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의 한국 정치인이나 관료들의 이름을 잘 모른다.
한국 정치뉴스를 별로 follow up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제 우연히 미국에 다녀왔다는 청와대 안보실 제 2 차장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문득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가 김X종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아니 저 사람이 왜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에 있는거지?' 하고 화들짝 놀랐다.
혹시 얼굴까지 비슷한 동명이인인가 싶어 재확인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어쨌든 한국 공무원으로서 미국인보다 더 미국을 위해 일했다고 알려진 그 사람의 전력을 재론하려는 건 아니니까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가자.
내가 이 뉴스(아마 JTBC 였을 것이다)에 주목했던 이유는 저 사람이 지금 misleading truth로 한국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Misleading truth 란 딱히 거짓말은 아니지만, 사태의 본질을 다르게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전달기법을 말한다.
그 사람은 한일간 정치적 갈등에 대해 "미국측이 한국측 입장을 세게 이해했다"는 좀 이상한 말을 했다.
이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전말을 대강이라도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 소리인지 잘 안다.
'나 비행기값만 날렸어' 라는 고백에 불과한 이 말을 두고 일부 한국매채가 '성과가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해 주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보도행위다.
나는 지난 6 월 30 일 산케이신문의 첫 보도가 있자마자,
전략소재에 대한 일본의 단계적 대한국 수출규제에 미국의 개입이나 동의가 있었을 것이라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느낌부터 자동적으로 들었다.
왜 그런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느냐는 질문은 하지 말기 바란다.
그 이유를 설명을 하려면 논문 한 편 분량의 말을 길게 늘어놓아야 하니까.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증거가 없으니 공개적으로 말을 안 했을 뿐이지)
그래도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간단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이유다.
미국은 유엔사를 독립상위부대로 격상시켜 일본군(현재의 자위대)을 중심축 전력으로 하는 부대로 재편성하고, 한미연합사를 그 아래에다 복속시키려는 전구개편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새로 짠 인도-태평양 전략의 동북아지역 지휘구도이기도 한 이 전구개편을 완성하려면 한국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일본의 대한국 무역타격은 이 새로운 형태의 미일군사동맹의 의사를 한국에 강제로 관철시키려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로 해석해야 그림 전체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두 번 째 이유다.
우선 범위를 좁혀, 징용배상문제와 관련한 한국의 대법원 판결에 대해 겉으로는 아뭇소리 안 하고 있는 미국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에 대해 추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승전국과 패전국을 막론하고 식민통치를 했던 나라들의 공통점이 있다.
식민통치 과정에서 벌어진 반인륜범죄나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인정하되, 식민지 통치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절대로 포괄적 개념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징용은 전쟁범죄라기보다 식민통치의 불법성 그 자체와 더 가까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은 절대로 포괄적 개념으로서의 징용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일본정부가 개과천선을 해서 1905 년(외교권 박탈)부터 1945 년까지의 조선점령과 식민통치 자체의 불법성을 인정하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제로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조차 사과는 열심히 했지만 식민통치의 불법성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같은 나라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일본을 제지하려고 들 것이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는 워싱턴DC 까지 가서 중재요청을 하지는 않았다는 말을 했다.
그럼 거기 도대체 뭘 하러 갔을까?
그는 미국측이 한일문제는 우선 한일간에 먼저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미국에 왜 간거냐고??
아니, 간 것 까지는 그렇다 치고,
그럼 솔직히 '미국측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국민께 죄송하다' 하면 되지, 왜 '성과가 있었다'느니 '미국이 세게 공감을 했다'느니 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횡설수설을 늘어놓아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느냐고??
내가 알기로도 지금 한국의 미국내 외교-정보라인은 기능이 거의 마비되어 있는 중이다.
주미대사관 참사관이라는 작자가 한미정상간 통화내역과 관련된 기밀자료를 야당에 넘긴 사실이 들통나는 바람에 초강력 본국감사로 현지공관들의 실무기능이 초토화되다시피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한국정부도 인정하는 것 같다.
안보실 2 차장이 미국에 가기 전에 주미대사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한국언론보도 역시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일본의 한국 타격작전은 이런 와중에 전격단행되었다.
미국이 강건너 불구경하듯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 자체가 이 사태를 바라보는 미국의 입장을 가감없이 설명해 주고 있다.
왜 강건너 불구경인가 하는 이유는 위에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체면불구하고 미국에 중재를 부탁하러 미국까지 날아간 청와대 특사가 중재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은 것은 그가 현지에 가서야 미국의 확고한 입장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아연실색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되돌아왔다는 반증이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마치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듯, 이번에는 다른 사람도 아닌 주한미국대사라는 작자가 공개적으로 '미국은 지금 중재하거나 개입할 의사가 없다'는 소리를 했다.
공항에서 이 소식을 들은 청와대 특사의 발언이 참 점입가경이다.
"참 거시기 하네요"
오늘의 주제는 아니지만,
왜 트럼프 행정부가 일본계이자 대표적인 친일성향 인사인 해리 해리스를 격에도 맞지 않게 주한 미국대사로 굳이 보냈는지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한미국대사 해리는 영국에 있는 왕자 해리나 해리 포터에 나오는 그 해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므로 혼동하면 안된다.)
또 이와 관련해서 역시 대표적인 친일성향 관료인 국무부 데이빗 스틸웰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가 일본에 와서 한국인들의 부아를 돋구는 발언을 하고 다닌 배경은 무엇인지도 다 한꺼번에 연결해 이해할 수 있다.
오늘 아침 어느 한국매체는 스틸웰이 주선한 한미일 차관보 협의를 일본측이 거절했고 이것을 마치 '일본이 감히 미국의 뜻을 거스른 대사건'인 것처럼 기사를 써내려갔던데, 이런 종류의 기사야말로 데스크가 보자마자 책상 밑에 있는 휴지통으로 던져버려야 딱 알맞은 헛소리 기사다.
한국정부은 아마도 일본의 한국타격작전계획을 6 월 30 일 산케이신문에 보도되고 나서야 알았던 게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한국정부가 미국의 입장을 몰라서 청와대 안보실 2 차장을 미국에 급파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나도 위중하니,, 미국의 입장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특사를 보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좋지 않았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지금처럼 정공법으로 밀고 나가려면, 국민들에게 현재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복잡한 상황을 정직하게 털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쿄공습을 하든 백기항복을 하든 그 결정은 전적으로 한국국민과 한국정부의 몫이다. 아무리 동포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은 일체 말하지 않겠다.)
내 짐작이긴 하지만,
지금의 청와대와 한국정부는 내부토론과정에서 입장의 다양한 개진을 보장함으로써 검증의 질을 높이고, 이 과정을 통해 의사결정의 수준역시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았으니 확언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만을 토대로 평가해보면 그렇다.
다른 입장의 반론을 강력하게 퍼부을 수 있는 내부구성원을 토론대상으로 인정할 줄 모르고 '정치적 이단'으로 배척하기만 하는 조직은 아무리 뛰어난 사람들만 모여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잘못된 결정을 반복하다 지리멸렬할 수 밖에 없다.
7.1 사태가 정보실패라면 지난 주 위싱턴DC에서 벌어진 모욕은 일종의 작전실패다.
후자는 불가항력적일 수 있지만, 전자는 '무능'에서 비롯된 실패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정부가 내놓는 정책이란 얼마나 정의로운가만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산출된 정책인가로 평가된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미국의 입장까지도 잘못 알고 청와대 특사를 보낸 것이라면, 문재인 정부의 외교-정보라인 수장들은 당장 보따리를 싸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상황이 더 혼란스러워 지기 전에,
한국정부 조직내부에서 devil's advocate 이 활발하게 기능하고 검증의 질을 높힐 수 있는 격렬하고도 포용적인 토론문화가 정착되었으면 좋겠다.
주변에는 뼛속까지 진영논리에 매몰된 답답한 사람들 뿐이라 내부에서 그런 역할을 할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국적법과 관련 국가공무원법을 개정해서라도 고용풀을 해외동포로 까지 넓힌 뒤, 다양한 문화배경과 언어장악력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는 인재들을 폭넓게 찾아보는 게 어떨까 한다. (나를 임용해 달라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란다)
이제 무엇인가를 바꿔 어느 세월에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냥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2019.7. 14 clipboard(sarnia)
p.s. 그러고 보니 프랑스혁명 기념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