했던 나 역시 이런 이유로 작년 선거에서는 보수당을 택했습니다.
모범 복지국가로 알려진 캐나다에서도 점점 시민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있고, 정부 역시 재정이 어려워 오히려 복지를 줄이고 세금을 줄이자는 국민의 탄원이나 시의원들의 제안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복지정책은 세계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는 듯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25만 원 여행비를 지원, 무작위로 청년 1,600명에게 50만 원 수당 지급을 검토한다는 서울시를 비롯하여 공무원들의 해외여행 붐을 일으키고 있는 전국 지자체의 선심성 정책은 물론이고, 대통령의 “임기 내 전 국민 기본생활 보장”, “돌봄에서 노후까지 생애 전 주기 국가가 뒷받침” 같은 보편적인 복지를 실현하겠다는 구상은 참으로 어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증세 없이 실현하겠다는 내용입니다. 대통령의 임기가 겨우 3년쯤 남았는데 무슨 수로 가능할까요?
매번 북한에 대한 지원, 철도 부설, 경제 협력 등을 강조한 대통령은 이 많은 것들을 증세 없이 꾸려나갈 수 있을까요? 지적 수준이 높은 한국 국민 모두가 이 말에 공감을 할지 의문입니다. 아니면 대통령은 ‘금 나와라 뚝딱’ 도깨비방망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모두가 부러워한다는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복지국가, 고율의 세금을 걷어가는 국가인 캐나다에서도 그런 정책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정권 연장을 위해서나 선거용 전략으로 쓰는 포퓰리스트들이 하는 포장인데 이곳 캐나다에서는 감히 그런 약속으로 국민을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선심성 복지정책으로 망해가고 있는 베네수엘라, 1000% 물가 상승률을 견딜 수 없는 그 나라 국민들이 난민으로 전락해 그 행렬이 끝이 없다고 합니다. 미국과 캐나다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만 미국이나 캐나다가 그들을 맞아줄 관용이 남아있을까요? /오마리 패션디자이너, 현재 캐나다 토라노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