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이분법적으로 차별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두려움을 심어주는 부족적이고 폭력적인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인류역사를 통해 다른 인종들을 차별하고, 다른 종교들을 박해하고, 가난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남성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여성들과 아이들을 없신여기고, 생명체들이 지니고 있는 우주의 법칙 즉 성적본능(동성애)을 정죄하고, 십자군 원정 이래 전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테러를 일으키고, 이러한 폭력적인 행위들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된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절대적인 권위가 될 수 없다. 성서의 원초적이고 긍정적인 기능은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성서는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의미를 깨닫고,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고 조건없는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온전한 삶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불행하게도 인류사에서 성서는 악의 근원이 되어왔다. 다시 말해, 과학과 이성과 지성을 거부하는 성서 문자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인 자율성, 창조성, 가능성, 잠재력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자율적인 진리탐구와 깨달음과 새로운 인식을 금지시켰다. 또한 무작정 믿는 맹신과 절대 복종과 충성을 좋은 신앙이라고 사람들을 세뇌시켰다.
1700년 전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는 예수의 신성 즉 삼위일체 교리를 핵심으로 하는 니케아 신경을 강제적으로 만들어 제국의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서구 역사를 신중하게 살펴보면 성서는 고통과 공포와 피와 죽음의 흔적을 남겼다. 다시 말해, 성서는 사람들을 죽이고 탄압하고 박해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문자적으로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은 인종차별, 종교차별,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빈부차별, 종교와 과학의 분리, 내세와 현세의 분리(이 세계와 다른 세계의 분리), 몸과 마음의 분리에 성서를 열심히 활용했다.
서구 문화를 1700년 넘게 지배해 온 문자적인 성서와 직역적인 믿음은 개인과 사회의 정신세계에 악영향을 미쳐 가치관과 윤리관과 세계관을 왜곡했다. 심지어는 비기독교인들조차 성서근본주의에 동조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성서가 그렇게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기록되고 발전되었는지에 대한 성서비평학적인 탐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성서를 신중하게 살펴보면, 성서는 문자적으로 읽고 믿어야하는 교리책이 아니며, 과학책도 아니며, 단지 시적으로 신화적으로 즉 은유적으로 기록한 책인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성서는 비과학적인 삼층 세계관의 고대 사회에서 표현과 저술의 보편적인 형태였던 100여개의 신화들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다시 말해, 구약 성서는 3천 년 전부터 약 1000여년 동안, 저술형태에 있어서 신화적인 문학형식이 보편적이었던 시대에 수십명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성서는 고대 유대인들이 살았던 국제적인 격변기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오랜 세월과 다양한 장소에 따라서 그 내용이 변화되고 발전되었기 때문에 지극히 인간의 작품이다. 또한 성서 원본은 오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대신 급변하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변개되고 발전된 사본들이 전해져 내려왔다. 오늘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성서는 단번에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완성된 단행본이 아니며,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지역이 흩어져 살고 있던 수십명의 저자들이 기록한 원본들을 필사한 사본들의 사본들이다. 더욱이 고대 성서는 시적 즉 은유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읽으면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5500년 전 중동 지역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이 시작되면서 글자(설형문자)를 쓰기 시작했고, 4500년 전 레바논 남쪽 지방에서 단지 30개의 글자만 사용하는 간단한 필사체(Ugaritic Script)가 등장했다. 이것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는 물론 영어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다. 3700년 전에 알파벳이 발명되기 전까지 고대의 필사자들은 약300개의 글자를 사용했다.
유목민이었던 유대인들이 구약 성서를 쓰기 시작했을 때에 히브리어는 그들의 고유한 언어가 아니었다. 물론 유대인들의 조상은 아람인들이었고, 그들은 공식적인 문자가 없는 아람어를 사용했다.(신명기 26:5) 세월이 지난 후에 그들의 후손들은 가나안에 정착하여 그 지방 언어를 수용하여 자신들의 히브리말로 발전시켰다. 성서를 기록할 당시에 문서를 기록하는 방식은 파피루스 또는 양피지에 식물이나 동물에서 채취한 먹물을 사용하여 날카로운 나무가지나 돌조각 또는 새깃털 등으로 썼다.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던 고대 사회의 출판 방식은 글자 하나 하나를 필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서는 필사자들에 의해서 수없이 많은 사본들이 만들어졌다. 더욱이 고대 사회의 문맹율은 98%로 높았기 때문에 필사자들이 본문을 베껴 사본을 만들었는데 능력이 안되는 필사자들은 형편없이 부정확한 저질의 사본들을 만들었다.
구약 성서의 언어인 고대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고, 단어와 줄 사이에 여백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서 말이 시작되고 끝이 나는지 읽는 사람의 재량에 달렸다. (예를 들자면, GODISNOWHERE를 God is no where 또는 God is now here 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수많은 필사본(manuscript)들은 서로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을뿐만아니라 오류와 모순투성이었다. 기독교 초기에도 구약 성서의 많은 사본들이 유포되었으며, 사람들이 성서를 멋대로 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유대교의 마조레테스 그룹의 학자들은 구약 성서의 표준화 작업으로 마조레틱 본문(Masoretic Text)을 만들었다. 한국의 공동번역 성서의 구약은 마조레틱 본문을 직접 번역한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성서의 축자영감설과 무오설과 문자주의를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은 하늘 위에 있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6천 년 전에 하늘과 땅과 만물을 6일 동안에 창조했다고 믿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인물들의 수명을 모두 계산하여 나온 결과이다. 그러나 우주의 나이가 6천 년이라는 주장은 지질학과 인류학과 천체학 등의 현대과학을 무시하고 있다. 천체학에서 우주의 나이는 빅뱅으로부터 시작되어138억 년이다. 지구의 나이는 44억5천만 년이다. 바다에서 생명이 가장 처음 출현한 때는 40억 년 전이며, 그 생명이 진화되어 바다를 떠나 척추동물로 육지에 올라온 것은 3억7천만 년 전이다. 1억 년 전에는 파충류가 지구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공룡이 대표적인 파충류였다. 파충류가 멸종하고 포유동물이 등장하여 오늘까지 6천만 년 동안 지구를 주도하고 있다. 최초의 인간들, 즉 호모 하빌리스가 2백60만 년 전에 등장했고, 150만 년 전 사냥꾼들, 즉 호모 에렉투스가 등장했다. 그리고 20만 년 전 태초의 이성적 인간, 즉 원시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했으며, 언어를 사용하는 현대 호모 사피엔스 인간은 4만 년 전에 등장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우주진화의 역사적 사실들은 성서 근본주의의 모순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현대 기독교인들이 성서 근본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서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지구(와 우주 전체)가 6일 동안에 그것도 별로 오래되지 않은 6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창세기 1-3장); 아담과 이브가 실제 인물들이었으며, 그들의 타락 때문에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는 주장(창세기 2-3장); 하느님이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짐승들 한 쌍씩만 방주에 태워 구원하였고 나머지 모든 생명체들을 파괴시킨 지구적인 대홍수를 일으켰다는 주장(창세기 6-7장);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처음에는 똑같은 언어를 말했는데 나중에 가서야 서로 다른 언어 집단들로 나뉘어졌다는 주장 (창세기 11장); 하느님이 아말렉 족속의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과 아기들까지 모두 죽이도록 명령했다는 주장 (사무엘상 15:3); 하느님이 노예제도를 제정하여 정당화했다는 주장(구약과 신약 모두에 등장); 하느님은 두 종류의 천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주장(레위기 19:19); 하느님은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종속될 것을 명령했다는 주장; 결혼은 오직 남자와 여자의 의식이라는 주장; 예수는 구원의 유일한 길이며, 예수가 문자적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을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 예수를 (구세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악마의 자녀들이라는 주장(요한복음서 8:44); 예수가 재림하면 인류의 대부분은 파멸될 것이라는 주장, 등등 이다.
성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세속적인 세상의 일상생활 속에서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이야기 책이지 역사책이나 과학책이나 교리책이나 도덕책이 아니다. 성서는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를 깨닫고,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와 희망에 대한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다. 물론 성서 저자들은 당시의 보편적으로 알려진 신화들과 전설들의 문학형식을 빌어서 자신들의 깨달음을 시적(詩的)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고대인들이 은유적으로 기록한 것을 현대인들이 문자적으로 읽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또한 성서 저자들은 이미 수백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구전 전승)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편집하면서 자신들의 주관적인 견해를 삽입하여 기록했다. 더욱이 이야기들을 전하는 이야기꾼들의 말솜씨가 내용을 발전시키는데에 크게 작용했던 것을 상상하면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결론적으로 39권의 구약성서는 한 두 사람이 단번에 완성한 단행본이 아니다. 각기 다른 시대와 환경에서 기록된 다양한 책들로 구성된 성서는 오랜 세월 동안 공동체들 속에서 발전되어온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편집한 책이다. 따라서 성서근본주의가 주장하는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은 모순이며, 성서의 문자들이 하느님의 절대적인 계시라는 직역주의는 비상식적이다. 더욱이 고대 성서 저자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기록하기 보다는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은유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고대 성서를 은유적으로 읽고 현대어로 전환하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 교리적인 기독교인이 되기 보다는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