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조선과 미국의 협상대표들은 통이 크고 담대하다. 그들이 통이 크고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이 잘나서가 아니라 그들이 대표하고 있는 나라가 상대국 본토에 치명적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전략무기 보유국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제타격이건 보복타격이건 조선과 미국은 서로에게 무자비하고도 광범위한 물리적 파괴를 가할 수 있는 공격수단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등한 협상파트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GDP 만을 기준으로 비교한다면 미국이 조선에 비해 500 배 가량 큰 규모이고, 재래식 전력에서는 아예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사정들을 고려할 때, 하노이 대담판에서 이 두 핵강국이 보인 막상막하의 밀당대결전은 국제정치사적 불가사의라는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인류외교전쟁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기적의 대서사시로 기록될 지 모른다.
조선과 미국이 하노이에서 벌인 진짜 담판의 배경과 핵심골자는 3 월 하순 일주일 정도의 간격을 두고 두 가지 유력한 루트를 통해 공개되었다. 조선측 카드는 2017 년 5 월부터 대조선협상을 사실상 실무지휘했던 전 KMC 수장 김, 앤드루의 폭로에 의해 드러났고, 미국측 카드는 백악관 NSC 보좌관 존 볼튼의 팍스뉴스 인터뷰를 통해 공개되었다.
대부분의 한국매체들은 이 중 후자, 즉 존 볼튼 보좌관이 팍스뉴스 인터뷰를 통해 이미 공개한 '조선이 보유하고 있는 핵탄두와 핵물질의 미국이전요구'만을 대서특필하고 있을 뿐, 미국이 회담 막바지에 왜 느닷없이 그런 문서를 조선측 대표단에게 전달한 것인지 그 연유에 대해서는 추론은 커녕 의문조차 제기하고 있지 않다.
한국 보도매체들이 3 월 초 존 볼튼이 이미 팍스뉴스 인터뷰를 통해 이 사실을 이야기 했을 때는 하나같이 잠잠했다가 '미국측의 그런 요구가 구두가 아닌 a peace of paper를 통해 조선측 대표단에게 전달되었다'는 로이터통신의 뒤늦은 첨가보도가 나오고 나서야 이 사실을 일제히 대서특필하고 있는 행동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2019 년 2 월 28 일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 날의 회담이 파국을 맞은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싸르니아가 회담 직후 올린 글에서 언급했던 미국측 국내사정 뿐 아니라, 조선측이 견지하고 있는 군축협상의 기본입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조선측 대표단이 이 날 미국측 대표단에게 제재해제를 구걸하다시피 했다는 보수매체들의 엉터리 편향보도만을 접한 사람들은 왜 그 날 이 회담이 결과없이 끝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영원히 알 도리가 없다.
전 KMC 수장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측이 초지일관 주장해 온 한(조선)반도 비핵화란 원론적으로 인도-태평양사령부의 위수-작전지역 안에 설치해 놓은 미국의 모든 핵전략자산을 그 지역 밖으로 철수하라는 것이 그 내용의 핵심골자다. 주한미국군은 물론이고 괌과 오키나와, 일본본토에 있는 핵전략자산까지 모조리 태평양 작전지구 바깥으로 내보내라는 것이다.
사실 엄연한 핵무장국인 조선더러 핵탄두와 핵물질을 미국으로 반출하고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전업시키든지 미국으로 이주시키라는 미국의 원론적 요구역시 앞에서 언급한 조선의 원론적 요구만큼이나 통이 크고 담대한 비현실적 요구인 만큼 조선의 이런 원론적 요구역시 전혀 무리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역시 그들의 위수지역을 한(조선)반도가 아닌 태평양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을 표적으로 하고 있는 미국의 핵우산(nuclear umbrella)이 태평양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umbrella 라는 단어에 속아 핵우산을 무슨 방어수단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핵우산의 핵심개념은 핵보복타격이다. 그 노골적인 표적은 조선이다.
물론 조선측 협상팀이 그 날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에서 이런 원론적 요구를 내세운 건 아니었다. 이미 합의된 단계론적 군축협상이 하노이 회담 의제였던만큼 나중에 알려진대로 그들은 민생문제와 직결되고 미국이 수행할 수 있는 일부 제재해제 플러스 알파를 요구했다. 플러스 알파에 대해서는 조선과 미국 모두 입을 다물고 있지만, 경제제재와 관계없는 안전담보문제, 즉 주한미국군 위상 및 한미동맹과 관련된 요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KMC의 정보지원과 조언을 받는 백악관과 국무부가 조선의 이토록 담대하고도 통이 큰 원론적 비핵화 개념을 몰랐을리 없지만 짐짓 모른척 해왔다. 이런 사실이 공개적으로 널리 알려질 경우 미국의 입장에서는 요구를 들어주고말고를 떠나 그런 요구를 하고 있는 상대와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트럼프를 비롯한 대조선협상팀 전체가 미국 국내에서 천하의 등신겸 매국노로 몰릴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시치미 뚝떼고 핵동결 협상으로 이끌려다 미국내부의 반발과 트럼프 대통령의 갑작스런 궁지몰림을 계기로 미국측 협상팀이 돌발적 판단변화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측 협상팀의 돌발적 판단변화를 초래한 돌발변수가 없었다면 조미양국은 하노이에서 합의하기로 서로 동의한 의제는 그런대로 통과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의미하는 돌발적 판단변화란 트럼프 대통령 한 사람만의 독자적 판단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집단적 판단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의 집단적 판단을 일치된 방향으로 변화시킨 요인들을 연결하고 설명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않다. 바로 이런 부분을 찾아서 연구하는 과제야말로 학자들과 저널리스트들에게 떨어진 몫인데 그들은 이런 돈 안되고 골치만 아픈 과제수행을 하는 대신 되지도 않게 평론가 내지는 예언가 흉내만 내면서 직무를 유기하고 있으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상황파악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국 국내의 일부 보수논객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서 온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속아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는, 그야말로 엉뚱하기 짝이없는 잠꼬대같은 소리를 늘어놓고 있지만, 조미협상은 정의용 실장이 백악관에 가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다는 그 시점으로부터 10 개월 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 국내 보수의 주장 '정의용 사기론'이나 일부 진보진영의 주장 '문재인 중재론'이나 틀린소리이기는 말그대로 오십보백보다.
미국은 물론이고 조선 역시 한국의 중재같은 것은 애초부터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정보자산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이 두 나라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염두에 두고만 있어도 이런 식의 오해는 하기 어렵다. 조선사람이든 미국사람이든 누군가가 인사로 한 소리를 진담으로 알아들었다면 보따리를 싸는 편이 현명하다.
서론보다 짧은 본론이다.
지금 상황은 유동적이며 매우 위험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발언들(더 이상의 대조선 제재는 필요없다 라든가 김정은 위원장과는 여전히 좋은 관계에 있다 등등)이 이런 유동적이고 위험한 국면을 역설적으로 반영해 준다.
유동적이며 위험한 상황에서 미국측 대조선협상팀이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을 워싱턴DC로 불러들였다.
일국의 대통령을 불러들이는 절차는 지극히 이례적이면서도 무례하기 짝이없었다.
이례적인 이유는 방미요구가 국무부나 백악관을 통한 것이 아니라 댄 코츠 국가정보국장을 통해서 전달되었을 거라는 점 때문이다.
The Drivers 가 바뀌고 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미국의 모든 정보수사기관을 지휘 통제하는 이 기관의 수장 댄 코츠는 대조선 정책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유화노선에 대놓고 반대하면서 사표까지 내 던진 적이 있다.
지난 20 일 느닷없이 전용기편으로 오산공군기지(Osan Airbase)에 도착한 댄 코츠가 문재인 대통령을 어떤 태도로 접견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하다. 대화의 주도권은 정보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자가 쥐고 있으며 이 때 대화란 그 주도권을 장악한 자의 일방적인 설교라고 보면 된다.
상대국이 임시정부수립 100 주년이라는 큰 행사가 있는데도 제멋대로 일정까지 확정해 통보했다.
아마 누군가로부터 일부러 그 날을 잡으라는 조언을 받았을 것이다.
(요즘 빅터 차 씨는 안녕하신지)
그런데도 한국정부가 이런 일방적 통보에 항의 한 마디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마지못해 출국 12 일을 남겨놓은 지난 29 일 방미사실을 발표했을 뿐이다.
하필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 주년 기념일이기도 한 그 날.
워싱턴DC에 간 한국 대통령에게 이들이 무슨 개수작을 늘어놓을지 짐작이 안가는 건 아니나 언급은 하지 않겠다. 어차피 짐작일 뿐이니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일정만큼은 단호하기 NO 라고 밝혀주기를 기대했을 것 이지만, 슬프게도 역시 기대대로 되지는 않았다.
미국에 가는거야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니 할 수 없지만
4 월 11 일
문재인 대통령이 일국의 국가원수다운 결기로 자존심을 지켜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