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몬트리올의 멕길 대학교 종교학부에서 신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캐나다연합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앨버타 북부에 작은 광산촌 그랜드캐쉬(Grande Cache)에 있는 연합교회에 위임되어 3년 동안 목회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캘거리에서 50분정도 북쪽에 있는 농촌 마을 칼스테어즈(Carlstairs)의 연합교회에서 7년 동안 목회했다. 이 교회들은 영어를 사용하는 소위 서양 교회이다.
10년 동안 이 영어교회들에서 목회생활을 하면서 잊지못할 가장 좋은 추억은 누구도 나를 “목사님”(Reverend)이라고 호칭하지 않은 것이다. 주일학교 어린아이들부터 80세의 노인들까지 나를 “Sung”이라고 나의 이름 성철(Sung-Chul)의 첫자를 따라 불러주었다. 처음에 얼마동안 나는 교인들이 이렇게 불러줄때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까지 느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나를 “목사님”이라는 제도적이고 권위적이고 비인간적인 타이틀로 부르지 않고 진심으로 한 동료 인간으로 존중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한편 영어교회 목회 전후에 한국교회에서 약 10년 동안 목회했다. 한인교회들에서 가장 힘든 일들 중에 하나가 나를 “목사님”이라는 권위적이고 비인간적 내지는 제도적인 인간, 만들어진 인간, 교리적인 인간, 진심으로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면전에서 보이는 가식의 대상, 등등으로 불려지는 것에 지치고 식상했다.
한인사회에서 나의 칼럼을 읽은 보수적인 신자들이 “목사”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으라고 강요하는 목소리를 수없이 들어왔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목사님”이라고 불러주는 것을 그다지 고맙게 또는 반갑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기독교인으로써 목사님(Reverend), 신부님(Father)이라는 호칭은 나에게 가식과 거짓과 은폐의 구역질나는 말이다. 예수는 안수받은 적도 없도, 신학자도 아니고, 목사나 신부도 아니고, 다만 평범한 촌부였다. 오늘 예수가 살아있다면 기독교인들이 그를 목사님 또는 신부님이라고 부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라고 할 것인가? 내가 이해하는 역사적 예수는 그런 가식적이고 제도적이고 권위적인 호칭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그렇게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에게 사악하고 간교한 자라고 질책할 것이 분명하다.
고맙게도 에드몬튼의 친구들 중에 나의 신학과 신앙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나를 목사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대신 나의 닉네임 “늘봄”으로 불러준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한국문화의 오랜 전통에서 우리는 이름 뒤에 어떤 호칭을 붙인다. 특별한 호칭이 없으면 이름 뒤에 “님”을 부친다. 또는 형제님/자매님이라고 한다.
목사라는 명칭은 하나님이 내려준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제도적인 종교가 사람들을 교회의 권위에 무릎꿇고 복종하도록 만든 통제수단에 불과하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한 캐나다연합교회에서 안수받은 나의 목사호칭(Reverend)은 내 마음대로 또는 누가 멋대로 지워버릴 수가 없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모르는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에 내가 목사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 것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몇 년 지난 후에 목사였군요 하고 놀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목사라는 호칭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요즘 서울 시내 번화가에서 “목사님”하고 외쳐보라. 많은 사람들이 뒤돌아 본다. 그만큼 흔하게 널려져 있는 것이 목사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날 목사라는 직업은 한국에서 인기도의 최하수준이다. 목사들의 설득력과 신뢰도는 땅바닥에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폐기처분의 위기상태에 빠졌다.
열심히 진심으로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며 목회에 헌신하는 목사님들에게 나의 글이 격려가 되기 바란다. 여러분들의 비전과 희망을 깍아내리는 글이 아니다. 여러분들은 예수처럼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힘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