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다원주의는 과학적으로 우주의 법칙이고, 신앙적으로 예수의 가르침이고, 성서적으로 성서의 핵심이고,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통합적인 공동의 삶의 길이다! 왜냐하면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하는 다원주의는 138억 년 우주 역사의 자연적인 흐름이다. 이 주류를 역행하는 것은 자살행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사회와 지구촌에 대한 폭력과 테러행위이다. 무엇보다 기독교인들에게 상호문화주의 즉 다원주의는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이단이나 악마가 아니라 천사의 모습이고, 모든 사람들의 구원의 길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는 모든 악의 뿌리이다’ 라고 하며(참고: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종교는 모든 것의 독소이다‘ 라고(참고: ‘신은 위대하지 않다’ God Is Not Great: How religion Poisons Everything) 기존 종교를 비판하는 그들의 가장 큰 이유는,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교회 기독교의 배타주의와 우월주의는 21세기 과학시대에 큰 모순이고 몰상식한 행위이다. 이 이 두 학자는 지난 여러 해 동안 자신들의 저서들에서 기존 종교들에 도전하는 메세지를 발표했다. [기독교가 만든 그런] ‘예수는 없다’고 한국기독교교회의 거듭남을 촉구한 종교학자 오강남 박사와 도킨스와 히친스는 무작정 기독교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교리적으로 만들어진 예수와 초자연적이고 유신론적이고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인 하나님은 이제 설득력과 효력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경고한 것이다. 100여년 전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내세주의의 기독교교회에 도전했던 것과 동일하다. 21세기에 기독교는 현대 예언자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캐나다는 오래 전부터 복합문화주의(Multiculturalism)를 실천해 왔다. 이제 캐나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호문화주의’(Interculturalism) 다시 말해, ‘다원주의’(Pluralism) 시대에 들어갔다. 다원주의는 여러 종교들이 진리와 구원에 대해서 각자의 고유한 신앙을 동등하게 서로 존중하며, 모든 종교들은 동일해야 한다든지 획일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캐나다 뿐만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다원주의에 따르면 나의 길 만이 유일한 길이 될 수 없고, 나의 종교가 다른 종교들 보다 가장 우월하다고 억지주장을 늘어 놓을 수도 없다. 성서적으로 다원주의는 역사적 예수의 정신이다.
캐나다가 지향해온 복합문화주의는 다양한 문화들과 종교들과 전통들이 서로 존중하며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합문화주의의 약점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체들을 존중한다면서도 여전히 너는 너 이고 나는 나 라는 개체주의(Individualism)를 넘어서지 못했다. 따라서 외형적으로는 함께 산다고 하지만 이 땅에 이미 정착한 사람들과 새 이민자 사이에 문화적-경제적-정치적 갈등이 남아 있으며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복합문화주의가 넘어서야 할 장벽은 뉴톤의 세계관(Newtonian Worldview)이다. 즉 많은 개체의 부품들로 이루어진 시계처럼 잘 돌아갈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시계의 한 개체가 고장이 나면 그 개체를 제거해 버리고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하면 된다는 것이 뉴톤의 세계관이다. 모든 문화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복합문화주의이지만, 기득권을 갖인 문화가 연약한 문화를 희생시키지 않고 끝까지 돌보지 못했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상호문화주의와 다원주의는 너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너의 정신과 문화의 뿌리는 나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사회를 이루고 있는 어느 한 개체의 문화와 종교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제거해 버릴 수 없고, 연약한 개체들이 건강해져야 전체가 건강해 질 수있다는 상호문화주의와 다원주의는 우주는 한 몸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세계관 (Einsteinian Worldview)을 기초로 한다. 한 개체를 희생시키고 전체가 건강할 수 없다. 즉 인류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상호의존관계 속에 하나의 생명의 망(the Web of Life)을 이루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원초적으로 성서의 전체적인 사상은 개체주의가 아니다.
전 세계에 192개의 나라들이 있고, 캐나다에는 200개 이상의 민족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지구촌은 그다지 크지 않다. 마치 집 마당처럼 작아졌다. 하루 안에 세계 어느 곳에든 갈 수 있고, 세계는 하루의 문화권 안에 있다. 이제는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민족들의 경쟁과 전쟁의 시대는 끝이 났다. 나의 종교와 민족의 정체성을 최우선으로 하고 자신만을 보호함으로써 더 안전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부족주의는오늘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이런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국의 트럼프와 한국의 황교안, 전광훈 그리고 일본의 아베와 같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단지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을 드러내고 있을뿐이다. 다양한 인종들이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공용하고, 종교들이 상호존중하고, 인종과 종교와 성적본능을 넘어서서 서로 결혼하고 함께 살아가는 시대가 도래했다. 민족의 정체성은 인종과 문화를 넘어서서 우주적(universal) 이어야 하며, 만인을 포용하는 그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
지난 1700년 인류 역사의 대부분 동안 세계를 지배했던 교회 기독교의 배타주의와 우월주의와 제국주의로 인해서 동서양의 세계와 지구촌의 북반부와 남반부는 분리되었다. 따라서 오늘도 전 세계적으로 전쟁과 테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심지어는 빈부차이와 인종차별과 성차별과 성적본능차별과 계급주의가 여전히 가정과 교회와 사회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세계복음화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정신을 깨달아 참된 인간이 되는 길을 탐구하고, 사심없이 조건없는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갈릴리 해변을 걸었던 예수는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하는 다원주의자 즉 상호문화주의자였으며, 이 예수가 가장 반대했던 것은 제국주의와 배타주의와 우월주의였다.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인들은 다른 종교인들을 개종시켜서 자신의 종교가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는 비상식적인 야욕을 버려야 한다. 이 헛된 꿈이 중단되지 않는 한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대신에 시기와 멸시와 불화와 분열과 전쟁과 테러 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불평등의 불의는 극심해질뿐이다.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인류역사의 발전에 많은 일들을 공헌한 것에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힌두교, 불교, 유대교, 원주민들의 종교들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위해서 독특하게 공헌한 것을 감사하고 존경해야 한다.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하는 것은 나의 신앙과 종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앙과 종교를 존중하는 것처럼 다른 종교들을 존중하고 심층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나의 신앙에 대한 확신과 나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는 길이다.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하는 것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크게 위배되는 우월주의와 배타주의와 제국주의를 버리는 것이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 속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꿈이었고, 현대기독교인들의 새로운 비전이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