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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매체 어디에서도 보도한 흔적이 없지만, 지난 6 일에는 미국을 열광시킨 한 기고문이 NYT 에 실렸다. 기고문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I am a direct descendent of Thomas Jefferson. Take down his memorial.’
기고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졌던 토마스 제퍼슨의 6 대 직계후손 Lucian K Truscott IV (4세)다.
그는 기고문에서, 독립선언서를 초안한 자기 할아버지가 입으로 나불거렸던 것과는 달리 흑인노예들을 해방하지 않고 빚쟁이들에게 매각한 위선자였던만큼 그의 기념관을 때려부수고, 차라리 그 자리에 다른 노예들의 탈출을 돕고 만민평등을 위한 투쟁을 온몸으로 실천했던 우리나라(미국)의 또 다른 애국자, 아프리칸 어메리칸 여성 Harriet Tubman의 동상을 세워야 할 때라는 솔직한 주장을 펼쳤다.
오늘 영결식을 가질 시라카와 요시노리 씨의 유가족 중에, 결코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는 고인의 치명적 과오를 용기있게 지적하고 차라리 그 자리에 무명산야를 떠돌고 있는 독립운동가 한 사람을 찾아 안장해야 할 때라는 주장을 했다는 소리는 아직 들려오지 않는다.
서울현충원에 들어갈 수 없으면 꿩대신 닭이라고 대전현충원으로라도 기어코 비비고 들어가겠다는 주장만 집요하게 계속해 왔을 뿐이다. 가족과 보수세력의 줄기찬 등쌀에 학을 뗀 문재인 정부의 국가보훈처는 결국 고인의 대전현충원 안장을 허가하고야 말았다. 법률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안장허가의 이유였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씨의 조선 이름은 백선엽이다. 그가 창씨개명이름으로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택한 이유는 그를 각별히 존경했기 때문이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만주국 관동군 사령관과 제국일본 중국주둔군 총사령관을 지낸 제국일본의 전형적 사무라이다. 그는 1932 년 5 월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조선청년 윤봉길이 던진 물병폭탄이 그가 서 있던 단상에서 터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폭사했다. 그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 1 차 세계대전에 연달아 참전한 제국일본 전쟁사에 전설과 같은 인물이었다.
조선청년 백선엽이 평양사범학교를 나와 교사의 길을 갈 수 있었는데도 이를 포기하고 위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출세욕 때문이었을 것이다. 출세욕 자체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는 식민지 청년으로서 넘어서는 안 될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고야 말았다. 반식민지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조선인들을 진압 사살하는 특설부대 간부로 활약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간도특설부대는 첩보 매복 폭파 암살 적후방 공격 등을 주임무로 하는 특수부대다. 그는 이 특수부대에서 2 년 6 개월 동안 근무했다. 일반 보병부대 장교로 근무했던 또 다른 조선청년 박정희의 친일행위와는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하는 치명적이고도 용서할 수 없는 반역행위였다.
지난 10 일, 100 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관 속에 누워있는 그는 수의 대신 1950 년 7 월 그 날 입었던 전투복과 유사한 옛날 군복을 입고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고 한다. 1950 년 7 월 그 날이란 그를 오늘의 가짜영웅으로 만든 칠곡군 가산면 전투가 벌어진 날 일 것이다.
백선엽(한국명)을 칭송하는 문서들은 그의 회고록에 기초하여 일명 ‘다부동전투’라 불리우는 연합군의 작은승리를 동화같은 전쟁영웅 이야기로 꾸며 놓았다.
백선엽은 “다부동에서 연합군이 밀리면 미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철수한다는 미군 사령관의 말을 듣고나서 자기가 권총을 빼들고 선봉에 서서 ‘나를 따르라’고 소리지르며 돌격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 “내가 후퇴하거든 나를 총으로 쏘라고 했다”는 전쟁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시 현장에서 벌어진 진실에 가까운 전황은 다음과 같다.
백선엽이 지휘하고 있던 제 1 사단은 지리멸렬하고 있었다.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는 경상북도 칠곡을 연합군 방어선을 돌파해서 대구로 진입하는 주공선으로 설정하고 이 좁은 지역에 정예 3 개 사단을 투입했다. 인민군 3 개 사단의 파상공세에 겁을 집어먹은 한국군 제 1 사단 병력 중 다수가 갈가마귀떼처럼 흩어져 도망가는 사태가 벌어졌으나 사단장 백선엽을 이를 막지 못했다.
당시 한국군 제 1 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다부동 전선에는 미국군 제 27 보병연대(일명 Wolfhounds 부대)와 제 23 보병연대가 백선엽 사단을 엄호하고 있었다. 이 미국군 부대들은 말이 보병연대지 병력이나 장비면에서 기계화여단에 필적하는 완편부대들이었다.
제 1 사단 사단사령부와 지근거리에 있던 미국군 제 27 보병연대 연대장 Johns H Michaelis 은 부대 장악력을 잃고있는 백선엽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마이클리스는 공수부대출신이고, 아이젠아워 보좌관으로 근무한 전력이 있는 사람으로 백선엽보다 나이도 여덟 살이 위였다.
같은 시각,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는 중대한 작전전환결정을 내렸다. 경북 칠곡군 가산면 일대 고지들을 방어하고 있던 예하 3 개 사단 중 주력인 제 15 사단을 경북 의성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제 15 사단을 의성으로 이동시킨 이유는 대구 대신 경주를 공략하기 위해서 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민군측의 이 작전변경으로 대구공략의 축선인 칠곡전선의 균형이 무너져 연합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북으로 돌파할 수 있게 하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때마침 미국군 공군전력이 그렇지 않아도 전력이 크게 약화된 인민군 제 3 사단과 13 사단의 주공선에 융단폭격을 퍼부어 인민군의 대구 공략의지를 상실시켰다. 백선엽은 비로소 이 와중을 틈타 동요하고 있던 예하부대 지휘관들을 불러모아 그가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로 독전의지를 다시 불어넣었을 수는 있다.
“저 사람들(미국군)도 싸우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 설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
이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미국군 보병연대장의 항의와 질타, 조선인민군의 작전변경으로 방어에 여유가 생길 때까지 백선엽의 한국군 제 1 사단이 그의 말마따나 ‘이럴 순 없다’고 할 정도로 당나라 군대처럼 지리멸렬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과장날조되어 있는 다부동 전투를 도구삼아 백선엽을 마치 대한민국을 온통 혼자 지킨 구국의 영웅이나 되는 것처럼 과장묘사하여 대전현충원에 안장시키려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군 옛날 군복을 입고 대한민국의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것이 아니라, 간도특설부대 제국일본 옛날 군복을 입고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안장한다고 해도 놀랄 사람이 없을만큼 황군으로서의 공적도 뚜렷한 사람이다.
2020. 7. 14 10:00 (MST) sarnia(clip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