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몰상식하게 팔아먹는 하느님의 내세적인 구원에 속아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은 성서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 인간들이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의무와 책임에 대한 은유이다. 하느님의 구원은 기독교는 물론 제도적인 종교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즉 구원은 교회와 성당과 사찰과 사원에 가야만 받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매일매일 일어나야 하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현대 기독교인들은 고대 성서를 신중하게 그리고 은유적으로 읽고, 재해석하여 새 시대에 적절한 삶의 지혜를 탐구해야 한다. 특히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 솔직해야 한다. 믿음체계가 상업적으로 만든 예수를 따라다니지 말고, 참된 사람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라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그가 산 것처럼 살아야 진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
약 3천 년 전에 등장한 성서 전통에서 말하는 구원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것이었다. 즉 성서의 구원의 의미는 내세적이기 보다 현세적이다. 사실상 삼층 세계관의 내세 개념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뒤늦게 나타난다. 내세의 삶에 대해 처음으로 명백하게 언급한 것은 기원 전 165년경에 기록된 구약성서의 다니엘서 마지막 장에 나타난다(다니엘 12:1-13). 이보다 앞서 기록된 성서의 다른 문헌들은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혹은 모호하게 언급할 뿐이다. 분명히 성서에서 내세의 삶은 중심적인 화제가 아니었다. 주류 신학계의 대학들은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를, 은유적으로 기록한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으면 성서의 진리를 왜곡하거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하자면, 구약성서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면,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내세에서의 삶을 믿지 않았다. 대부분의 성서 시대에 고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체험하며 살았던 삶은 내세에 대한 희망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현세적인 구원에 대해 말하고 기록했으며,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의미를 진지하게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구원에 대한 일차적인 성서적 이해는 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상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강조는 신약성서에서도 (비단 신약성서의 일부분이 내세에 대한 꿈을 묘사하고 있다 하더라도) 계속된다. 신구약 성서 전체적으로 구원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인들이 따르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은 온전히 현세적인 문제들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 당시의 98%의 민중들은 제도적인 성전종교와 로마 제국주의 정치에 의해 혹독한 탄압과 착취 아래에서 하루에 한 끼를 먹기 힘든 가난과 절망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목회와 교육의 현장은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민중들의 삶의 터전인 생선 비릿내 나는 바닷가와 악취가 풍기는 장터였다. 또한 예수는 들판과 산 위에서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외쳤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죽은 후의 내세가 아니었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온전히 깨달은 사도바울의 신학과 신앙도 로마제국의 불의에 항거하는 이 땅 위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었다. 원초적으로 신약성서의 전체적인 핵심은 현세적인 구원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현대 기독교인들이 읽고 있는 성서는 예수가 죽은 후 100년에서 200년 사이에 역사적 예수의 정신이 많이 변질된 필사본들이다. 27권 신약성서의 원본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고대 필사가들이 수많은 사본들 중에 극히 일부 수집한 것들을 주관적으로 수정첨삭하는 편집을 통해 다시 만든 사본들이다. 따라서 성서의 대부분의 내용들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이 변형된 것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문자적으로 읽고, 수학공식 암기하듯이 그대로 맹신하는 교리책이 될 수 없다.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예수 세미나 학자들은 성서비평을 통해 성서 속에 보이지 않게 담겨진 진짜 예수의 언행에 대해 연구한다. 그들의 학문적인 연구는 세계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눈을 뜰 수 있는 힘이 되었다.(www.westarinstitute.org)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원(salvation)이라는 말의 어원은 치료의 연고를 뜻하는 salve에서 왔다. 원초적으로 구원의 의미는 현세적으로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상처는 일상생활 속에서 현실적으로 다양하고 또한 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처들 중 일부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입힌 것이기도 하고, 일부는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이기도 하고, 일부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입힌 것이기도 하다.
성서는 이 세상에서의 현세적인 구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매우 다양한 이미지들을 사용한다. 성서의 구원은 문자적으로 마치 타자인 외부적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구원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체험은 안에서 밖으로 드러난다. 즉 구원의 주체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과 잠재력과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성서적 이미지들은 하느님에 대해 말하지만, 주인공은 인간이다. 따라서 은유적인 언어로 묘사된 구원의 이미지들에서 하느님은 인간과 분리된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느끼고 깨닫는 현실적인 실제(實際)이다. 다시 말해, 구원의 경험이란 고통과 절망과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내면적으로 하느님의 의미를 느끼고 깨닫고,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용기와 힘과 희망을 인식하고,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현세적인 문제이다. 성서적인 구원은 죽은 후 내세의 문제가 아니다.
구약성서에서 밝히는 현세적인 하느님의 의미는 인간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해방 즉 인간의 출애굽(성경에서 이집트를 애굽이라고 부름)이다: 해방으로서의 구원은 성서의 기초가 되는 이야기, 즉 이집트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이 해방되는 출애굽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이야기에서 인간 곤경의 이미지로서의 속박은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억압을 포함한다.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은 구원의 중심적 의미들 가운데 하나이다. 출애굽의 이야기는 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사람들을 속박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해방되고자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관한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해방과 자유는 역사적 예수의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주제이다. 바울의 서신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디아서 5:1) 라고 말한다.
현세적 하느님의 의미는 인간들의 궁극적인 화해와 통합이며,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이 유배됨과 소외됨으로부터 복귀하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성서적 이미지는 화해, 즉 소외된 후 다시 본래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소외는 인간의 상황에서 관계와 분리를 동시에 가리킨다. 즉 소외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속해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기원 전 6세기경 바벨론에 유배(exile)된 고대 히브리인들의 경험과 관련된다. 유배는 또한 창세기 초반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쫓겨나는 이야기에 나타난 인간 실존의 이미지이다. 즉 사람들은 하느님의 의미가 실종된 에덴의 동쪽에서 두려움과 공포와 이기심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다. 이 이미지는 우리의 삶은 유배된 것과 같다는 것을 시사한다. 출애굽 은유가 보여주는 이집트에서의 속박과 마찬가지로, 유배된 삶은 심리적, 정신적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의미도 갖는다.
우리의 구원은 하루하루의 평범한 삶 속에서 일어나는 현세적인 부활의 사건이다. 성서가 말하려는 부활의 의미는 내세에서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과 같은 삶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과 같은 삶으로의 변화가 부활이다. 삼층 세계관의 시대에 기록된 고대 신약성서에서 부활은 종종 육체적인 죽음 이후의 미래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이 세상에서의 삶 한가운데에서의 구원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새로운 탄생, 다시 태어남, 새로운 시작의 이미지들이다.
21세기 우주진화 세계관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구원의 심층적인 이미지와 함께 죽음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1) 죽음은 인간의 현세적인 상황과 일치하는 이미지이다. 즉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 죽을 수 있다. 예수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라”(누가복음 9:60)고 말하면서, 살아있는 사람이 마치 송장처럼 사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 다시 말해,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깨어있으나 눈감고 잠자는 사람같으며,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같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엄중히 경고했다. (에베소서 2:1, 골로새서 2:13). (2) 죽음은 부활의 삶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은유이다. 새로운 존재 방식에 들어가려면, 과거의 존재 방식은 죽어야 한다. 사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초대 기독교의 일반적인 해석은 죽음을 이러한 내적인 심리적, 정신적 과정의 구체화로 이해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이러한 경험을 했다고 고백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19-20). 즉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 새로운 삶의 길을 가게 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현재에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자,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했다. 구원은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의 부활이다.
성서에 기록된 구원의 이미지들을 총괄적으로 살펴보면, 사람들은 불안한 자기 집착과 길들여지고 고통을 주는 존재 방식들에 속박되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유배와 눈멀음 때문에 불안하고, 자신이 속한 것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주변환경 속에서 하느님의 의미를 스스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은 우주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개체들의 개인적인 행복만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행복이다. 하느님의 구원과 치유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다니는 궁극적인 목적은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우주적인 구원을 이룩하기 위함이다. 하느님의 구원은 공평한 자유, 폭력없는 평화, 공정한 분배의 정의, 그리고 조건없는 사랑과 용서이며, 모든 개체들이 다른 개체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연민의 사랑이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