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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옥 씨가 사망했다. 1937 년 생이니 향년 83 세다.
박재옥은 박정희의 장녀이자 박근혜의 이복언니다.
보통 100 수를 하는 세상에서,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가 별 지병도 없이 83 세, 아직 창창한 나이에 숨을 거둔 이유가 어린 시절 마음고생 때문이었지 않나 싶다.
박재옥은 열 세 살 때 아버지의 불륜행각을 목격해야 했다.
아버지는 멀쩡한 본부인인 어머니를 팽개친 채 충북 옥천의 스물 네 살 짜리 부잣집 둘째딸과 연애행각을 벌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집 사람들이 나타나더니 어머니인 김호남에게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을 것을 강요했다.
아버지 박정희가 본부인인 어머니 김호남에게 이혼을 요구한 것은 오래 전 부터였지만 그 요구에 결코 응하지 않았었는데, 그때는 어쩐 일인지 버티지 못하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아마도 옥천 사람들이 박재옥의 어머니 김호남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미 10 년 간에 걸친 박정희의 폭력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이혼을 거부하던 김호남이 하루아침에 도장을 찍어주었을리가 없었다.
싸르니아는 처음에 김호남을 박정희와 이혼하도록 강요하는데 주도적으로 나선 장본인이 이경령이 아니었을까 추측한 적이 있었는데, 김종필 씨가 죽기직전에 폭로한 ‘육영수의 진짜 사람 됨됨이’에 관한 증언을 듣고나서 ‘강요의 장본인’이 육영수의 어머니 이경령이 아니라 육영수 본인이었을 가능성이 압도적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박재옥-한병기 부부를 미국으로 쫓아낸 뒤 그 후 내내 미국, 캐나다 등을 전전하게 하며 한국에 못 들어오도록 조치한 장본인 역시 육영수 였을 것이다.
박재옥 부부는 칠리의 산티아고에서 육영수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당시 남편 한병기가 칠리주재 대사였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1970 년 3 월 발생했던 정금지 -일명 정인숙- 살해사건도 언젠가는 합리적 추론을 바탕으로 한 재조사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재수사라고 하지 않고 재조사라고 한 이유는 이 사건 역시 ‘경기남부 연쇄살인사건’처럼 사법절차가 끝났고 공소시효 또한 만료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당시 경호실장 박종규가 정금지 살해사건의 배후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으나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그 사건의 최종적 배후는 사람들이 놀랄만한, 전혀 뜻밖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김종필은 육영수를 가리켜 “아주 욕심이 많은데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고마움도 모르는 이기주의적 인간형”이었다고 폭로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던 이유는 뜬금없이 1974 년에 죽은 육영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고, 당시 탄핵으로 쫓겨난 박근혜의 인간성을 이야기하면서 ‘그녀가 어머니의 나쁜 성격을 물려받았다’ 는 말을 하기 위해서 였다.
김종필은 사람에 대한 평가를 아주 절제해서 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 정도의 표현을 동원해서 평가 했다는 것은 그 평가대상이 보기드물 정도의 사악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김종필은 처숙모 육영수와 한 살 차이로 육영수의 신혼시절부터 지근거리에서 가족사를 지켜 본 장본인이다. 그는 박정희가 육영수와 재혼한 지 두 달 만인 1951 년 2 월 육영수의 시조카 박영옥과 결혼했다.
박영옥은 박재옥의 여덟 살 많은 사촌언니로 서로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박재옥은 불과 열 두 살 많은 새엄마 육영수를 피해 사촌언니 부부 (김종필-박영옥)집에 얹혀 살기도 했다.
그러니 김종필의 육영수 목격담과 경험담은 가장 사실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
하필이면 전쟁통에 벌인 박정희-육영수 커플의 불륜행각에 가장 트라우마를 많이 받은 사람은 첫째는 본부인 김호남일거고 둘째는 어제 사망한 장녀 박재옥이겠지만, 그들보다 더 마음고생을 하며 통한의 세월을 살다 71 세의 이른 나이에 쓸쓸히 요절한 사람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박재옥의 의붓 외할아버지이자 육영수의 선친인 육종관이다.
그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을 안 한 것은 물론이고, 그 이후 홧병 비슷한 것으로 요절한 1965 년 12 월까지 무려 15 년 동안 딸 육영수와 사위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딸이 법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엄연한 기혼자와 연애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격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육종관은 여섯 명의 여자들과 관계를 맺어 세종대왕 처럼 총 22 명 의 자녀를 둔 인물이다.
사실 요즘같으면 별 일이 아닐 수 있지만, 70 년 전 일은 70 년 전의 가치를 기준삼아 내재적 접근을 해야 ‘딸 박재옥’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미 수 십 년 전에 고인이 된 박정희나 육영수의 과거를 들추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다만,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 속 불행한 가정사를 겪었던 인물 하나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나서, 고인의 명복을 조금 더 의미있게 빌기 위해 짧은 기억을 정리해 보았다.
p.s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 수감 중인 박근혜 씨가 언니의 장례식에 참석해 용서를 빌 일이 있으면 용서를 빌고, 자매간에 나눌 말이 있으면 서로 나누도록 장례기간 동안 귀휴조치를 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