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서기원 선생님은 내가 중학 시절,
방과 후에 아버지 심부름 차 들렸던 중학동
서울경제 편집국 사무실에서 처음 뵈었다
그 이후, 오랜 세월 흐른 후에 내가 은행원 생활을 할 때
경기도 고양시 화정에서 집필하시던 선생님을 인사차
찾아뵜던 것이 선생님에 관한 마지막 기억으로 남았다
하늘나라에서도 天上의 소설을 쓰고 계시리라
생각된다
-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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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70청년 기자, 작가
요즘 장관들 너무 잘다
印泰植(인태식) 장관 쯤은 돼야
경기 화정서 글쓰는 徐基源(서기원)씨
화려한 언론경력으로 세상 질타
글/朴美靜(박미정 편집위원)
▲ 70 청년의 기자,작가 <徐基源(서기원) 전 KBS사장> (1930 ~ 2005) [ ‘공식동네’에 못살면서 “난 행운아요” ] 서울에 살고 있는 이른바 지도층 인사들의 과반수가 강남구나 성북구 등에 몰려 살고 있다는 통계 수치를 본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 그것도 서울에서 웬만큼 행세 깨나 하고 산다는 사람들은 아닌게 아니라 대부분이 강남구, 혹은 그 근처 동네에 거주하고 있는 현상은 이제 거의 공식적인 사실이다. 그렇기에 유명인사가 소위 ‘공식 동네’에 살고 있지 않으면 일단은 의아하게 여기는 것도 일종의 고정관념처럼 되어버린 것이 요즘 세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세속적인 고정관념의 잣대에서 볼 때 서기원(徐基源) 전 KBS사장을 만나러 가는 길은 꽤 멀었지만 오히려 신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방송사 사장을 역임했고 서울신문사 사장과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 경력들을 합산해 세속의 잣대로 ‘근수’를 매긴다면 영락없는 ‘강남시민’이어야 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경기도 고양시 화정이라는 위성도시에 살고 있는 원로 언론인의 자세는 조금도 꿀리지 않고 당당해 보였다. 자신의 인생에 운이 따랐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촌각의 여유도 주지 않고 바로 “나는 행운아요”라는 외침이 되돌아 올 정도로 여전히 청년 기백이 넘친다. 원로와의 인터뷰는 시종일관 핑퐁게임 같은 분위기를 유지했다. 70객(客)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순발력과 비판력 그리고 사물을 보는 센스가 그를 ‘70 청년’으로 유지시켜주고 있는 비결 같기도 했다. 게다가 황순원 선생의 추천으로 57년 문단에 정식 데뷔, 현대문학 신인상 동인문학상 한국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왕조의 제단’ ‘광화문’ ‘조선백자 마리아상’ 등 수십편의 역사소설들을 펴낸 ‘작가’로서의 권위가 자칫 쓸쓸해질 수 있는 노년을 당당하게 버텨주고 있는 듯 했다. [첫 출입처 재무부… 서랍 뒤지며 취재] 1956년 가을 동화통신 공채 1기생으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주로 경제부에서 잔뼈가 굵었다. 서울 상대를 다닌 학력이 감안돼 경제부로 배치된 것이다. 당시 부장은 경제부 기자 1세대인 안정모(安正模)씨였다. 사장 정재호(鄭載護)씨가 창사에 대비해 쟁쟁한 인재들을 데스크로 스카우트 해 왔었다고 한다. 서기자는 두달 간의 견습 훈련이 끝나자 곧바로 재무부를 출입을 했다. 당시 재무부는 경제 부처 중 핵심 부처로 각 신문사에서도 이름있는 민완기자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김성열(金聖悅, 동아), 방우영(方又榮, 조선), 신영수(申英秀, 한국), 설한준(薛漢俊, 동양통신) 등 우리나라 경제부 기자 1세대들이었다. 당시에는 일요일에도 가끔 출입처에 나가 관리들의 책상 서랍을 슬쩍 뒤지면서 취재에 열을 올리고 특종을 뽑아냈던 ‘열정의 시대’였다고 한다. 특히 분기별로 나오는 재정계획안은 놓칠 수 없는 기사였다. 이 계획안은 그 분기의 예산 집행과 금융신용 정책 등에 관한 마스터 플랜인 셈 이어서 예산안 보다 더 비중이 높은 취재 대상이었다. 당연히 1면 톱 기사를 차지하곤 했다. 기억에 남는 장관얘기를 하면서 그는 “요즘 장관들이 너무 잘다”고 일갈했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 장면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면 총리부터가 뭘 적고 그러는데
그런 일은 공산국가에서도 없는 일이다”고 단호하게 덧붙인다.
그러면서 잊지 못할 ‘명재상’으로 자신이 갓 재무부 출입할 당시 장관으로 있었던 인태식(印泰植)씨를 꼽았다.
[좋았던 시절… 국장도 막강]
“인 장관은 아침 10시 반쯤 출근해서 모든 업무를 차관에게 알아서 하라고 일임하는 스타일이었지,
중요한 것 아니면 결재도 하지 않고.
점심때 나가면 낮술하고 저녁에도 안 들어오고, 정객들을 만나 보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근무 스타일이 다 좋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한 나라의 장관 정도 되면 그만한 배포와 경륜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물론 요즘 같은 복잡하고도 위기에 선 경제실정에서야 그런 ‘여유’는 통할 법하진 않지만
어쨌든 웬만한 것은 일본처럼 국장 선에서 실무를 끝내고 장관은 큰 테두리의 일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하기야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일거리도 많은 선진국이지만 대체로 ‘엘리트 관료’들 선에서
실무가 완료되기에 안정된 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선동가적 면모가 강해 보이는 다나카 마키코라는 외무장관이 과장 인사조차 마음대로 못한다면서
눈물을 떨구는 사진을 보면 일본의 ‘관료 파워’가 실감나기도 한다.
이런 튼튼한 관료 구조가 있다면 우리도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는가!
인태식장관이 워낙 스케일 크게 ‘노는’ 한량 스타일이었던 탓인지 당시 재무부 출입기자들 역시
‘호연지기’의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한다.
차관정도는 기자실로 불러다(?) 얘기를 들었고, 국장 방은 아무 때나 드나들었다.
과장들은 아예 잘 만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행정을 잘 몰랐던 탓에 장관들에게 모든 일을 거의 다 맡겼다.
자연히 장관들의 권한은 지금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고,
각 국장들의 권한도 덩달아 셌다. 좋은 시절이었다고나 할까?
[환율 특종 후 宋仁相 장관과 격돌]
서기원씨는 재무부 출입 기자 4년 만에 조선일보로 스카우트되었다.
당시 조선의 출입기자였던 방우영씨가 상무가 되어 회사로 들어가 후임을 맡았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정치부에 가서 좀 뛰고 싶었지만 결국 재정금융 전문기자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재무부 출입 초년병시절 기억에 남는 일화는 많지만 송인상(宋仁相)장관과의 에피소드는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유엔군 사령관이 한국 정부에 환율 현실화를 요구하는 공한을 강경한 어조로 보내왔다.
서씨는 이를 단독으로 입수, 보도했다. 이승만대통령이 대로해 당시 송장관을 불렀다.
이 대통령을 만나고 온 송장관이 바로 ‘서기자’를 보자는 연락을 보내왔다.
장관은 기자를 보자마자 “당신이 서기원 기자냐? 이 사람아, 그런 공한을 재무부측 얘기도 안 듣고
보도하면 어떻게 하나”고 항의투로 말했다.
기백이 철철 넘치던 시절이었던 만큼 “견습 갓 떨어져 가지고 특종을 뽑으려고 불철주야 뛰고 있는데
이런 큰 기사를 어떻게 보도하지 않을 수 있냐”고 반문했다.
장관은 올챙이 기자의 패기를 높이 사서인지 악수를 청하면서
“미스터 서, 앞으로 나하고 잘 해봐”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송장관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재계의 중책을 맡고 있을 때 어느 리셉션 자리에서 만났더니
“미스터 서, 잘 만났다. 감옥에 있을 때 ‘세대’잡지에 실린 환율 변경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호감을 표시했다.
‘환율 변경’은 경제기자 경험을 토대로 쓴 일종의 경제소설 비슷한 단편이었다.
송장관은 서울상대 전신인 경성고등상업학교 출신으로 선배인 셈이어서
그 이후로 송장관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 1997년 문학의 해 조직윈원장 시절, 조순 서울시장과….> [젊은 혈기로 집어 던진 사표]
61년 조선일보로 옮긴지 1년쯤 되었을 때 윤주영(尹胄榮)씨가 편집국장으로 왔다.
조선일보 내부에선 반발도 꽤 컸었지만 그의 능력과 업무 추진력으로 차츰 기자들의 신뢰를 얻었다.
윤씨는 집에도 안 들어가고 야전침대를 갖다놓고 편집국 일에만 매달렸던 것이다.
당시 조선 경제부에는 정대영 부장을 포함, 6명의 기자가 있었다.
서열이 중간쯤이던 그는 경제기획원이 생기면서 출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쓴 기사가 문제가 되어 윤국장과 트러블이 생겼고 결국 조선을 떠났다.
1면에 경제문제 시리즈 기사를 썼는데 정대영부장은 ‘좋다’고 했지만 윤국장이 다시 쓰라고 했다.
나름대로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15장 쯤 다시 썼지만 또 퇴짜를 맞았다.
화가 치밀어 바로 국장에게 달려가 “잘못된 곳이 있으면 가르쳐줘야지,
두 번씩이나 퇴짜를 놓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대접 받으며 여기 있고 싶진 않습니다.” 라는 항변과 함께
즉석에서 사표를 던지고 짐을 싸서 나왔다.
방우영 상무가 만류했지만 ‘젊은 혈기요, 객기’로 뿌리쳤다. 당시 젊은 기자들이 다반사로 연출했던 장면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 서울신문 경제부 현경득 차장이 전화를 걸어와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또 즉석에서 내일부터 나가겠다고 수락했다.
젊은 ‘서기자’의 단기(短氣)한 면모와 함께 그 시절 후덕한 인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인 듯 싶다.
요즘 같아선 어디 그런가. 어디서 짤렸다 하면 그냥 ‘찍히고 말아’ 재기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처럼 보여지는
각박한 요즘 세태와는 달라도 한참 다른 ‘그때 그시절’이었다.
<▲ 대하소설 ‘ 광화문’ 집필 이후 서기원씨>
[보스 安正模(안정모) 호출 받아 서울경제로]
63년 7월 안정모 서울경제신문 편집부국장이 ‘동업’제의를 해왔다.
언론계에 머리를 올렸던 견습기자 시절 경제부장으로 모시고 있던 ‘영원한 보스’로부터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 시절에는 ‘한 번 보스면 영원한 보스’로 오라면 무조건 가는 것이 거의 불문율이었다.
더구나 서울경제는 우리나라 첫 경제신문이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때는 종합지에서 경제지로 가면 기자의 격(格)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보스의 명령에 감히 항명할 수 없었다.
그때 인상 깊었던 기자로는 현 삼성경제연구소 사장 최우석(崔禹錫)을 들 수 있다.
그는 그 때부터 탁월한 능력을 발휘, 두각을 나타냈다.
65년 서울신문 조용중(趙庸中)편집국장이 주일특파원 자리를 제의해 왔다.
체면치레로 일단 사양했지만 속으로는 ‘이게 웬 떡’ 하며 쾌재를 불렀다.
결국 서울신문에는 재입사한 셈이 되었다. 그해 가을 도쿄에 단신 부임했다.
도쿄에는 꽤 큰 지사가 있었다. 지사장 밑에 직원도 3명이나 있었고, 특파원 방도 따로 있었다.
당시 각사 특파원은 유혁인(柳赫仁, 동아) 김윤환(金潤煥, 조선) 이원홍(李元洪, 한국)
정재호(鄭在虎, 경향) 한종우(韓鍾愚, 동양통신) 등 모두 쟁쟁한 인재들이었다.
기사경쟁이 치열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훗날 관계로 혹은 정계로 진출해 역량을 발휘했다.
기자가 관계로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도 있으나 기자도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서기자’ 자신은 관료로 출세해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일특파원 시절 자신이 쓴 기사 중에는 ‘성공한 재일 동포’라는 시리즈 기획기사가 기억에 남는다.
당시 롯데사장 신격호(辛格浩), 방림 방적 사장 서갑호(徐甲虎), 거류민단장 권일(權逸) 등 입지전적 인물들을 만나,
그들의 애환과 성공 스토리를 소개했다.
훗날 KBS사장이 되어 도쿄를 방문했을 때 왕년의 ‘서 특파원’을 기억한 신격호회장이 아카사카의 일류 요정으로 초대해
근사한 저녁을 얻어먹기도 했다.
[太부총리, 대변인을 손님 대접]
도쿄 특파원은 1년 반쯤 했다. 본사로 들어와서는 문화부장을 맡았다.
부원으로 신우식(申禹植), 김후란(金后蘭) 등이 있었다.
문화부장은 한달만 했다. 67년 봄 다시 동화통신으로 돌아가 경제부장을 맡았고, 편집부국장 업무도 겸했다.
당시 방적업계의 거물이었던 정사장은 돈 쓰는데 인색해 정치적으로 미움을 샀고 결국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70년 말경 중앙일보 주필 홍성유씨가 논설위원으로 올 것을 권했다.
동화의 앞날이 밝지 않아 고민하던 차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시 중앙에는 홍주필외에 신상초(申相楚), 김철수(金哲洙), 홍사중(洪思重), 최정호(崔禎鎬) 등이 활약하고 있었다.
대우도 국장급에다 출근 때는 차도 보내주었고, 이병철(李秉喆)회장이 가끔 점심을 사주는 등 대우가 꽤 괜찮았다.
당시에는 1면에 나가던 ‘분수대’를 알차게 꾸며 인기를 얻었다. 이 난은 주로 홍사중씨와 최정호씨가 썼다.
편집국장은 김인호(金寅昊), 부국장은 이광표(李光杓)씨였다.
72년 말경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김성진(金聖鎭)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학동기인 이광표씨가 상공부 대변인으로 들어가기로 했으니 나머지 경제부처 중 골라서 하나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경제기획원 대변인 자리를 맡게 된 것은 73년 초.
17년간 몸담았던 언론계를 떠나 관계로 나가게 된 것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김성진씨와 정무수석이던 유혁인,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김정렴(金正濂)씨가 추천했다고 한다.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태완선(太完善)씨였다.
그는 새로온 대변인을 부하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처럼 대했다.
요즘 말로 좀 썰렁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비교적 친화력이 좋은 ‘서대변인’이 이를 간과했을 리 없다.
<▲ 1969.5월 아시아 신문재단 주관 아시아 경제기자 세미나 에서…>
[崔秉烈(최병렬) 수석 ‘徐선배가 가라앉히세요’]
어느날 날을 잡아 “부총리께서 저를 데려온 것은 아니지만 대변인으로서 성심성의껏 모시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저를 신뢰하시지 않으니 제 입장이 난처합니다”라며 언중유골의 농담투로 ‘진언’을 하자 장관의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기획원에는 황병태(黃秉泰, 차관보) 강경식(姜慶植, 물가국장) 진념(陳捻, 물가과장) 강봉균(康奉均, 사무관) 등
재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74년 9월 남덕우(南德祐)씨가 부총리로 취임했다.
사표를 냈지만 반려됐고, 신뢰를 얻어 웬만한 매체의 연말 연시 인터뷰는 대변인이 모두 알아서 했다.
대변인 생활 3년쯤 했을 때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가 당신을 달란다’는 부총리의 말씀이 있었다.
마침 신분변화를 궁리하던 시절이어서 솔깃했다.
이렇게 해서 76년 초, 최국무총리 공보비서관으로 부임했고, 결국은 과도정부 시절
청와대 공보수석 비서관을 맡게 된 것이다.
국무총리 비서관 생활 3년 반이 지났을 무렵의 일이다. 역사적인 순간 순간들을 직접 목격하고 겪으면서
80년 8월 최 대통령이 하야하던 날 함께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그 후 80년 행정개혁위원회 상임위원, 82~87년 서울신문 상임감사 등으로 일했다.
88년 3월에는 문예진흥원장자리를 반갑게 맡았다.
명색이 소설 쓰는 사람이어서 그 쪽일은 언제나 ‘나의 일’이라는 생각이 컸다고 한다.
진흥원장 자리를 한 5개월 쯤 하고 있을 때 정무수석비서관인 최병렬(崔秉烈)씨가 부르더니
‘서울신문 사장으로 가라’고 했다. 당시 서울신문은 민주화 물결을 타고 노사쟁의가 발생해
사장이던 이광표가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며 보따리를 싸고 떠나버렸다.
최병렬씨가 “서 선배는 거기서 기자, 감사를 했으니 서 선배가 가면 가라앉을 것”이라며 졸라댔다.
여러차례 거절은 했지만 결국 일할 운이었는지 사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대를 이어 서울신문으로 금의환향]
‘간부 인사에는 간여하지 말아달라’는 조건을 내걸고 서울신문을 맡으면서 감회가 깊었다.
기자, 주일특파원, 감사로 일했던 사람이 ‘금의환향’이라면 좀 어폐가 있지만 여하튼 최정상의 ‘사장’에 오른 것은
그야말로 기네스북 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게다가 부친 서내석(徐乃錫)씨도 서울신문의 전신인 매일신보의 기자출신이었으니 대를 이은 ‘인연의 고리’에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작가의 감수성’을 더했으니…. 당시 서울신문 노조의 주장은 노조가 편집국장을 임명하겠다는 것이었으나 ‘서 사장’은 그것만은 안된다는 마지노선을 분명히 그었다. 파업이 21일 동안 계속되었지만 다른 방에다가 기자들 몰래 ‘별도의 편집국’ 진지를 구축하고 신문을 어떻게 해서든 발행하도록 만들었다. 노조와의 협상도 병행했다. 사장이 편집국장을 임명하고 1년 후 노조에서 의견이 있으면 국장, 부장, 차장, 기자로 구성되는 대표를 뽑아 그 의견을 사장에게 상신하면 참고하겠다는 부대조건을 제시한 것이 주효해, 쟁의는 타결점을 찾았다. 그러나 무노동, 무임금 원칙은 지키겠다는 말에 다시 노조가 시끄러워졌다. 그 때 이상우(李祥雨)상무가 ‘잔업을 시키자’는 묘안을 내와 결국 회사는 정상화되었다. 서울신문 사장으로 한 1년 반쯤 일했을 때 또 최병렬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시 최씨는 공보처 장관이었다. 느닷없는 제의가 들어왔다. 물론 굿 뉴스였지만. “KBS 사장을 맡 아주시라”는 얘기였다. 서울신문이 ‘마지막 직장’이라고 여겼고, 그 자리를 뜨면 본연의 자리인 ‘작가’로 돌아가 작품 활동에 정진하겠다는 포부까지 세워놓은 마당에, 더구나 당시 KBS도 시끄럽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억하 심정이 들 법도 하다. [노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 서 사장은 최장관에게 대뜸 ‘내가 무슨 소방수냐, 방송도 잘 모르고, 여기서 편안히 있고 싶다, 안 간다’라고 어깃장을 놓았다. 물론 진심에서다. 그러나 ‘일꾼은 일꾼이 알아보는 법’인지, 서사장의 노조 다루는 솜씨는 인정을 받았고, 최장관은 ‘삼고초려’ 끝에 ‘서선배, 대통령께서 보잔다’는 배수의 진을 치고 프로포즈를 했다. 대통령이 부른다는데 서울신문사장이 안간다? 물론 그럴 수는 없는 일이어서 결국 노대통령과 ‘오찬’을 함께 했고, 이 자리에서 ‘부드러운 언변’으로 유명한 노대통령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KBS사장’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요새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이 정도 자리에 제의가 들어오면 그냥 넙죽 받을 텐데…. 서기원 사장이 올 것이라는 소식에 노조는 결사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노조 사무실로 가서 “나는 특출한 민주 인사는 아니지만 정권에 아첨해 출세한 사람도 아니다. KBS는 한국의 중추 기관이고 사장은 이사회에서 추천해 대통령이 임명한다, 노조가 반대한다고 물러날 사람도 아니고 또 물러날 수도 없다” 며 특유의 꼬장꼬장하고 강경한 자세로 밀고 나갔다. 두 달쯤 걸려 사태가 수습되었고, 구속되었던 노조 간부들 면회도 가고 이들의 조기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를 인정한 것인지 방송은 정상을 되찾았다. 93년 2월 3년의 임기를 마치고 KBS를 떠났다. 본부장들은 왜 사표를 내느냐고 만류했지만 정권도 바뀌고 진작부터 더 늦기 전에 글을 써야 겠다고 작심하고 있던 터라 미련 없이 훌훌 털고 나올 수 있었다. 재임 시절 기억에 남는 일중 몇 가지를 꼽자면 지금도 장수프로가 된 ‘6시 내고향’을 기획했던 일,
해외의 자랑스런 동포들을 발굴, 시상한 해외동포상 제정 등을 들 수 있다.
늘 글을 쓰겠다는 압박감 속에서 시달렸던 탓인지 KBS 사장 자리를 나오자 마자 조선일보에
‘광화문’이라는 대하 역사소설을 한 3년 연재했다. 구한말 대원군 시절이 무대인 소설은
책으로도 엮어져 좋은 반응을 얻었다.
요즘 KBS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명성황후’는 사실(史實)을 왜곡하고
명성황후를 너무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는다.
사극류가 시대흐름을 타고 유행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미화하고 왜곡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NHK 사극에는 엄선한 고증위원 10여명이 작품을 정밀하게 검토하고
정확한 고증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들면서
우리도 그런 시스템을 제도화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도 ‘왕건’은 비교적 괜찮다는 평도 했다.
자신을 어떻게 호칭하는 것이 가장 좋으냐는 물음에 ‘사장님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회장님이라는 사람도 있고
선생님이라고도 부른다’며 그 어느 것이든 개의치 않는다는 답이 나왔다.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시냐는 상투적 질문에는 의외로 진지한 응답이 왔다.
‘박정희 대통령, 김춘추, 고려 태조, 세종대왕’을 꼽았다.
그는 최근 한 잡지에 ‘행복’에 관한 짧은 글을 발표한 일이 있는데
특히 눈길을 끌었던 대목은 ‘백남준, 이우환, 이봉, 장한나’ 등과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행복한 일로 꼽았다.
지명된 사람들은 물론 예술 분야나 스포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들이지만
그래도 고희를 훌쩍 넘긴 원로가 꼽은 이들이 청년들도 흔쾌히 동의할 수 있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그의 ‘변질하지 않는 청년감각’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고희를 넘겨도 ‘문청 기질’, ‘지식인 기질’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작가정신’ 만은 영원한 것 아닌가!
- 경제풍월
<이코노미톡뉴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 1970년대 다양한 경력의 서기원]
1976년부터 국무총리 공보비서관으로 일하던 서기원은 79년 10·26으로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리에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대통령 공보비서관(대변인)직을 맡았다.
그 무렵 전두환은 보안사령관과 합동수사본부장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청와대를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었다.
청와대를 처음 방문하던 날 군복 차림의 전두환이 권총을 찬 채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려는 것을
서기원이 제지했다.
‘권총을 비서실에 맡기고 들어가라’고 무뚝뚝하게 말하자 전두환은 험악한 눈초리로 서기원을 노려보다가
돌아서서 권총을 비서실에 맡긴 뒤 들어갔다.
어떤 기록에서 본 듯도 싶지만 서기원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할 때도 서기원은 며칠 밤을 새워가며 하야 성명을 기초했다.
소설가로서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사의 현장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 이후 서기원은 그때의 체험들을 어떤 형태로든 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털어놓곤 했으나
결국은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혹 어디엔가 원고뭉치로 처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문학에서, 특히 소설에서 작가의 현실적인 체험이 무엇보다 중시된다면
서기원이야말로 누구보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경험을 축적한 작가였다.
1930년 서울 송월동에서 태어난 서기원은 서울대 상대 재학 중 6·25가 발발하자
공군장교에 자원 입대, 55년 대위로 예편한다.
제대 후 생활고에 시달리던 서기원은 생활비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57년 습작 가운데 ‘안락사론’과 ‘암사지도’가 황순원의 눈에 띄어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게 된다.
그때부터 ‘전후문학의 기수’로 불리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펴지만 생활은 여전히 궁핍을 벗어나지 못해
50년대 후반 동화통신사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몸담는다.
서울신문 도쿄특파원, 동화통신 경제부장을 거쳐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마지막으로 언론계를 떠나
72년 경제기획원 대변인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이미 60년을 전후해 ‘오늘과 내일’로 ‘현대문학상’을, ‘이 성숙한 밤의 포옹’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해
작가적 재능을 두루 인정받은 서기원은 언론계 생활 중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단편소설은 물론 ‘혁명’ ‘김옥균’ ‘이조백자 마리아상’ ‘사금파리의 무덤’ 등 장편소설도 많이 썼다.
특히 70년대 초에 발표한 5편의 연작소설 ‘마록열전’은 특이한 형태의 풍자소설로 문단과 독자의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관직 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긴 침묵에 빠져들었다.
제5공화국 출범 후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처음 발표한 작품이 조광조의 개혁사상을 다룬 장편소설 ‘왕조의 제단’이었다.
그 무렵 그는 관직과 문학활동을 병행할 수 없는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문인들은 문학 그 자체가 생계의 방편이 될 수 없으므로 대개는 또 다른 직업을 갖게 마련이지만,
다른 직업은 몰라도 관직을 가지게 되면 심리적 갈등에 부닥치게 된다는 것이다.
관직과 문학은 물과 기름처럼 잘 섞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책임감과 성실성이 늘 강조되는 관직생활에서 한눈 팔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가적 기질이 관직으로 인해 녹슬거나 훼손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떤 자리에 있든지 간에 틈틈이 책을 읽고 자료를 갖춰 언젠가는 쓰게 될
작품을 구상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80년대 중반 이후에도 서기원은 여러 개의 요직을 거쳤다.
문예진흥원장 직을 맡는가 하면 서울신문 감사를 거쳐 사장을 역임했고 뒤이어 KBS 사장을 지냈다.
이처럼 계속 요직을 떠맡을 수 있었던 것도 매사에 분명하고 꼼꼼하며 성실하다는 점이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가 원했던 자리들은 아니었다. 90년 KBS 사장으로 발탁됐을 때도 처음에는 완곡하게 고사했다가 마지못해 취임했으나
노동조합과의 갈등으로 하루하루가 편치 않았다.
문학에 대한 서기원의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경제기획원 대변인으로 취임한 직후인 72년 말 신춘 ‘중앙문예’ 소설 부문의 심사를 맡았을 때의 일이다.
다른 두 명의 심사위원과 함께 박범신의 ‘여름의 잔해’를 당선작으로 결정했으나 서기원은 약간의 단점을 지적하고
가급적이면 손질을 해서 발표하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런 경우 대개는 심사위원의 그런 의견만 전달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는 직접 만나 지도하겠노라고 했다.
박범신과 함께 대변인실로 그를 찾아갔을 때 박범신을 곁에 앉혀놓고 원고지를 한 장 한 장 들춰가며
자상하게 지도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소설가 서기원
무슨 인연인지 기자는 오랜 세월 서기원과 늘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
기자가 태어나서 30년 동안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살고 있을 때 그는 인접한 삼청동에서 살았고,
기자가 가회동 생활을 청산하고 은평구 불광동으로 이사했을 때 그는 이웃 갈현동에서 살고 있었다.
1990년대에 다시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하니 서기원은 이미 그곳에 집을 지어 이사해 있었다.
게다가 비록 짧았던 몇 해지만 같은 직장에서 일하기도 했으니 그리 간단한 인연은 아니었던 셈이다.
나이가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대선배지만 그는 늘 기자를 살갑게 대했고 이런저런 일에 조언도 많이 해주었다.
꼭 그 인연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서기원의 인간과 문학에 대해서 기자는 많은 글을 썼다.
그가 서울신문 사장으로 재직 중일 때 ‘현대문학’의 청탁으로 서너 시간에 걸쳐 ‘문학 대담’을 나눈 적도 있다.
성격이 원만하고 소탈해서 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했지만 그 역시 사람들을 좋아했다.
낚시와 바둑, 골동품 감상 등 취미도 다양한 편이어서 그 방면에 함께 즐기는 친구들이 많았고,
문단의 알아주는 애주가여서 문인들의 술자리에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
은평구에 살던 문인들을 규합해 친목 모임인 ‘은평 클럽’을 만든 것도 그였다.
박연희, 이호철, 김시철, 성찬경, 황명, 박성룡 등과 최미나, 박기원, 구혜영, 김지연 등 여류 문인들이 멤버였다.
다소 젊은 층으로는 이근배, 김종해, 권오운 그리고 기자 등이 끼었다.
이 모임은 꽤 여러 해 동안 매달 한 차례씩 만나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이어졌다.
세상만사가 늘 화제였다. 서기원이 서울신문 사장직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멤버 중의 박성룡은 서울신문 문화부 차장을 맡고 있었으나 정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누군가 박성룡의 문제를 꺼냈다. 생활 형편이 그리 넉넉지 못해 퇴직하게 되면 어려울 텐데 승급을 시켜
정년을 다만 몇 년이라도 연장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였다.
서기원은 못 들은 체 딴전을 피웠지만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모양이다.
과연 얼마 뒤 박성룡은 부장대우 발령을 받았고, 물론 몇 년을 더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관계의 폭이 넓었던 것은 그의 성격이 원만하고 소탈했기 때문이었다.
72년 태완선 경제기획원 장관 때 실시하기 시작한 ‘대변인 제도’의 첫 대변인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은
경제부처 출입기자 시절부터 가까이 지낸 태완선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서였다.
그 뒤를 이은 남덕우 부총리도 서기원을 좋아해 계속 대변인 직을 맡겼다.
남덕우 부총리 시절 ‘대변인 제도’의 성공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각 부처 출입기자들로 하여금
‘대변인의 업무능력과 인기도’를 가늠하는 투표를 실시케 한 결과
서기원이 압도적 1위를 차지한 것도 그의 사람됨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 인기투표의 결과가 참작돼 75년 말 취임한 최규하 국무총리는 서기원을 공보비서관으로 발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성격이 둥글둥글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에 있어서 그는 항상 원칙주의자였고,
옳다고 생각하면 밀어붙이는 저돌적인 면도 있었기에 부하들 가운데는 그를 경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어쨌거나 서기원은 KBS 사장직을 맡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92년 물러났다.
사태는 진정국면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스스로 사표를 던진 것이다.
그 뒤 90년대 중반부터 ‘문학의 해’ 조직위원장과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 회장직 등
문화예술 관련 업무를 잠깐씩 맡기도 했지만 다른 공직처럼 골치 아픈 자리는 아니었다.
KBS 사장에서 물러났을 때 서기원은 ‘정말 날아갈 것같이 홀가분하다’며
이젠 정말 소설에 매달려야겠다고 되풀이해서 다짐했다.
그 다짐을 실천하듯 서기원은 90년대 중반부터 조선일보에 대원군의 일대기를 다룬
대하소설 ‘광화문’을 연재하면서 얼마 뒤에는 서울신문에도 새 연재를 시작했다.
하지만 60대 중반을 넘긴 나이로 두 편의 신문 소설을 연재한다는 것을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원고에 쫓기는 생활 속에서도 그는 매일 친구들을 만나고 술을 마셨다.
문단에서 서기원과 가장 친분이 두터웠던 김시철에 따르면 그 무렵 그는 매일
평균 너덧 병의 소주를 마셨다고 한다.
결국 건강을 해치게 되고 연재도 중단한 채 병고에 시달리다가 2005년 7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75세였다. 언론인으로서도, 관료로서도 뚜렷한 자취를 남긴 것은 틀림없지만
역시 그의 이름은 소설가로서 더 오래, 더 중요하게 기억될 것이다.
Danny Boy - Bing Crosby (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