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참 사람 예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믿으면 죽은 후 이 세계와 분리된 다른 세계 즉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런 속임수를 쓰려고 비상식적이고 교리적인 특정 언어들을 만들지도 않았다. 역사적 예수는 일상의 언어로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에 대해 가르쳤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평범한 삶 속에서 느끼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천박하고 위선적인 거룩함이 필요없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예수는 그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하자고 도전했다. 하느님 나라는 일상의 언어에서 일어나는 삶의 표현이고 방식이다. 예수는 자신을 하느님으로 숭배하는 교회 또는 교회 기독교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교회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배반하고 가짜 예수를 만들어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의 교회는 예수가 원래 가르치고 살아냈으며 이 땅에 건설하기를 희망했던 하느님 나라 종교가 아니라, 거짓과 은폐로 뒤덮힌 장사꾼들과 정치꾼들의 집단이다. 교회 기독교는 예수가 가르친 현세적 하느님 나라 신학을 살아내지 않고, 교회적 형태의 내세 신학을 형이상학적으로 믿는다.
상업적이고 이분법적인 교회 신학과 우주적이고 사심없는 하느님 나라 신학 사이의 차이점은 이렇다:
<교회의 형이상학적 신학> <예수의 하느님 나라 신학>
1. 1.
이 세계는 죄악으로 멸망할 더러운 세상이며, 이 세계 이외에 다른 세계는 없다. 모든 것은 지금
위대하고 선한 저 밖의 세계에 종속되어 있다. 여기에 속하고, 영원함도 순간순간에 있다.
2. 2.
하느님은 초월적이며 인간과 분리된 하느님은 비존재이며, 내면적인 인식과
외부적인 존재로 알 수 없는 타자 깨달음의 현실
3. 3.
성서와 신조, 의식과 목사의 권위에 의해 중개되는 중개인 없이 자율적이고 직접적이고 직관적이고
수동적인 중보믿음 구체적인 삶
4. 4.
관념적, 교리적, 교조적 믿음이 필수조건 비전중심이며 비신조적 즉 저 밖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교조적인
중개인 신앙이 필요없다.
5. 5.
지위, 위계질서, 불평등성을 강조하고 합리화 평등주의적이며 호칭이나 직위가 중요하지 않음
6. 6.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인 특정 어휘, 특정 문화 전통, 부족적 전통을 떠나 보내고, 전적으로 경계 넘어
특정 교권 승계 전통을 신성시한다. 세계화, 보편화, 범민족화를 지향한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배척한다.
7. 7.
많은 것들이 신비에 싸여 있고, 어둡고 잠재적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어, 동등하고, 평상적
이고, 유예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고, 이며 그 어떠한 어두움이나 그늘이 전혀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인식 범위를 초월해 있다는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전적으로 투명하다.
것에 중요성을 둔다.
8. 8.
거룩-세속의 분리를 중요한 믿음으로 여긴다.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 언어 세계 자체가 거룩한
언어의 영역이다. 성속을 분리하지 않듯이 교회와
국가 사이의 전통적 분리도 필요하지 않다. 하느님
나라 종교 공동체는 함께 삶의 여정을 평등하게
공유하는 길벗들의 공동체이다.
9. 9.
기계적인 삼층 세계관 – 신은 하늘 저 밖에 다른 우주진화 세계관 – 우주세계는 하나의 생명의 망을
세계에 존재하고 땅 위의 인간세계에 간섭하고, 이루는 한 몸. 이 세계 이외에 다른 세계는 없다.
멋대로 조정한다.
고루하고 진부한 고대적 종교 체계의 교회 신학과 이상적인 미래의 하느님 나라 신학 사이의 대조는 성서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구약성서 예레미야서 31:33).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항상 살아있는 희망이 있는데, 언젠가는 현재의 종교적 권위와 종교적 중보에 관한 거짓과 은폐의 독선적인 체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고, 종교는 마침내 완전히 민주화될 것이다.
인간의 하느님과의 관계에는 더 이상 중개인을 통한 죄의 용서와 하느님의 구원이 필요없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예수와 교회와 교리와 전통이라는 중개인이 필요없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종교는 평범하고 자율적이고 민주적이어야 한다. 참된 기독교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상 언어와 분리된 특정 어휘를 말하고, 특정 교리를 암송하고, 특정 전통을 따르고, 예수를 하느님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생활은 세속적인 세상과 분리되지 않고, 평범한 일상 언어를 말하며, 자신을 자연스럽게 삶에 관계시키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 신학에 기초한 종교적 민주화라는 이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들의 역사 속에 널리 퍼져 있는 특징이다. 과거에 신과의 특별한 관계는 오직 왕들만이 지닌 특혜였는데 점진적으로 확장되어 마침내는 모든 사람이 그런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고 향유하기까지 확장되었다. 기독교의 종교적 민주화는 오랜 세월 동안 진통을 겪고 있다. 원래부터 예수는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것은 예수가 아니라 교회뿐이다. 예수가 죽은 후에 교회는 천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면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종교 체계들 가운데 가장 거창하고 매우 차별적인 형태로, 또한 잔인하게 핍박하는 중보종교 체계로 변형되었다. 기독교는 그 자신을 거대한 우상으로 만들었다. 불행하게도 신도들은 교회가 자신들을 다시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의 관계에서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세뇌되어 거의 구제불능이 되었다. 두 번째 천년기(기원후 1000년부터 1999년까지)의 교회사는, 교회 내의 두 세력 사이의 끝없는 갈등과 충돌의 역사였다. 다시 말해, 한편에서는 중보체계를 구축하고 그 가공할 권력을 강화시킴으로써 순진한 신자들을 억압하고 짓밟으려는 자들과, 그 반대쪽, 즉 기존체계의 장악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투쟁했던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의 신학적 방식은 기존의 수동적인 통로를 벗어나 종교적 행복을 자율적이고 직접적으로 탐구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교회 기독교가 통제하던 시대는 이미 종말에 도달했으며 장차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시대로 옮겨갈 수 있다고 선언하며, 교회의 중보체계에 맞서 싸워왔다.
안타깝게도 일반 기독교인들은 중보장치들, 즉 교회, 성서, 신조, 예배, 목회, 교회법 등이 기독교의 실체라고 너무나 잘못 생각하고 있다. 또한 그것들은 공식적으로도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라는 거짓말에 심각한 정도로 세뇌되었다. 보통 신자들은 정통주의의 장치들이 비상식적이며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중보종교가 마침내는 그들을 죽은 후 저 밖의 하느님 나라로 인도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최소한 지난 백 년 동안 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은 정통 교리라는 것이 진짜 성서적인 것도 아니며 예수를 잘못 이해한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교회의 정통주의가 참된 기독교이며, 교회는 죽은 후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망상에 빠져있다. 종교적 중보장치인 교회는 종교적으로 억압적이며 진부하고 낡아빠진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런 것을 사회로부터 추방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 발전 속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다음 단계, 즉 하느님 나라 종교의 단계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의 사회는 이 종교가 절실히 필요하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떤 종류의 진리가 하느님 나라 신학에 속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확립시킬 것인지에 대해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 시대의 신학적 위치를 특정지어야 하는 혁명적인 순간이 도래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신학의 확립은 과거의 삼층 세계관적 교회 신학에 의해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계시와 도그마적 진리라는 개념은 반드시 폐기해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세속적인 세상의 다양한 영역들 즉 과학, 문화, 사회, 경제, 정치, 예술에서 말하고 있는 일상의 언어는 이미 하느님 나라 신학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 언어 속에 하느님 나라 신학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상당부분 전제되어 있듯이, 하느님의 의미는 사람들의 삶의 모든 영역들 속에 확산되어 있다. 일상 언어는 온전하고 참된 인간성에 가장 적합한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예수 세미나 학회의 신학자 돈 큐핏이 자신의 저서 <일상의 언어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다>에서 밝혔듯이, 우리의 일상 언어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느님 나라 세계를 상상하며 열망하는데, 그 세계는 성서의 하느님 나라, 혹은 칸트의 목적의 왕국같은 완전히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세계이다. 언어는 인간들의 네트워킹(대화를 통해 서로 연결하는 것)을 위해 발전했다. 따라서 일상 언어는 속박이 없고 상호투명한 인간 소통의 세계를 추구하는데, 그 세계 안에서는 우리를 에워싸고 위협하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들이 묶여지거나, 연기되거나 혹은 저지된다. 오늘날 일상 언어 속에서 전통적인 종말론은 비현실적인 망상에 불과하다. 일상의 언어는 우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가깝게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은 현세에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인적인 삶과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 이후의 시대, 즉 죽음 이후 이 세계 너머의 초월적인 다른 세계는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일상 언어는 기독교가 이미 탈교회 시대, 곧 기독교 역사의 마지막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Don Cupiit, Kingdom Come in Everyday Speech. SCM Press, 1999) 원초적으로 인간의 일상의 언어가 세계를 창조했고, 신과 종교를 만들었으며, 이것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일상의 언어 속에 인간의 모든 상상과 비전이 담겨져 있다. 일상의 언어 바깥에 지옥과 연옥과 천국같은 특별한 다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세계화되어 가고, 인도주의적이며 소통이 매우 민첩한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또한 이 세계 자체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남녀평등 그리고 인종차별과 종교차별이 없고, 극심한 빈부차이가 없는 공정한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가 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은 끝장났다. 인간은 단 한 번 사는 것이며, 죽음과 허무는 단지 한 걸음 떨어져 있다. 인간이 우리에게 전부이건만, 인간은 절망적일 만큼 깨어지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 나라 신학은 지금 우리의 일상 언어에 의해 전제되고 있다. 또한 그 신학은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 관한 진리이다. 오늘 현대 기독교인들은 철저한 반실재론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태양처럼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개인 윤리와 인도주의적 사회 윤리가 절실히 요구되며, 종교는 철저한 휴머니즘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완전히 화해하고 서로 숨기는 것이 없는 인격체들의 네트워크가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예수의 정신에 따른 하느님 나라 신학이다.
하느님 나라 신학은 인간성에 대한 해석이며, 하느님 나라 종교는 우리 시대에 진실한 삶에 대한 종교적 응답의 한 형식이다. 불행하게도 교회 신학과 그 특정 용어들로써는, 교회가 그 자체를 넘어서 하느님 나라에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 하느님 나라 신학은 지금 여기 이 시대의 진실이며, 하느님 나라 종교는 오늘 우리 시대에 진정한 삶의 방식이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