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매우 특이한 주제를 다룬 영화가 개봉된다. 제목은 '남산의 부장들'이다. 1979 년 10 월 26 일 19 시 40 분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벌어진 박정희 총격피살사건 직전 40 일간의 권력중심과 주변인물들의 행적을 심리묘사기법으로 극화한 영화다. 이병헌이 김재규 역을 하고 곽도원이 김형욱 역을 맡는다. 극중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실명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각색되었다. 본토에서는 오는 1 월 22 일 개봉한다. 미주 개봉계획은 아직 알려진 바 없다. 넷플릭스에도 아직 공개계획이 없다.
10.26 까지의 40 일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김형욱을 주요인물로 등장시키는 게 의미심장하다. 김형욱은 10.26 사건 10 년 전인 1969 년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나 유신선포 이듬해인 1973 년 미국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뉴저시 근교 저택에서 몇 년 조용히 지내다가 지미 카터가 집권한 1977 년 이후 느닷없이 박동선 뇌물로비사건을 폭로하면서 본격적인 반박정희 활동을 시작했다. 그 해 부터 미국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에 치명타를 안겼다.
이 무렵 중앙정보부 간부들이 줄줄이 미국에 망명하는 희대의 사건도 벌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적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김형욱은 이들의 망명을 도우면서 박정희 정권 뿐 아니라 박정희 개인사와 관련된 치부와 흑막 전모를 파헤치는 회고록 집필에 착수하자 박정희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김재규 부장과 윤일균 중앙정보부 해외담당 1 차장은 거의 매일 청와대 서재로 불려갔다. 서재 안에서는 좀처럼 고함을 지르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박정희의 고함소리가 밖으로 터져나왔다. 안에서 뭔가 와장창 깨지고 와르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그럴때면 어디선가 개짖는 소리가 어김없이 뒤따라 들려왔다.
서재는 대통령 숙소로 사용하는 본관 2 층에 있었다. 지금은 대통령 숙소가 관저의 형태로 멀리 따로 떨어져 있지만, 당시만 해도 대통령은 본관 2 층에서 생활했다. 그 무렵 아들은 태릉에 있는 육사 기숙사에 있었고 두 딸은 밖으로 싸 돌아다녔으므로 방울이라는 이름의 강아지하고만 함께 있을 때가 많았다. 2 층에서 근무하는 부속실 직원들은 '와장창' '와르르' '멍멍멍' 하는 그 익숙한 소리가 무슨 메들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대통령이 집어던진 재떨이가 날아가서 무엇인가에 명중할 때 나는 소리였다. 개짖는 소리는 박정희가 기르는 강아지 방울이가 짖는 소리였다.
박정희가 직접 스케치 기법으로 그린 강아지 방울이의 모습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박정희는 재떨이 던지기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사거리가 길었을 뿐 아니라 명중률도 높았다. 김형욱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부분을 비중있게 다루었었다. 공중으로 비상한 재떨이의 표적은 주로 부딪힐 때 큰 소리를 내는 거울이나 대형 괘종시계 같은 것 이었다. 비싸고 부서진 유리잔해를 치우기도 힘든 괘종시계가 박살나자 부속실 직원들은 크기가 작아 재떨이 명중률이 비교적 낮을 것으로 보이는 벽시계를 대신 걸어 놓았다.
기록에 의하면 박정희의 재떨이가 사람의 머리를 향해 날아간 적도 있었다. 재떨이를 머리에 맞고 구급차에 실려나간 주인공은 동아일보 정경부장 김성열이었다. 정경부란 지금의 정치부와 경제부를 합친 부서명이다. 김성열은 1922 년생으로 나중에 동아일보 사장까지 지냈고 2002 년 작고했다.
각국의 대통령 관저에서 재떨이가 공중에 체류하는 시간을 합산한 길이로 따지자면 단연 대한민국 청와대가 기네스북에 오를 것이다. 박정희의 재떨이가 가장 많이 날아다닌 곳은 내실이었다고 한다. 1968 년, 당시 21 세의 정금지라는 여자가 등장한 이래 본격적으로 시작된 '청와대 내실 재떨이 비행'은 그로부터 6 년동안 지속되다가 1974 년 8 월 중순 무렵에야 종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정희의 두 번 째 부인 육영수 씨에 대해서는 한국 국민 대부분이 잘못 알아오다가 조카사위 고 김종필 씨가 작고하기 전 육 씨의 진짜 성품에 대해 폭로하는 바람에 진실의 일부가 드러나기도 했다. (한국판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육영수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생략한다)
여기서 말하는 박정희의 재떨이는 경북 구미시 박정희 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놋쇠 재떨이가 아니라, 그것보다 크고 무거운 크리스탈 재떨이를 말한다. 지름 약 30 cm 에 무게 2 kg 정도로 추정되는 이 크리스탈 재떨이는 누가 내다버리기라도 했는지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나는 아주 오래 전 박정희의 종말스토리를 다룬 영화가 나온다면 그 제목을 '재떨이 대통령의 사랑' 이라고 지으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영화가 그 제목이 아니어서 유감이다. 물론 그 제목은 D.H. Lawrence 의 '재떨이부인의 사랑'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표절시비가 될 소지가 있기는 하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고, 그 내용도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기 때문에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한 심리적 이유를 무엇으로 추론해서 묘사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국사주설을 신빙성있게 받아들인 적도 있지만, 천성적으로 음모론을 싫어하는 싸르니아의 추론은 처음부터 좀 달랐다. 정치적 이유나 배경보다는, 김재규를 동시에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감정이 폭발할 정도로 모욕한 상황들이 궁정동 살인사건의 핵심적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나는 그 배경을 두 가지로 꼽는다.
첫째는 김형욱 납치살해공작이고, 둘째는 박근혜 문제(이른바 영애 문제)였을 것이다. 그가 주도할 수 밖에 없었던 김형욱 납치살해공작이 불교신자인 그를 심리적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면, 태자마마 최태민과 경호실장 차지철이 협잡하여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박근혜 문제는 그를 심각하게 모욕했을 것이다.
왜 이 두 가지 배경이 김재규로 하여금 반은 우발적이고 반은 계획적인 10.26 사건을 일으키게 했는지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그 두 가지 배경 자체를 밀도있게 섭렵하고 이해하는 수 밖에는 없다. 그것은 너무나 긴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설명을 다 할 수가 없다.
다만 그 배경을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 싸르니아가 옛날에 작성했던 글 두 개를 가져와 본다.
그 중 하나는 오프라인에 기고했던 글이고 다른 하나는 놀이터에 올렸던 글이다.
이 글 두 개를 읽고 그 영화를 보면, 왜 김재규가 극도의 공황과 격동하는 분노 속에서 박정희와 차지철을 사살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되고, 이 영화를 좀 더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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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시대의 청부살인 (2005 년 1 월 경 올렸던 글)
국가기관이 해외의 폭력배들을 고용하여 자국민을 살해했다는 소설같은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사실로 드러날 전망이다.
한 국정원 관계자의 제보에 의해 조사가 시작 되기도 전에 일각이 드러난 '김형욱씨 실종사건'이 주는 충격은 우리가 왜 진상규명과 깨끗한 정리 없이 과거사의 늪에서 한 발짝도 빠져 나올 수 없는 지를 잘 보여준다.
게다가 이 사건은 지금까지 알려진 10.26 대통령 피살 사건의 엉성하기 짝이 없는 '거사 동기'를 좀 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상규명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 되고 있다.
1979 년 10월 초, 중앙정보부 해외담당부서 소속 8 명의 공작요원들이 당시 영주권자로서 미국 뉴저지에 거주하고 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파리로 유인한 뒤, 현지의 조폭들을 고용해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유학생으로 위장한 한 공작요원이 사체 처리를 확인한 뒤 '파리의 킬러들'에게 잔금을 지불했고 이후 25 년간 이 사건은 베일에 가려진 채 온갖 소문만 무성해 왔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통해 공작요원들에게 하달된 지시는 매우 구체적이고 분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부살인업자 고용과 거래 요령, 대금 결제 방법, 사체 처리 및 역할 분담 등이 치밀하게 논의 됐고, 보안 유지를 위해 해외담당 1차장에서부터 파리주재공사로 이어지는 중정 조직 내의 지휘계통은 철저하게 배제했다.
모든 작전은 김재규 부장이 직접 편성, 파견한 비밀공작조에 의해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의문은 박정희 정권의 핵심인물들 중 비교적 온건하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알려진 김재규가 이런 무모한 공작을 자발적으로 기획하고 수행했겠느냐 하는 점이다.
박정희 씨를 몽매에도 잊지 못하고 열렬히 존경해 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이 살인공작은 당시 최고 통치권자였던 박정희씨의 직접 지시에 의해 수행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것도 '언질'이나 '묵인' '암묵적 시사' 따위가 아닌 구체적이고 강력한 명령의 형태로 강요되었음이 거의 분명하다. 김대중씨 납치 및 살해기도 사건의 경우 '암묵적 시사'로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으나, 김재규는 이후락과는 아주 다른 인물이었다. 차지철의 경호실은 이런 종류의 공작을 수행할 만 한 해외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청와대 조직을 이런 일에 동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여건들이 박정희씨로 하여금 국가원수로서 해서는 안 될 명령을 중앙정보부장에게 내리게 했을 것이고 경직된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은 공무원의 신분으로 이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집권여당이 사실상 패배한 '78년 12월 총선 이후부터 박정희씨의 성격이 급격히 더 난폭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듬 해인 79 년에 들어와서 이성을 잃은 듯한 무리한 정치공작들을 강행했다 이 중 '5.30 신민당 전당대회에서의 이철승 당선공작'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정치 가처분 신청'은 중앙정보부 조정관들과 분석관들이 '무리'또는 '불가'의견을 제출했으나 강행지시가 청와대로부터 내려왔다. 10.4 신민당 총재 의원직 제명 때는 김재규 부장과 일부 공화당 중진들까지 나서서 만류했으나 대통령 집무실의 재떨이가 벽으로 날아가 박살이 나고 나서 군소리 없이 강행됐다.
박정권 말기의 의사결정 과정은 매양 이런 식이었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몰락의 위험을 감지한 독재자의 광기가 여기저기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40 년을 같이 해 온 스승이자 선배이자 상관인 사람을 면전에서 가슴과 머리를 차례로 정조준하여 사살한 이유를 정치적이나 우발적 동기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해서는 안 될 일을 강요한 상대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이나 공포심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행위라는게 전문가들의 견해이고, 또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다. 김형욱 살해공작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는 김재규를 이런 심리상태로 몰아넣었을 공산이 크다.
우리는 앞으로 국정원 스스로 수행할 이 사건의 진실 규명 과정과 결과를 주시할 것이다. 사건의 성격상 미국, 프랑스 등 관련국가와의 상호 협조와 마찰이 불가피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의 이미지에 새삼스레 똥칠을 하는 사실들이 속속 드러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하루 빨리 악취가 진동하는 과거사의 오물들을 하나하나 제거함으로써 더이상 의혹과 갈등으로 국가공동체의 에너지가 낭비되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그리고 반인륜적인 독재정권이 횡포를 부리던 시대를 거두절미한 채 '위대한 시대'로 추억하는 일각의 위험한 풍토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도 이 사건의 진상규명은 반드시 필요하다.
히틀러는 1차대전 패전으로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경제 개발계획을 잘 수립했고 아우토반을 건설했다. 그렇다고 히틀러가 독일을 지배했던 12년간을 영웅시대로 추억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물론 한 시대의 공과를 구분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특정한 목적을 가진 어떤 정치세력이 한 시대의 역사를 본말을 전도한 채 일방적으로 미화하여 선전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
궁정동 비밀요정에서 벌어진 피비린내나는 살인극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파일 빼돌린 놈을 찾아내라 (2011 년 봄 올렸던 글)
2007 년 7 월 26 일 아침,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소재하고 있는 동아일보 사옥 주차장에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을 가득 태운 승용차 세 대와 미니 밴 한 대가 들이닥쳤다. 승용차와 미니 밴 안에서 쏟아져 나온 사내들이 본관 출입문을 향해 몰려오자 회사보안요원들이 급히 달려 나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더운 날씨인데도 가죽점퍼를 차려 입은 40 대 사내가 잠자코 안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안요원의 코 앞에 들이밀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이 발부한 압수수색영장이었다.
분당 샘물교회 선교단원 23 명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사건 때문에 나라 분위기가 뒤숭숭하던 이 날, 서울중앙지검 공안 1 부 수사관들은 신동아 취재기자와 동아닷컴의 메일계정이 보관돼 있는 동아일보사 전산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집행하려다가 회사보안요원들로부터 연락을 받고 몰려나온 기자들과 신문사 직원들의 거센 저항을 받고 일단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검찰이 신문사를 수색하려 한 이유가 황당했다. 어떤 기사에 대한 취재원을 찾아내기 위해서 출동했다는 것이다. 두 달 전쯤 발간된 신동아 6 월호에 실린 <박근혜 X 파일>에 관한 기사가 문제였는데, 이 기사에는 박근혜와 특별한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진 최태민 전 구국봉사단 명예총재에 대해 수사했던 수사책임자들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있었다.
sarnia 도 그 신동아 인터뷰 기사를 읽어봤지만 기사 내용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이미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 중 극히 일부를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빌려 기사화한 것뿐인데, 그나마 박근혜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고 최태민에 대한 정보도 하나마나 한 맥 빠진 소리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왜 언론탄압이라는 말썽이 일어날 것을 무릅쓰고 검찰이 압수수색영장을 발부 받아 동아일보사에 들이닥친 것일까? 더구나 당시는 참여정부가 집권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나중에 밝혀졌다.
검찰은 <신동아> 6 월호에 나온 기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정보원 직원이 <박근혜 X 파일>과 관련된 수사기밀 중 일부를 그 기사를 쓴 신동아 기자에게 넘겨 준 정황을 포착하고 국가정보원 직원의 <기밀누설혐의>를 수사하기 위해 신문사 전산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이려 한 것이었다.
국가정보원 직원이 신동아 기자에게 전달했다는 수사파일은 언제 작성된 것이고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내용이 담긴 파일이길래 검찰이 그토록 호들갑을 떨며 전산실을 뒤지러 신문사까지 몰려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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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신동아> 압수수색을 시도한 그 날로부터 30 년 전인 1977 년 봄.
종앙정보부장실에 설치된 빨간색 경비전화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려대기 시작했다. 빨간색 경비전화는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과 연결된 직통전화였다.
“예, 각하! 김재규 전화 받았습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오는 전화이니 당연히 대통령일거라 생각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몹시 화가 난듯한 20 대 중반의 여자였다.
“부장님, 부장님이 뭔데 남의 <프라이버시>를 조사하고 다니는 거죠? 당장 그만두라고 지시하세요! 중앙정보부가 그렇게 할 일이 없나요?”
“이 봐요, 큰 영애! 나는 다만……”
'다만 각하의 지시사항을 수행하는 것뿐'이라고 말하려는데 전화가 끊어졌다. 상대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상대가 자기 말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쏘아 부치고 전화를 끊어버린 데 대해 몹시 화가 난 김재규는 수화기를 책상 위로 집어 던졌다.
“뭐, 이런 썅X이 다 있어! 건방진 X”
그가 새삼스럽게 열이 뻗친 이유는 단지 방금 <큰 영애>로부터 건방진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큰 영애>의 전화를 받기 십 여 분 전에 <지금 당장 안전국장을 데리고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박정희의 명령을 받고 안전국장 백광현을 수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건설부 장관을 하다가 느닷없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을 받은 것은 작년 (1976 년) 이었다.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부임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김재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민정수석비서관 박승규가 차나 한 잔 하자며 자기 방으로 불렀다. 민정수석실에는 경호실장 차지철이 먼저 와서 소파에 앉아있다가 “아이고 김 장관, 아니, 이제 김 부장이지요. 축하합니다” 하면서 앉은 채로 너스레를 떨었다.
민정수석 박승규가 그에게 두툼한 노란 서류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최태민 파일>이었다. 1975 년 1 월경부터 어디서 <사기꾼 같은 목사 놈>이 하나 나타나 <큰 영애>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구국봉사단이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재벌들로부터 돈을 갈취하고 있는데 그 규모와 원성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기업만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건사회부를 앞세워 여성단체 등 관변조직까지 틀어쥐고 전횡을 일삼는데 <큰 영애>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영감태기 목사>를 결사적으로 싸고도는 바람에 아무도 손을 못 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박승규의 결론인즉슨, 자기가 운영하는 경찰비선조직으로는 이 작자를 조사하고 견제하는데 한계가 있으니 중앙정보부가 이 문제를 맡아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큰 영애가 맹목적으로 싸고 돈다는 최태민을 조사해 온 기관은 치안본부 특수수사대 제 1 대였다. 치안본부 특수수사대는 제 1 대와 제 2 대 두 개의 조직이 있는데 제 1 대는 대통령 친인척관련 범죄를 수사하는 조직이고 제 2 대는 고위공직자들의 비위를 조사하는 기관이었다. 이 두 개의 특수수사대는 명목상 내무부 치안본부 형사국 소속으로 되어 있지만 치안본부 형사국장의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의 지휘를 받으며, <제 2 대>는 사정담담비서관에게, <제 1 대>는 민정수석비서관에게 각각 직접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말이 경찰비선조직이지 대통령특명사건을 다루는 청와대 직속 암행어사 팀이나 다름없었다.
이 두 개의 조직 중 대통령 친인척을 수사하고 감시하는 <제 1 대>는 종로구 사직동에 본부를 두고 있으므로 일명 <사직동팀>으로 통했다. 큰 영애와 최태민의 문제를 내사해 온 조직이 바로 이 <사직동팀>이었는데, 이 사직동팀을 지휘해 온 민정수석이 <큰 영애> 등쌀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그 동안 수집해 온 내사자료와 함께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신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서 떠 넘겨 버린 것이었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 제 6 국장 (안전국장) 백광현에게 청와대 민정수석으로부터 <최태민 파일>을 넘겨 받아 조사를 재개하라고 지시했다. 안전국장 백광현은 수사팀을 꾸린지 두 달도 안 돼 최태민에 대한 다음과 같은 놀라운 내용의 비위혐의 목록을 작성해서 김재규에게 보고했다.
최태민 혐의: 횡령 14 건, 사기 1 건, 변호사법 위반 11 건, 권력형 비리(기업 등으로부터 금품갈취) 13 건, 이권개입 2 건, 융자간여(금융거래법 위반) 3 건 등 모두 44 건 외 성추문 12 건
최태민은 1912 년 5 월 5 일 생으로, 이 내사보고서가 작성된 1976 년 기준으로 64 세였다. 경력이 희한했는데, 조금 늦은 나인인 1926 년 보통학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 년경부터 해방 당시까지 주재소 순사 (일본 경찰)를 했다. 해방 후에는 비공식 군부대 문관을 했는데, 그만 둔 이후에는 절에 들어가 스님행세도 했고, 대전에 가서 인근 점집 무당들의 존경을 받으며 <도사>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 후 영생교를 창립해서 신도 300 여명을 모아놓고 교주 노릇을 하다가 슬그머니 목사로 전업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호적상 개명을 한 번 한 것을 비롯해서 모두 여섯 번에 걸쳐 이름을 바꾸었고, 결혼 역시 여섯 번 했다.
최태민은 1974 년 8 월 15 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가 저격 당해 사망하자 이듬해인 1975 년 1 월 <국모님이 꿈에 나타나 장래 나라에 큰 일을 할 큰 딸을 도와주라고 하셨다>며 <큰 영애>에게 편지를 연달아 세 통을 보냈는데 그 편지 세 통을 연달아 읽은 <큰 영애>가 감동을 받았는지 아니면 계시를 받았는지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들이더니 그때부터 둘이 함께 붙어 다니면서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내용들은 당시, 즉 1976 년 이미 대통령 박정희에게까지 보고됐다. 비위사실 중에는 <큰 영애>의 파워를 빌린 최태민이 국세청에 압력을 넣어 <구국봉사단 성금납부>에 비협조적인 기업들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했다는 내용과 그런 기업들 중의 하나인 대한농산(주)의 양곡도입권을 박탈했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보고들이 올라왔을 때만해도 박정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중앙정보부가 그런 것까지 조사하느냐> 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1977 년 봄 드디어 문제가 터졌다. <백광현 조사팀>은 <큰 영애>와 최태민의 권력남용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들은 보다 전문적이고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정 내사팀은 사직동팀과는 달리 보다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해서 새로운 보고서를 작성해 올린 게 분명했다.
박정희는 그 보고서를 읽어보더니 격노했고, <큰 영애>를 보좌하고 있는 청와대 제 2 부속실장에게 엄명을 내려 지금 당장 <큰 영애>를 데려오라고 호령했다. 그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도 전화해서 지금 당장 조사책임자인 안전국장 백광현을 대동하고 청와대로 올라오라고 지시했다.
<큰 영애>는 청와대 제 2 부속실장으로부터 사태의 전말을 보고 받고 분에 못 이겨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서재로 가기 전에 아버지 집무실에 설치된 직통전화를 이용하여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일방적으로 쏘아 부친 것이었다.
박정희가 그들을 한 날 한 시에 모두 불러들인 것은 이른바 <친국>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이 날 친국의 결과는 의외였다. 이 사건 자체를 그대로 덮어버린 것이다. 이후 <최태민 조사>는 중단됐고,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이 사건은 더 이상 거론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날 <친국장>인 청와대 서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아는 사람은 단 네 명뿐이었다. 대통령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중앙정보부 안전국장 백광현, 그리고 <큰 영애> 가 그들이다.
그로부터 2 년 후 10.26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의 <백광현 보고서> 사본은 10.26 사태가 발발하기 직전 김재규에 의해 재미교포 언론인 손충무에게 전해졌다는 설이 있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1980 년 4 월 14 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하게 된 전두환은 비로소 이 사건에 대한 전설적 내막을 보고 받고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국장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처장 이학봉에게 이 사건 재조사를 명령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소하지 않고 다만 최태민을 강원도 소재 군부대에 약 1 년 간 연금해 前<큰 영애>와의 접촉을 차단하는 탈법적이고도 이상한 행정조치를 취했다.
이 사건에 대한 마지막 조사는 노태우 정권 때 이루어졌는데 이 때도 조사가 도중에 흐지부지됐다. 이 때는 前<큰 영애>가 그녀의 동생 박서영과 육영재단을 놓고 재산권 분규를 벌이는 과정에서 1990 년 11 월경, 박서영이 노태우에게 <제발 언니를 최태민의 마수에서 떼어놓아달라>는 황당한 탄원을 하면서 조사가 시작됐었다.
그러다가 이 사건은 2007 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이명박과 박근혜 간의 <BBK 對 최태민파일> 진검 결투과정에서 잠깐 대두되었었다. <신동아> 가사는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담당 기자가 간이 작은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데스크가 압력을 받았는지 기사 자체는 별 내용이 없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2007 년 7 월 26 일과 27 일 양일에 걸쳐 검찰이 찾으려 한 <X 파일>은 이른바 1977 년 봄 박정희에게 건네졌던 <백광현 보고서>의 사본이 그 이후 수사과정에서 보강된 <박근혜 X 파일> 진본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한민국 검찰이 백주대낮에 체면불구하고 <보물지도>찾는 해적 떼처럼 신문사에 난입하려다가 기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해괴한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연 국정원의 누군가가 그 파일을 기자 또는 다른 취재원에게 넘겨주었을까?
넘겨주었다면 그 파일은 지금 누가 가지고 있으며 그 내용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박정희가 격노했으며 더 이상의 조사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아마도 이건 대선 후보로 나설 당시의 <큰 영애>가 반드시 해명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