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앤 리 “캐나다에서 모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주야』 다이앤 리 저자 인터뷰
모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저에겐 이해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행위입니다. 모국어(mother tongue)의 속성과 비슷합니다. 속성이므로 언어를 바꿔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2020.01.22)
- 글ㆍ사진 | 출판사 제공
『로야』 로 2019년 세계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한국계 캐나다 이민 작가 다이앤 리. 그가 『로야』 를 잇는 두 번째 장편소설 『주야』 를 펴냈다. 『주야』 는 『로야』 의 후속작이지만 『로야』 보다 먼저 구상되었고 『로야』 를 품는 이야기다. 한국계 캐나다인 여성이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를 응시하며 삶을 회복해가는 『로야』 의 이야기는 『주야』 에서 새로운 변곡점을 거치며 심화, 확장된다.
위태롭게 이어지던 엄마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시어머니가 가족 구성원으로 합류하는 현실에서 주인공은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더욱 능동적인 사유를 펼친다. 독자를 무수한 질문 앞에 불러 세우는 소설은 그리하여 회복의 가능성을 낙관하며 또 다른 위로와 연결에 도달한다.
2019년 세계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작가로 데뷔하셨습니다. 지난 4월에 수상작인 『로야』 가 나왔고 연말에 후속작 『주야』 를 출간하셨는데, 한 해 동안 작가로 데뷔하여 두 권의 소설을 펴내신 소감이 어떠세요?
청자와 화자가 교대로 역할을 수행해야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듯 독자와 작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세계문학상 대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청자와 화자, 독자와 작가 사이의 유동성 덕분이었을 겁니다. 이런 이유로 작가라는 명칭은 여전히 낯섭니다. 저는 『로야』 와 『주야』 안에선 화자이자 작가이지만 밖에선 청자이자 독자입니다. 내재하는 동시에 외재합니다. 같은 해에 태어난 『로야』 와 『주야』 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외부의 힘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내부의 힘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의도치 않게 집필을 시작했으나 결국 의도하여 끝낸 셈입니다.
작품 분량과 구성, 집필 기간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수상 가능성을 점치기 전에 출판 가능성도 알 수 없던 상황이었지만, 두 작품이 시간 간격을 두고 세상에 나와야 한다는 점은 저에겐 기정사실이었습니다. 『로야』 를 끝내자마자 『주야』 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로야』 수상 소식이 너무나 뜻밖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해야 할 것을 했다는 느낌입니다.
‘작가의 말’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로야』 이전에 『주야』 가 이미 있었고 『주야』 는 『로야』 를 품은 이야기입니다. 『주야』 가 나옴으로써 비로소 한 작품이 완결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 이번에 『주야』 를 내시면서 가장 신경 쓴 점은 무엇인가요?
돌림자를 쓴 『로야』 와 『주야』 는 연년생입니다. 『로야』 가 나왔을 때 『주야』 는 여전히 제 품 안에 있었습니다. 『로야』 품은 『주야』 를 작가가 품고 있었던 거죠. 탄생 시기로는 ‘주야’가 ‘로야’보다 먼저 생겨났지만, ‘주야’는 인큐베이팅이 필요했습니다. ‘주야’ 자신도 기다려야 했고, 『주야』 를 만날 이들도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일어나는 감정 변화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주야』 를 쓰면서 가장 신경 쓴 점이 있다면 이야기를 진행하는 동시에 역행시켜야 했다는 점입니다. 외관상으로 『주야』 가 후속 혹은 완결로 보여도 『주야』 는 전작 혹은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로야』 에서 심어놓은 장치들을 『주야』 에서 드러내는 데에도 신경 썼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쓴 것처럼 이분법의 심화나 와해에도 주력했습니다. 끌어내린 것을 다시 끌어올리는 작업이나 밀착했던 것에 거리를 두는 원근법 등에도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로야』 와 『주야』 는 연결하는 동시에 단절하고, 유사한 동시에 상이합니다. 너그럽기도 하고 무자비하기도 합니다. 두 작품을 통해 양면가치(ambivalence)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주야』 를 읽으면서 무엇보다 엄마에 대한 화자의 감정 변화에 공감했습니다. 엄마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이지만 ‘나’에게는 감정적인 가해자이죠.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엄마에게 수없이 실망하고 상처 입으면서도 ‘나’는 엄마를 걱정하고 그리워합니다. 그러다 끝내 엄마를 지우며 말해요. “엄마, 여기선 헤어져도 다음 생에선 내 딸로 태어나 줘. 내 딸로 태어나서 내 사랑을 받아 줘.” 엄마를 향한 화자의 마음을 이보다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중요한 부분을 짚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야』 에서 ‘엄마’는 주요 등장인물이지만, 『주야』 에선 ‘엄마’의 등장 비율이 줄어듭니다. 그 이유는 ‘엄마’가 『로야』 에서 인물 역할을 한다면 『주야』 에선 개념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보편적이고 필수적이고 초보적인 단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하는 단어, 근원이자 시작인 개념, 날 때부터 안다고 생각하는 개념, 경험하기 이전에 이미 가지고 있어 대상을 인식하는 근거가 되는 개념(『주야』 , 211쪽)”입니다. 이러한 개념이 전복될 수 있음을 경험한 ‘나’는 기존의 개념과 헤어지기로 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하는 단어”, 즉 모국어(mother tongue)입니다. 제거 대신 구제를 선택합니다. 기존의 개념을 떠나보내고 “다음 생에선 내 딸로 태어나 줘. 내 딸로 태어나서 내 사랑을 받아 줘.” 새로운 개념을 정의합니다. 화자와 작가가 일체화된 장면이기도 합니다.
소설에서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점은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매우 상세히 묘사한다는 것이에요. 화자는 가족의 끼니를 챙기기 위해 요리를 하고, 지인을 초대할 때나 크리스마스 같은 기념일에는 더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듭니다. 그가 재료를 손질하고 불을 조절하며 요리하는 장면을 보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마치 연금술사를 보는 것 같았어요. 여기에 어떤 뜻이 있는지, 작가님은 음식을 만들고 함께 나누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두시는지 궁금합니다.
화자의 집에서 머물게 된 시어머니를 위해 화자는 정성스레 잔치국수를 만들고 나서 혼자였다면 라면이었을 거라고 고백합니다. 『로야』 와 『주야』 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어 ‘식구(食口)’는 같은 집에서 살며 끼니를 함께 나누는 사람을 뜻하지요. 요리는 나눔을 의미하는 것이 맞습니다. 좁게는 식구를 정의하고, 그 정의를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넓게는 생존과 생활, 혼자와 여럿, 공존과 공생의 차이점을 묻고 대답하는 행위입니다. 무엇보다 요리 과정을 읽을 땐 단순히 시각적으로 읽는 데 그치지 않고 미각, 후각, 청각, 촉각 등 여러 감각을 동원해야 하므로 적극적으로 읽게 됩니다. 적극적으로 읽은 장면은 마음속에 남습니다. 마음속에 남은 것, 작가가 나눠드린 것으로 여겨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가정폭력으로 파괴된 가족과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구성원들을 보면서 관습적인 가족 관계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작가님이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가족’은 무엇인가요?
『로야』 에서 화자가 내부인 시각으로 현상을 바라본다면 『주야』 에서 화자는 외부인 시각으로 현상을 바라봅니다. 가정폭력이 가지는 내밀함은 외부인의 접근을 막고 내부인이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속성이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일반적 의미는 폭력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일반적 의미에 부합하지 않지요. 오히려 이 둘은 반대 자리에 있는 단어들입니다. 반대 자리에 있는 두 단어가 하나로 연결될 때, 충돌되어 부서지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가족입니다.
가정폭력은 가정과 폭력이 동등하게 연결된 단어이지만, 가정과 폭력은 동등하게 취급되는 단어들이 아닙니다. 폭력에 대해선 누구나 반대하면서도 가정에 대해선 함부로 반대하지 못합니다. 폭력엔 개입해도 가정엔 함부로 개입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차별 취급은 단어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어를 대하는 이들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비판적 사고를 거부하는 개념은 불가침 영역에 머무릅니다. 견제되지 않고 간섭받지 않는 영역. 인간 사회에서 이런 영역은 신성불가침과 무소불위,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합니다. 가정은 이 영역에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을 구성하는 가족도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로야』 와 『주야』 를 통해 제가 의도한 것은 무의식의 의식화입니다. 사적인 이야기를 공적으로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답변의 제일 첫 문장처럼 내부인에서 외부인으로의 시각 전환이 필요한 까닭이지요. 시각 전환이 이루어지면 대수로운 것이 대수롭지 않게 되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이 대수롭게 됩니다. 이후에 중요한 것이 남습니다.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족이 남고, 가족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남습니다.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질문이 남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질문이 자신을 찾게 해 줄 겁니다.
캐나다에서 모국어로 글을 쓰고 계십니다. 모국의 독자와 더 가깝게 소통하고 싶은 마음도 크실 테고, 한편으로는 번역을 통해 현지의 독자들과 만나고 싶은 갈증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모국어로 글쓰기,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일상에서 영어를 주로 쓰지만, 자연발생적으로 습득한 언어는 모국어인 한국어입니다. 한국어 다음으로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공부한 언어는 독일어입니다.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때 독일어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명료한 단어들의 조합이 모호한 개념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한국어에 비해 간결한 영어 문장 구조는 대상을 수월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객관적 요소만으로 언어 간의 차이를 논할 순 없습니다. 어떤 모국어라도 모국어가 가지는 복합성과 중의성은 단지 언어 체계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국어 발화자는 여러 요소와 관련된 상태에서 언어를 사용합니다. 혈연, 역사, 문화 등 염두에 두어야 할 요소들이 있습니다. 관련성이 클수록 객관성을 유지하기 힘들고, 우회적 화법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의 모국어는 환경적 요인 덕분에 우회 정도가 약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환경적 요인은 모국어의 중의성을 높이는 역할도 합니다. 특정 단어의 정의가 의심스럽거나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경우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제 안에 내재한 모국어를 외부인 관점으로 사용합니다. 질문을 품은 대답처럼 중의성이 생기고 맙니다.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외국어가 몇 있습니다. 외국어로 어떤 표현을 들어도 그것을 파악할 때는 여러 언어를 혼합해서 이해합니다. 깊은 사고가 필요한 개념일수록 더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대부분은 제 안에 혼합된 형태로 놔두지만, 어떤 경우엔 모국어 활자로 가시화하는 작업을 합니다.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 찾아오면 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모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저에겐 이해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행위입니다. 이해하고 이해되는 곳, 저에겐 안식처입니다. 모국어(mother tongue)의 속성과 비슷합니다. 속성이므로 형태를 바꿔도, 다시 말해 언어를 바꿔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지향하는 글쓰기입니다.
요즘 관심 갖는 주제나 다음 작품에 대한 계획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늘 관심 두는 주제가 있습니다. 생명체와 우주입니다.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도 있고, 이해 너머의 영역도 있습니다. 이해 너머의 영역 때문에 앞으로도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관심 가질 주제입니다. 다음 작품은 구상 중입니다. 사람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어질 것 같습니다. 부유하는 생각들이 모일 수 있고, 떠도는 유목민이 쉴 수 있는 안식처는 필요하니까요. 어떤 면에선, 누구나 유목민 아니겠습니까?
* 다이앤 리
197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본 대학교, 서울대학교,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했다. 2001년 캐나다로 이주해 현재 남편과 딸과 밴쿠버에 살고 있다. 클래식 음악을 애호하여 밴쿠버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 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밴쿠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밴쿠버 리사이틀 소사이어티의 연간 회원을 7년째 이어오고 있다. 몇 해 전 겪은 교통사고를 계기로 오랫동안 감춰왔던 고통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회복하기 위해 쓴 첫 소설 『로야』로 제15회 세계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