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론과 유신론적 하느님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필자는 성서와 교회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소위 모태로부터 인생 전체를 통해 성서와 교회를 변함없이 사랑했다. 또한 신학교에서 최고의 수준에서 성서를 연구했고, 거기에서 깨달아 알게 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20년의 전문목회에서 설교와 교육을 통해 구체적으로 펼쳤다. 필자는 단지 예수에게 솔직하고, 나 자신이 예수가 산 것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교회가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따라 교회답기를 갈망해온 기독교인이다. 따라서 결코 성서와 교회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정직한 눈으로 보고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 교회는 지난 1700년 동안 인류 역사 속에서 얼마나 폭력적이고 비상식적이었는지 깨달아야 한다.
성서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역사책과 도덕책과 법전으로 믿고 있다. 따라서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기독교인들은 유목민들이었던 고대 유대인 부족의 십계명을 하느님이 인류에게 내려준 법률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사실상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십계명뿐만아니라 성서에 기록된 소위 하느님의 법률들을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구체적으로 잘 모르고 있으며, 제대로 순종하지도 않고 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옷감을 만들 때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실들을 사용하면 안되고, 밭에 씨를 뿌릴 때도 두 가지 이상의 씨를 뿌릴 수 없다. 성서에 이와같이 현대인들에게 비상식적인 규칙들이 무수히 많다. 특히 오늘 이 시대에 십계명은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믿어야 할 윤리적 지침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 교회와 사회의 공공 건물 안밖에 전시하는 몰상식하고 촌스러운 짓을 서슴치 않는다. 십계명은 고대 유대인 부족 내부에서는 통용이 가능할지 몰라도 21세기 다원주의 세계에서 다른 인종과 종교에게는 비상식적인 내용들이다. 십계명은 고대의 삼층 세계관에서 만들어진 부족적인 골동품이다. 더욱이 기독교 역사에서 소위 하느님의 법률들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변신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율법은 인종차별, 종교차별, 성차별, 성적본능 차별, 빈부차별, 계급차별, 가부장제도, 식민정책, 생태계 파괴 등을 정당화했다. 오늘날 우주진화 세계관의 시대에 인류사회를 분단과 혼돈에 빠트리는 유신론적 하느님의 율법이라는 십계명은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해 폐기처분해야 한다.
오늘날 지켜질 수도 없는 혼잡스러운 십계명이 폐기처분되어야 하는 명백한 이유를 밝힌다:
(1) 십계명에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다. 그러나 십계명을 하느님에게서 직접 수여받았다는 모세는 이집트인들에게 거짓 증거했으며 소위 신성한 법률을 어겼다(출애굽기 3:7-12). 그러나 성서는 모세의 거짓 증거가 하느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출 3:18). 하느님의 법이라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서는 안된다. 유대인에게는 적용하고 이방인들에게는 적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부족적인 법에 불과하며, 우주적인 법이 아니다.
(2)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포로로 잡힌 다섯 명의 가나안 왕들을 살해했다(여호수아 10:22-27). 사무엘도 아각이라는 왕을 칼로 난도질하여 죽였다(사무엘상 15:32-33).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민족과 전쟁하도록 명령하면서, 이 두 전쟁에서 적의 모든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죽이도록 명령했다(사무엘상 15:1-13; 사사시 21:8-13). 다시 말해, 성서의 하느님조차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 이방인과 비기독교인과 다른 인종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닌가? 이렇게 성서에는 도덕적으로 믿기 어려운 황당한 이야기들이 많다. 이런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비윤리적인 행동들이 이방인들에게 저질러졌다. 인류사에서 십자군 원정, 1-2차 세계대전, 발칸반도 전쟁, 이락 침공, 월남전쟁 등은 기독교인들이 일으킨 전쟁이며 수천 만 명이 죽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과 기독교 내부에서는 적용되었는지 몰라도 온 인류에게 적용할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법은 될 수 없다. 따라서 십계명은 성서 시대에조차 지켜지지 않았으며, 오늘도 여전히 지켜지지 않는 페기처분 상태에 놓여 있다.
(3) 오늘날 여성평등이 가정과 사회에서 보편화되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성차별을 추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성이 남성의 재산목록에 들어가는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들은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의해 만들어진 십계명을 금과옥조로 생각하고 있다.
십계명에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다. 다시 말해, 너의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할 것 없이, 너희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출애굽기 20:17).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성서 율법의 어디에도 이웃의 남편을 탐내는 것에 대한 금지조항은 없다. 왜냐하면 남편은 소유물이 아니지만 아내는 소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십계명의 조항에서 이웃은 남자였다. 남자의 재산목록에서 가치순으로 보면 첫째가 그의 집이며, 둘째가 그의 아내이며, 셋째가 그의 노예들이며, 그 다음이 소와 나귀와 그 밖의 소유물들이었다.
(4) 간음하지 못한다는 십계명 조항도 남성우월주의의 사고에서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일부다처제가 시행되던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계명이다. 남자는 부양할 수 있는 만큼 많은 여자를 아내로 삼을 수 있었다. 사실상 이 계명은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소유물 즉 재산인 여자를 범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킨 것이었다. 이 계명의 본질적인 의미에는 한 남자가 혼인하지 않은 여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은 간음에 해당되지 않았다. 인류사에서 원초적으로 결혼의 유래는 남편이 소유물인 아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이처럼 인간을 마치 소유물처럼 다루는 벌률은 비도덕적인 것이며, 당연히 페기처분해야 한다.
(5) 십계명에 조각한 형상(우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다. 그러나 교회는 형상들로 가득한데, 십자가, 십자가에 메달린 예수, 웅장한 교회건물과 성상들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더욱이 이 조항에서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출애굽기 20:5-6)고 기록되었다. 유대교나 기독교 내부에서는 이 계명을 믿을지는 몰라도 오늘 현대인들에게는 편협하고 옹졸한 하느님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유신론적 하느님은 인종과 종교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신뢰를 잃어 죽어갔다.
(6) 또한 교회의 모든 의식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서약을 하는 것은 하느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 조항을 위배하는 것이다.
(7) 십계명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조항이 있다. 그러나 교회가 탄생하고 시작된 후 지난 1900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안식일(토요일)을 준수하지 않았으며, 거룩하게 지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제7 안식교라 불리는 소종파를 제외하고)
(8) 십계명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조항이 있다. 그러나 고대 유대인들은 십계명이 기록된 이후에도 수백년 동안 다신론을 지켰으며, 바벨론 포로 후에 단일신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유대교와 기독교 내부의 다양한 종파들은 자신들의 주관적인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서 서로 다른 하느님을 믿고 심지어 자신들의 하느님이 정통이라고는 주장으로 쓸데없는 논쟁에 시간을 낭비했다. 분명히 오늘 현대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3천년 전 모세가 시내산에서 만난 십계명의 하느님은 아닌듯하다. 물론 이 유신론적 하느님은 할 일이 없어 실직상태에서 죽어가고 있으며 이미 죽었다.
보수적인 정치인들과 성서근본주의 종교지도자들이 십계명에 대해 인간 윤리의 궁극적인 기초라고 억지주장을 늘어놓지만 사실상 십계명의 조항들 가운데 단지 부모를 공경하라는 조항과 도둑질하지 말라는 조항 이외에 나머지 8개의 조항들은 오늘날 전혀 지켜지지 않고 실효가 없는 페기처분 상태에 있다.
십계명과 이것을 포함하고 있는 성서는 인류의 법전도 아니고, 도덕책도 아니고, 역사책도 아니다. 다만 고대 북아프리카와 중근동 지역에 살았던 히브리 부족의 삶의 여정에 대한 신화적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다. 유대인 후세대들은 수백년 동안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조상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편집해서 신화적으로 기록했다. 다시 말해, 성서는 과거의 역사를 기억해서 다시 새롭게 은유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십계명을 만든 고대 유대인들은 소위 하느님이 약속한 땅을 향해 가는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시내 산에서 하느님의 법률을 받아 율법(Torah)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중에 하느님이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 주었다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출애굽기 19-20장). 이 이야기 전체는 삼층 세계관의 유신론적 신을 전제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서를 솔직하고 신중하게 읽으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이 직접 주었다는 십계명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입으로만 믿고, 구체적인 삶은 지극히 비성서적이다. 고대 사회에서 십계명은 유대인 부족 내부에서 통용되는 부족적인 법률이었으며, 비단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도 지키지 않고 있다. 따라서 21세기에 십계명이 온 인류에게 적용할 하느님의 법률이라는 주장은 비상식적이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