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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동창회 33] 교회에서 하느님의 언어는 들리지 않고, 남성 폭군의 망발뿐이다!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12214 작성일 2019-08-22 06:36 조회수 1657

오늘날 교회가 정말 예수를 따른다면 경계 넘어,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하느님의 언어=하느님의 뜻=하느님의 말씀이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들려야할텐데,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 밖 세속적인 세상에서 더 선명하게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들린다. 다시 말해, 교회가 주장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살았던 하느님의 언어가 아니다. 교회에서 강압적으로 믿게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란 기독교인만 구원하는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이고 옹졸한 폭군의 언어이다.

 

전통적인 교회들의 모든 예배의식에서 하느님에 대해 또는 군주의 이미지를 사용하는데, 더 이상 고대의 군주국가에 살고 있지 않는 현대들에게 따분하고 지루하며 설득력과 효력이 없다. 따라서 사람들이 고대에 속한 교회유신론적 기독교를 떠나고 있다. 21세기에 하느님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며, 여성도 남성도 아니며, 더욱이 부족을 보호하는 힘센 남성 전투사도 아니다. 물론 하느님은 초자연적인 전지전능한 존재도 아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고대에 은유적으로 기록된 성서의 하느님을 문자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그 은유적 표현이 담고 있는 심층적인 의미를 솔직하게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과거삼층 세계관세계를 통제하던 기독교 교회가 하느님을 남성 왕 또는 하늘 위에 아버지로 부르던 고대적인 언어들은 불행하게도 여전히 오늘 현대 사회의 계급적이고 차별적인 사고 제도 속에 잔존하고 있다. 성서에 기록된 구절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사람들의 존엄성을 폄하하고, 명예를 훼손하고, 심지어 차별하고 탄압하고 박해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특히 교회의 믿음체계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고, 고대 성서를 문자적으로 맹신하며 가부장적 신앙관과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고대 성서의 사회와는 매우 다른 우주진화 세계관의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에 따른 인간평등과  남녀평등과 자연존중을 위하여 21세기에 적합한 새로운 하느님의 언어가 절실히 필요하다.

 

기독교 성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성서구절이 있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삶의 방식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성숙해져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고린도후서 5:6-10 (11-13), 14-17, 마가복음 4:26-34)


성서가 기록될 당시에 고대 중근동 지방의 부족들의
가부장적 성향은 사람들이 섬기는 많은 신들의 절대적인 신성을 남성으로 만들게 했다. 따라서 이러한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성서시대의 히브리인들도 하느님에 대해서 남성의 언어로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역사 초기의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하느님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출한 전쟁 신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성서를 기록할 때, 하느님을 아버지, 주님, , 그리고 목자라는 남성 언어로 묘사했다. 이렇게 하느님을 남성의 특성으로 묘사하는 것은 생존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권위와 아버지의 돌봄과 왕의 보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성서 저자들은 남성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중근동 지역의 가부장제도는 여성들의 교육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들은 글을 쓰거나 읽을 수가 없었다.

오늘날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이 평등하게 존중되고, 모든 개체들이 작은 전체와 큰 전체를 이루어 평화로운 통합을 추구하고 있는
우주진화 세계관의 시대에 현대 기독교인들은 성차별남성우월주의 내지는 남성중심주의를 넘어서서, 하느님을 오직 아버지라는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언어의 은유(metaphor)  만들어 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더 이상 인격적이고 초자연적이고 더욱이 남성적인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와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서에 하느님을
여성적 은유로 표현한 곳이 많다. 즉 성서에서 하느님의 여성적 특징을 묘사하는 말들 중에 하느님의 온화함, 연민, 자비, 용서, 섬세함 등이 있다. 예를 들자면, 암탉(마태 23:37, 룻기 2:12), 산파(시편 22:9), 해산하는 여인(이사야서 42:14), 젖먹이는 여인(이사야서 49:15), 그리고 집안의 여인(누가복음 15:8-10), 등등이 있다. 분명히, 하느님의 의미로써 모성애가 성서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모성애는 우주진화 역사에서 인간의 진화에 획기적인 요소이다. 모성애인간의 본성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생명체의 진화과정이다. 138억 년 우주 이야기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조상은 물고기였으며, 장구한 세월이 흘러 파충류에서 포유류로 진화되었다. 현대 인간의 뇌파충류뇌에서 포유류뇌로 진화된 것이다. 물론 인간의 뇌에 여전히 파충류뇌가 잔재하고 있지만, 파충류뇌는 동물적이며 먹는 것과 육체적인 쾌락과 이기적인 탐진치가 주요 작용이며, 포유류뇌로 진화되면서 모성애가 생겨나서 자식과 가족과 이웃을 돌보는 성숙한 단계로 발전했다. 인간이 하느님의 의미를 모성애로 표현하는 것은 본능적인 현상이다.  


성서에 많은 기록들이 하느님을 여성으로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의미에 대해 여성의 은유를 거부하고 금지시키는 것은 무지와 거짓의 소치이다. 믿음체계는 하느님의 의미와 여성 사이의 깊은 상호 관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 대한 여성적 은유를 더욱 발전시켜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오히려 여성들에게 교회 안에서 잠잠하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앞에 나서지 말라고 강요한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신학의 굳게 닫힌 문을 활짝 열어야할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서 오늘 이 시대에 가장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언어들과 이미지들을 찾아야 한다. 하느님의 의미는 남성의 성적차별을 넘어서서 포월적으로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신앙과 인류사회의 통합과 평화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여성들을 불공평하게 차별하고, 업신여기고,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것은 하느님에 정반대되는 행위이며, 가정과 사회와 인류사회에 대단히 위험하다

하느님을 표현하는 데에 남성과 여성의 경계 넘어 모두를 포용하는 포월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서 여성의 권리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낙태를 반대하거나 금지시킬 수 없다. 낙태는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최우선적으로 여성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의미에 대한 것은 단순히 언어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 경험을 어떻게 쌓아가고 있는지를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언어는 경험을 쌓아가는 방식을 유도한다. 하느님에 대한 모든 이미지들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경험으로부터 만들어낸 은유들이다. 하느님에 대한 성서의 은유들은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특정한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배경에 맞추어 생겨났다. 21세기 현대사회에서 하느님의 언어는 남성우월의 편협적이고 부족적인 언어가 될 수 없다. 하느님의 언어는 남성과 여성, 인종과 인종, 종교와 종교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서 다양한 모든 것들을 포용하는 포월적이고 통합적이고 우주적인 것이다.

고대 사회의 환경에서는 가장 적절하게 생각되었던 하느님의 이미지들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오늘 21세기에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적합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 종교적으로도 적합하지 않다. 유신론의 죽음과 함께 인격적인 하느님의 이미지들은 오늘 많은 사람들의 가슴과 머리에 와닿지 않는다. 또한 신선하고 생기가 넘치는 감동을 불러일으켜 주기 보다는 오히려 삶을 부자유하게 구속하고, 두려움과 혼돈을 일으킨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서 안에서도 하느님의 의미 은유적 이미지들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변천해온 것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의미는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고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하느님의 이미지로 여성의 존엄성과 권리를 박탈하고, 다른 인종과 종교를 박해할 수는 있었지만, 21세기에 76억 인류가 하나의 생명을 망을 이루어 살아가는 복합문화-상호의존관계의 다원주의 세계에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죽어가는 교회가 다시 살아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새로운 하느님의 언어가 절실히 필요하다.  

성서에 기록된 원초적인 하느님의 언어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느님의 의미를 인식하고, 하루하루를 자유롭게 행복하게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지혜와 용기에 눈이 뜨여지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은유적인 이미지들은 마치 사람들이 끼고 있는 안경과도 같다. <오즈의 마법사>(Wizard of Oz)에서 도로씨가 오즈의 도시를 보기위하여 안경을 낀 것과 같다. 시대에 뒤떨어진 이미지들은 문화적 사회적 환경이 변한 후에 새로운 시대새로운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사람들의 눈앞을 가리고 캄캄한 우물 속에 가두기 쉽다

우주진화 세계관의 세계 지난 138억 년 동안 끊임없이 진화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말하고 있는 하느님의 언어 이미지도 남자와 여자의 경계, 인종과 종교와 국가 사이의 경계 넘어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인식하고 체험할 수는 우주적인 언어로 새로워지고, 성숙해지고, 확장되어야 한다. 21세기 교회의 하느님무경계비이분법적이고 통합적인 하느님이 되어야 한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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