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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동창회 47] 낡고 추악한 교회를 버리고, 잃었던 참 사람 예수를 되찾자!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12652 작성일 2019-12-26 08:23 조회수 1957

오늘 우리의 사회는 단순히 교회의 개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의 개혁이 절실히 요구된다. 다시 말해 새롭게 탄생할 기독교교회를 버리고, 잃어버린 참 사람 예수를 되찾아야 한다. 지난 1700년 동안 교회 기독교는 잔인하고 추악하고 도덕적으로 악취를 풍기고, 가정과 사회와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키고 혼돈에 빠트렸다. 기독교인들은 길에서 하느님 예수를 만나면 그를 죽여야 한다. 이제 인종종교를 차별하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떠나 보내야 한다. 이 세계와 분리된 종교적 영역은 없으며, 하늘 위에 거룩한 성전은 없다.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타율적인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참된 인간으로써 세속적인 세상에서 자율적으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과거에 교회 기독교가 주류 사회를 통제하던 때에 사람들은 국가, 교회, 대학과 같은 큰 제도의 지배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마침내 제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계몽주의(이성을 통해 사회의 무지를 타파하고 현실을 개혁하자는 사상이며, 17세기에 처음 주창되어 18세기에 확산) 시대에 많은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이러한 일들이 시작되는 때가 되기를 원했다. 인간은 성숙해졌고, 옛 체제의 절대 군주들의 종말과 새로운 민주적 공화국들의 발흥이 그 증거였다. 오늘날 지식의 급성장, 새로운 정보 및 전자통신 기술의 확산, 그리고 문화적 세계화로 인해 계몽주의 시대와 비슷한 희망이 사람들 가슴 속에서 새롭게 용솟음쳤다. 사람들은 과거에 세계 종교로 불렸던 기독교는 사실상 지역적으로 협소하며, 기독교인들은 진부한 사고 방식의 우물 속에 오랫 동안 갇금당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훈육적인 교회 형태를 뛰어넘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성숙하고 자율적으로 발전된 형태로 탈바꿈해야 한다.

 

16-17세기 종교개혁 시대급진적인 개혁가들은 이 땅 위의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루터봉건제후들과 보수적인 종교 개혁가들은 그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참된 종교개혁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교회 기독교가 지속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급진론자들은 멈추어질 수 없는 새로운 사상의 전체 영역을 민중들 속에 심어놓았다. 영국에서는 종교개혁으로부터 유럽 최초의 민주적 혁명에로의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 이 혁명은 근대의 핵심적인 정치적 및 도덕적 이념을 유포시켰는데, 자유의 이념, 양심, 표현, 집회, 자유와 평등의 이념, 그리고 보편적 인간 계몽완전한 해방의 이념 등이 그것이었다.

 

계몽주의 이래로 세계는 여러 방면에서 기독교적 희망의 세속적 실현으로 발전되었다. 보편적 교육, 국제주의, 인도주의적 윤리 등으로 기독교가 그 쇠퇴해가는 교회의 제복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형태로 성숙해질 수 있는 때가 도래했다. 새 옷이 이미 교회 밖 세상에서 기독교를 기다리고 있다. 이미 상당한 정도로 새로운 하느님 나라 형태의 기독교가 존재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거대한 국제적 인도주의적 자선단체 같은 것들이 활동하고 있다. 머지 않아 교회 기독교가 쇠퇴하면서 사라지고, 기독교 정신지구적 에코 휴머니즘(eco-humanism)이 될 것이다.

 

오늘날 유럽과 북미에서2의 종교개혁, 즉 기독교가 부족적인 종교 의식을 중단하고, 미래의 지구촌 종교 의식에로 발전하는 것은 이미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그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 단지 자연적인 시대의 표징으로 수용해야 하고,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부인하거나 거부해서는 안된다. 교회존재하기를 멈추고, 교회의 특수한 어휘들이 쓸모 없게 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시대와 현실을 환영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개혁하고, 교회의 기독교인이 되기를 중단하고, 세속적인 세상의 기독교인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교회 기독교교리의 많은 부분은 도덕적으로 매우 야만적이며 시대착오적인 퇴행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도덕적 가치를 담아내는 상징적 그릇이 될 수 없다. 하느님도덕적 필요조건이 될 수 없으며, 인간은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인 하느님의 대행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과거에 교회 기독교 윤리학은 인간에게 알려진 가장 고상하고 숭고한 도덕적 교훈 체계라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과 신뢰를 잃었다.

 

칸트가 말했듯이, 21세기의 종교이성의 한계 내에서 가능하다(Religion Within the Limits of Reason Alone). 초자연적인 하느님에 대한 맹신은 과학시대의 우주진화 세계관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지성적이고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종교적 의무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종교는 하느님의 대행자가 아니라, 참된 인간이 되는 길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인간이 100% 책임져야 한다. 종교의 교리가 인간을 심판하고 정죄하고 징벌할 수 없으며, 심지어 죽음 후의 삶까지 결정할 수 없다. 교회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지옥에 떨어진 사악한 자들에게 영원한 보복적 형벌을 내린다는 이분법적 구원론의 교리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어떻게 잔혹하고 지독스런 형벌을 하느님에게 돌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페미니즘 시대가 되어가는 마당에 하느님을 전능하신 아버지, 곧 궁극적인 가부장으로 서술하는 전형적인 종교적 이미지의 극단적 남성주의도 효력을 잃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현실을 회피하며 터무니없는 그들만의 전통적인 교리를 펼치지만 이 세상에 대해 고리타분하고 잔인한 신학과 믿음은 폐기처분해야 한다. 새로 태어난 아기를 자랑스럽게 안고 있는 부모를 향해 어느 목사도 정통 교리가 주장하는대로, 그 자녀가 죄 속에서 잉태되고 출생했다원죄론을 확신시킬 수 없다. 오늘날 누구도 이 사회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교회의 장례식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듯이, 모든 인간을 기다리고 있는 최후의 심판과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때 빨리 회개하라고 재촉하는 것도 몰상식한 일이다. 장례식은 천국환송도 아니고 하늘가는 길도 아니다. 장례식은 회개와 죽음 후의 삶에 대한 것이 아니며, 오직 고인의 생애를 회상하고 경축하는 의식이다.  

 

이렇게 교회 기독교인들은 낡은 종교적 단어들에 매달리지만 그들은 21세기에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식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심지어 하느님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상당한 수준의 과학교육을 받은 기독교인들도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을 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아났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만일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면, 그리고 아직도 그의 자연적 인간 육체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대답하지 못한다. 예수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과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는 재림에 대해서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른다. 또한 신자들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 질문조차 하지 못한다. 복음주의자들의 책들은 황당한 헛소리로 가득하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아무 것도 이성적이고 지성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사실상 낡고 잔인하고 진부한 종교적 전문 언어들은 더 이상 명확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 언어들은 적어도 1700년 이상된 고대 언어들로써 오늘날 현대 언어로 번역조차 불가능하다. 과학시대에 우주진화 세계의 특성상, 교회 기독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은 이미 종교적 함축성효용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 21세기의 현실을 명확한 언어로 진술하는 데 실패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부드럽고 우주적인 어휘들 보다는 낡고, 잔인하고, 이분법적이고, 배타적으로 날카로운 어휘들이 보다 분명하며 확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어떤 외부의 인격적이며 초자연적인 그리고 언제나 개입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유신론적 믿음은 더 이상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삶의 한 복판에 우리를 초월하게 하는 실재 존재는 안밖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의 언어는 현실적이기보다는 너무나 교회적이기 때문에 보다 세속적이고 일반적이고 비전문적이어야 한다. 교회에서만 통하는 특수 언어가 교회 밖 세상에서 일반인들에게 이해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설득력과 효력을 잃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은 교회라는 맥락에서 말하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잘못 배웠다. 더욱이 명료하고 입증되고 우주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신자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바꾸지 않는한, 새로운 기독교와 새로운 교회의 탄생은 어쩌면 교회 내부에서는 불가능하다.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이라는 말이 지난 1700년 동안 얼마나 문제를 일으키는 단어가 되었는지 인식해야 한다. 오늘 하느님이란 단어를 모호하게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이고 편협하고 배타적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신중하게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이해할 수 있게 사용해야 한다. 형이상학적 시대의 하느님은 죽었다. 인간 존재 및 물질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인격적인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와 인간은 우연히 자연적으로 출현했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담론은 깊은 위기에 빠졌다.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인간의 삶에 목적이란 것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공개적으로 질문하고 솔직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인간들이 일상생활에서 말하고 행하는 것은 의미가 있고 목적을 갖일 수 있지만, 이 세계 밖에 우리와 상관없이 우리를 위해 이미 만들어진 형태로 어떤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철학자 니체가 날카롭게 말했듯이, 인간이 목적이란 개념을 만들어냈다. 실제로는 목적이 없다.

 

오늘날 문화적도덕적 변화로 인해,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의 상당 부분이 도덕적으로 악취를 풍기고 있다. 주목해 할 것은, 그런 기독교 교리에 따라 사는 것은 사람들에게 해롭다. 기독교는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이유, 종교적 이념은 도덕적 필요조건, 곧 우리의 가치를 담아주는 상징적 그릇이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변하고 성숙해져야 한다.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삶이 잔인하고 추한 종교적 이념에 의해 인도되고 형성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를 인도하는 신화적인 성서도덕적 의미에 대해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살피는 것이 옳으며, 수정이 필요한 곳은 수정을 가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 기독교는 수정작업에 실패하고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다.

 

교회는 낡고 추악한 모습을 버리고,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위세를 떨쳐왔던 전통적 종교 개념들을 버리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상식적이고 옳바른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 다시 말해, 21세기의 교회는 우주진화 세계에서 교회 밖 외부인들이 이해할 수 있고, 언어적으로 훌륭하고 생생하며 도덕적으로 납득할 만한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 교회의 내부인들은 소속감을 간절히 느끼려 하며, 자신의 종교에 목마르기 때문에, 성서를 열심히 읽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평안한 친밀감과 소속감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성서의 특정 구절들을 자기들끼리 통하는 암호로 사용하고 문자적으로 인용한다. 그것들은 모두 알아듣기 힘든 말이며, 사교(邪敎)은어 곧 내부인에게만 이해되는 용어처럼 들린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다만 심리적인 이유로 그러할 뿐이다. 과학자 리차드 도킨스는 이러한 현상을 망상이라고 지적한다.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교회, 새로운 기독교인의 탄생이 절실히 필요하다. 기독교의 새로운 탄생을 위해 도덕적으로 온당하지 못하고, 과학시대에 비상식적이고, 통합적인 사회를 분열시키는 배타적이고 우월적인 교리를 죽여야 한다. 또한 내부적인 암호은어망상을 죽여야 한다. 이 세계와 분리된 종교적 영역은 없다! 하늘 위에 거룩한 성전은 없다! 탈도그마적인 하느님 나라 형태의 종교만이 기독교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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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  |  2019-12-28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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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은 추기경·주교·사제들이 모인 연례 성탄 강론에서 “오늘날 전통적인 기독교 지역조차 가톨릭이 쇠퇴하고 있다. 교리에 대한 경직적 태도에서 벗어나 시대변화에 순응해야 한다. 전통은 정체적이지 않고 역동적인 것이다. 오늘날 가톨릭은 더 이상 신앙 문화를 창조하는 유일한 주체가 아니다. 전세계 사람들이 듣는 첫 번째도, 가장 많이 듣는 신앙도 아니며, 유럽과 많은 서구지역에서 가톨릭 신앙은 더 이상 일상적인 삶의 분명한 전제가 되지 못하고, 종종 부정되거나 조롱당하거나 소외되고 비웃음까지 사고 있다. 기독교가 과거의 지배적인 지위와 영향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가톨릭은 세상이 요구하는 교회 개혁에 나서야 하며 복음전파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서 교회가 다시 매력적이 되도록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지속적이고 눈에 보이는 변화가 교회의 진정한 전통이다. 경직성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발흥한다. 교회의 경직적인 태도가 공동선의 기초를 허물어뜨리고 오해와 증오의 지뢰밭을 만들고 있다. 오늘날 횡행하는 경직적인 태도가 불평등과 악순환을 이루며 서로를 악화시키고 있다. 교회의 경직적 태도가 아동 성추문 스캔들이나 각종 불평등 같은 내부 문제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 역설했습니다. [참고: 한겨레 신문 12월 23일자]

교황은 정확하게 기독교의 죽음을 지적했습니다. 교황이 지적한 내용들은 개신교의 긴급한 상황과 하나도 다를바가 없습니다.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면 종교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교회는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고, 스스로 개혁하지 못하고,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구원한다는 거짓과 망상에 빠져있습니다. 예수는 이런 교회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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