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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동창회 12] 기독교인은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11724 작성일 2019-03-30 10:01 조회수 1867

참 사람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따르면 기독교는 죽은 후의 내세를 위한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인간의 온전한 삶을 위한 현세 종교이다. 또한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은 종교제도가 만든 교리를 수동적으로 인정하고 맹종하는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것이다. 물론 21세기 우주진화 세계에서 예수의 기독교는 유신론적 초자연적 하느님을 문자적으로 믿는 부족적인 종교가 아니라,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비전을 살아내는 생명의 종교이다.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은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성적이고 자아의식을 갖춘 호모싸피엔스 인간 생물종은 생존의 두려움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으로 하느님을 만들고 여기에 따라서 종교를 발전시켰다. 인류사회는 씨족에서 부족으로 진화하면서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은 심화되었고, 따라서 부족을 보호해 줄 유신론적인 초자연적 하느님이 생겨났다. 더욱이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부족 울타리에 경계를 설정하는 제도와 교리와 전통을 높이 쌓았다. 인간들이 만든 부족신들의 공통점은 인간과 이분법적인 심판과 징벌과 보상의 관계를 이룬다.  

 

부족적인 종교의 경계 즉 교활한 기만(guile)을 지적하자면, (1) 첫째로, 부족 종교는 인간의 약점인 생존의 두려움을 악용하여 전지전능한 신을 만들어 그 신의 보호를 상업적으로 팔아먹는다. 즉 신을 믿고, 신에게 절대복종하면 보호와 축복과 구원이 보장된다. 그렇지 못하면 불행과 죽음이라는 징벌을 받는다. 무엇보다 신을 만든 종교제도는 신의 대리자가 되며, 종교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곧 신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2) 둘째로, 삶의 무의미함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타자로써의 외부의 신을 만들어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부여한다. 모든 가치관과 윤리도덕은 인간이 만든 신이 결정하며 인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은 완전히 무시된다. (3) 셋째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이 세계 이외에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거기에 영원한 신의 존재를 창안했다. 그리고 죽은 후에 영원한 신과 함께 영원히 사는 영생을 꿈꾼다.

 

인류사에서 원초적으로 종교는 신에 대한 것이 아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 즉 인간의 자연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제도화되면서 마치 무엇을 믿으면 좋은 일이 일어나는 미신이나 무당으로 전락했다. 현대인들이 말하는 세계의 고등 종교들이 제도적인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종교제도들은 인간의 진리탐구와 깨달음에 관심이 없다. 종교제도들은 오히려 인간의 생존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안전수단들이 되었고, 교리와 전통과 형식으로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복종시킨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 즉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은 종교제도의 권위에 장애물이 될뿐이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더러운 죄인으로 폄하되었다. 참된 종교는 제도와 교리와 형식에서 자유해야 한다. 제도적인 종교들은 요즘 사회에서 들려지는 종교 없는 사회, 하느님 없는 종교, 교회 없는 사회등의 도전적인 말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류역사를 신중하게 살펴보면 자의식적인 인간의 의미을 인식하고 그 의미를 살아내는 데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인간이 생존의 두려움과 이에 수반되는 이기적인 욕심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과 사회를 위해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안전과 안정적인 번영을 추구하는 인간 생물종은 종교적인 동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도적인 종교는 인간의 약점을 악용하여 인간의 본성이며 존엄성인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을 말살하고, 인간의 삶 자체를 통제하고 멋대로 조정하면서 칼 마르크스의 주장대로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아편으로 전락했다.

 

기독교인들이 솔직하게 양심적으로 또한 이성적으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해야 할 두 가지 질문이 있다: (1) 첫째로, 예수는 왜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종교와 전통에 대해 완강히 저항했는가? (2) 둘째로, 예수를 따른다는 교회들은 어떻게 예수가 목숨을 걸고 허물었던 부족적 종교의 경계 즉 제도와 교리와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나?

 

신약성서가 전체적으로 밝히듯이, 역사적 예수는 초자연적인 신을 믿는 부족적 종교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서가 소개하는 예수는 참된 인간성의 표본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교회의 믿음체계는 역사적 예수를 하늘에서 내려온 초자연적인 신으로 둔갑시켰다. 다시 말해, 인간 예수 위에 이분법적 교리들을 더덕더덕 덧칠하여 예수를 성상의 자리에 앉였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를 따랐던 최초의 제자들과 성서원본의 저자들은 예수의 참된 인간성에서 하느님의 의미를 깨닫고 구체적으로 살아내었다. 또한 성서가 전체적으로 소개하는 역사적 예수는 이분법적 성전종교의 제도와 교리와 전통에 항거하여 부족적 종교의 경계를 파괴했다. 예수는 종교체계가 생존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종교제도들과 교리들과 전통들에 얽매이지 않았다. 물론 믿음체계의 하느님도 예수의 하느님이 아니었다. 예수의 하느님은 거룩한 성전과 교회가 쌓아 올린 종교적 경계에서 찾아 볼 수 없으며 오직 참된 인간성의 모습에서 인식할 수 있다. 예수가 반대한 제도적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폄하하고, 다른 사람들 즉 외부인들을 증오하고 회피하고 그들에게 행하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신약성서의 복음서들은 도덕책이 아니다. 즉 제도적 기독교의 믿음체계가 만든 교리들을 잘 지키면 하느님의 진노와 징벌을 면할 수 있는 교과서가 아니다. 종교제도는 하느님의 심판의 대리자가 아니다. 인간은 종교와 제도와 하느님 보다 더 소중하다. 기독교인들의 가시적이고 형식적인 경건함과 의로움은 죽음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을 가증시킬뿐이며, 그들은 사랑과 생명이 메말라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다.

 

예수의 참된 인간성이 어떻게 부족적 종교의 경계를 파괴했는지에 대해 신약성서는 전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예수가 불치병을 치유하는 기적 이야기들은 예수의 전지전능한 신성을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으면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초자연적인 하느님으로 둔갑하는 위험한 일이 발생한다. 원초적으로 예수의 기적 이야기들의 핵심은 예수의 참된 인간성이다. 예수는 자신의 신변에 닥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하고 불치병에 걸린 더러운 사람들 즉 종교법으로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편에 서서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이 가장 소중하다고 인식하고 살아내는 온전한 참된 인간성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의 인간성으로부터 암흑에서 빛을 보았고, 절망과 고통 속에서 용기와 희망을 가졌으며, 깨달음의 참된 인간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그것을 살아냈다.  

 

요한복음서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8:1-11) 예수 당시의 사회와 종교는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 또는 보상이라는 이분법적 신학을 핵심으로 하는 유신론적 하느님의 이미지에 병적으로 세뇌되었다. 따라서 하느님의 진노를 면하려면 종교제도가 만든 도덕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는 항상 참된 인간성을 종교제도와 교리 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 또한 인간을 더러운 죄인으로 폄하하는 이분법적이고 유신론적인 하느님을 숭배하는 예배와 전통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했다. 항상 예수는 도덕주의와 심판과 징벌은 인간의 온전함을 성취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고발자들에게 누가 심판할 자격이 있는지 물었다. 다시 말해, 어느 누가 절망과 고통 중에 있는 연약한 사람의 입장에 설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예수는 고발자들에게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했다. 겉으로 의로운 척하는  사람들은 도덕법을 어지지 않아서 의로운가? 아니면 단지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로운가? 도덕주의와 형식적인 의로움은 삶을 지루하게 하고, 항상 피곤하여 생기를 잃고 새로운 삶을 이루지 못한다. 그것들은 종교적 제도와 교리와 전통만을 만들뿐이며 사람들을 통제하고 탄압하는 수단이 된다.  

 

가장 처음으로 기록된 마가복음서에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 소위 안식일법을 어긴 이야기가 있다. (2:23-28)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먹었다. 유신론적 하느님을 맹신하고, 하느님을 보호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성전이 만든 하느님의 법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고발했다. 그러나 예수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종교법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면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종교와 신학과 신앙의 최우선은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선포했다. 종교법과 전통과 교리는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수단일뿐이며, 이것들로 인간을 통제하고 탄압한다면 즉시 추방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예수는 종교의 목적은 다른 세계에 타자로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참된 인간성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예수는 종교제도가 인간의 존엄성을 폄하하고, 인간의 삶을 왜곡시키고 고통과 절망을 가증시키는 것에 분노하여 소위 하느님의 법이라는 안식일법에 반대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 (요한복음서 3:1-6)  예수는 안식일에 가난과 질병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 사람을 도와주는 선한 일을 뒤로 미룰 수 없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악용되는 종교법은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이라고 주장했다. 제도적이며 유신론적인 종교가 예수의 참된 인간성으로부터 위협을 받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항상 권위주의적인 종교는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을 박탈하고, 종교 권력에 저항하는 위협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한다. 예수는 참된 인간성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으며, 인간성을 통제하는 종교제도와 종교법 즉 부족적 생존의 부산물인 종교적 경계들을 파괴했다. 또한 예수는 인간이 온전한 참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소중하며 이것을 위해서 안전과 보호를 제공하는 사아비 종교를 넘어서야 한다고 가르쳤다.

 

고금을 막론하고 타자적이고 외계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믿는 종교는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이 대단히 심각하다. 따라서 나/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경계한다. 더욱이 우리가 더럽고 불량하다고 규정한 사람들이 우리의 경계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오염되어 더럽고 불량해진다고 믿는다. 또한 소위 더러운 사람들은 깨끗한 사람들을 위해 그들에게 가까이 접근해서는 안된다. (레위기 13:45) 그런데 놀랍게도 어느 문둥병자가 예수에게 접근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예수는 종교제도의 정결법을 어기고 문등병자에게 손을 대며 응답했다. 문둥병자에게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손을 대는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대단히 충격적이었고, 무엇보다 부족적 종교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또한 제도적 종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종교의 권력자들이 생존의 공포에 떨게 했다. (마가복음서 1:40-45)

 

문둥병자에 대한 예수의 행동은 당시에 문자적으로 병자와 가난한 사람과 여인들과 이방인들을 접촉할 수 없다는 종교법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부족적 종교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혁명적인 사건이다. 예수는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고귀함은 종교적 제도와 교리와 전통 보다 더 소중하다고 선포한 것이다. 인간을 배제하는 종교적 경계를 인정하지 않는 예수의 참된 인간성 앞에서 종교의 권위와 권력은 무력해졌다.

 

항상 종교가 만행하는 도덕적 정죄와 심판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지 못한다. 예수처럼 정죄와 심판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만이 생명을 줄 수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은 항상 높은 경계의 벽을 쌓아 올리고 스스로 고립된다. 부족적 종교들은 다른 세계에 있는 유신론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런 하느님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들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착각과 망상에서 경계의 벽을 높이 쌓는다.

 

지난 2천 년 동안 기독교 교회사는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에서 생겨난 부족적 종교법과 역사적 예수의 참된 인간성 사이의 지속적인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예수가 시작한 깨달음의 참된 인간성 운동은 장구한 세월동안 지속되었으며,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온전한 인간성에 역행하는 부족적이고 종교적인 경계들은 끊임없이 파괴되었다. 부족적 종교의 경계들은 여성들, 흑인들, 유색인종들, 정신병자들, 유대인들, 동성애자들, 성전환자들, 가난한 사람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거룩한 영역 안에 들어와 오염시키는 것을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배타적 장벽들과 경계들은 역사적 예수의 참된 인간성으로 무너지고 있다. 예수의 신성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유신론적 부족적 초자연적 하느님은 종교적 경계를 더 높이 쌓아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고 세상을 혼돈과 분단 속에 빠트렸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옥중서간>(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에서 처음으로 종교 없는 기독교라는 말을 언급했다. 본회퍼의 뜻은 인간성이 성숙한 세대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유신론적 종교에서 탈피하고, 초자연적이고 가부장적인 하느님을 떠나 보낼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유신론적 하느님은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인간의 본성 즉 존엄성인 자율성과 창조성을 말살하고, 참된 인간 예수의 인간성에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 새로운 인간의 의미, 새로운 생명의 의미를 거부했다.

 

신약성서에서 역사적 예수는 부족적 종교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다. 2천 년 전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은 예수의 인간성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로 내려온 하느님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을 통해서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의미는 생명과 사랑이라는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았다. 본회퍼의 말대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종교인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함이다. 기독교인은 죽은 후 천국에서 영원히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서 이기적으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참된 인간 예수가 산 것처럼 부족적 생존의 경계와 부족적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서 자유하게 행복하게 의미있게 사는 것이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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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  |  2019-03-31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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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Christianity를 번역한 말입니다. 원래는 그리스도교라고 해야 의미가 더 깊어집니다. 즉 예수가 산 것처럼 사는 종교가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에 원초적인 참 사람 예수가 없습니다. 그대신 교회 권력이 상업적이고 정치적으로 만든 가짜 예수 즉 이분법적 교리의 심판자 징벌자 예수가 사람들에게 멋대로 병 주고 약 줍니다.

참 사람 예수, 역사적 예수를 따르는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가짜 예수, 초자연적인 예수의 교회는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류사회의 밝은 미래를 위해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살아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9-03-31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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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의 글이 터무니없지는 않지만, 거의 모든 글, 아니 100% 자기 이념이 실재 또는 현실(reality)를 압도해 버린다는데 심감성이 있습니다. 자기 댓글로 심심하실 것 같아서 또 나왔습니다.

첫째, 늘봄님의 예수당시의 종교체제 이해와 이른바 신구약 중간사(기독교신학자들이 아닌 역사학자들은 이 말을 잘 사용안함)에 대한 이해가 극히 낮습니다. 역사는 발전단계라는 목적론적 틀로 이해하기보다는 당시 자체의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구요. 유대성전체제에 대한 역사적 몰이해는 기독교 신학자나 목사들(늘봄님 포함)이 갖는 가장 “악질적인” 오해죠. 대화법에서 예수를 말하려면 당시의 역사적 맥락과 함께 유대인이 보는 예수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마가복음이든, 다른 여타 복음이든 성서는 당시 형제 유대인에 대해서 심각한 편향성을 보이고 있구요.

둘째, 늘봄님의 부족주의 이해는 거시적으로는 틀린말은 아니지만, 부족주의 극복이라는 점에서 부족주의를 잘 못 이해하고 있다는데 치명적입니다. 즉 이 분의 글은 소크라테스 선생이 말씀하신 것과 좀 다른 맥락에서“네 자신을 알라”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부족주의 극복은 내가 쌓아 놓은 지식이나 이념이 오류가 있다는 겸손함, 즉 “네 자신을 알아라”라는 것과 타자는 내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타자가 아닌 “괴물”로서의 타자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죠. 늘봄님의 기독교 보수주의 이해는 바로 타자의 괴물화이고 자신은 매우 착하다는 아전인수격 프레임이 잡혀 있습니다. 즉 부족주의에대한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진화론을 말하면서 가장 진화론 답지 못한 태도는 진화론에 먹칠하는 격이죠. 부족주의 극복은 내가 갖고 있는 “편향”(bias)에 대한 성찰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늘봄님의 “기독교는 Christianity를 번역한 말입니다. 원래는 그리스도교라고 해야 의미가 더 깊어집니다. 즉 예수가 산 것처럼 사는 종교가 그리스도교입니다.”는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요? “기독”이라는 말은 Christ의 한자 음역이고 “그리스도”는 한글 음역입니다. 동일한 말인데 의미의 깊이가 있나요? 그럼, “하나님”은 깊이가 없고 “하느님”은 깊이가 있는 말인가요? 그동안 “역사적 예수”를 강변하셨는데 갑지가 그리스도교인가요? 위에 본회퍼의 “기독교의 비종교화” 말씀하시면서 갑자기 지극히 종교적인 개념인 그리스도인가요? 예수는 아니구요? 그리고 본회퍼의 비종교라는 말은 종교에 대해서 이해가 상당히 낮은 칼 바르트와 그의 제자 본회퍼의 상용어입니다.

기독교의 비종교화 아이디어는 기독교의 핵심을 종교적 경험 또는 예수 경험에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슐라이어마허나 키엘케골이 주장하던 바고 이것이 지나치면 바르트나 본회퍼 처럼 기독교 비종교화라는 말도 안되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겁니다. 즉 종교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희박한 사람들이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즉, 슐라이어마허든, 키엘케골이든, 톨스토이든, 화이트헤드 (백두 선생)이든, 본회퍼든 이런 인물들의 종교이해를 이상화시키면 안됩니다. 그들 모두 역사적으로 한계가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평가는 바로 그들을 탄생시킨 역사적 문화적 맥락속에서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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