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년 전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성서문자근본주의 속물들을 가지고 한반도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한국에 최초로 개신교를 소개한 후 지난 1세기 동안 미국의 주류 기독교계는 꾸준히 급진적인 신학(Radical Theology)을 발전시켜왔다. 미국 기독교는 끊임없이 산고를 거치며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교회로 성숙해져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독교를 소개한 미국 기독교계는 사회적으로는 물론 종교적으로도 진보화되었지만 한국 교회들은 100여년 전에서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않고 전혀 변화되지 못한 미성숙한 교회로 남아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미국 선교사들이 가져온 성서문자근본주의의 속물들을 마치 하느님이 주신 축복으로 착각하고, 그 퇴행물들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잔뜩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는 초기 미국 선교사들이 가져온 근본주의 속물들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야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도움이 된다.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가져온 퇴행적인 속물들은 다음과 같다: (1) 백인 기독교인만이 선택받았다는 선민사상; (2) 과학을 반대하는 반지성주의; (3) 타문화와 종교와 인종을 멸시하는 차별적인 배타주의; (4) 물질적인 부는 하느님의 축복이고 가난은 하느님의 징벌이라는 황금만능주의의 자본주의. 이것들은 하느님이 한국인들에게 보내준 영원한 은혜가 아니다. 이것들은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기만의 수단이었다.
1. 선민사상 (기독교인만 선택받았다는 차별적이고 이분법적인 우월주의로 교회가 사회와 분리됨)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미국의 선민사상을 세계 중심으로 보고 국제 정세를 통제하려는 제국주의 신학을 한반도에 가져왔다. 원초적으로 선민사상은 예수 당시에 유대교의 핵심 신학이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오직 유대교인만을 선택했고, 그들만 축복하고 구원한다는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인 신앙이다. 미국 개신교는 유대교의 선민사상을 악용하여 자신들의 전유물로 둔갑시켰으며, 1세기 전 미국 백인 개신교인들은 하느님이 세계 근대화와 기독교 전파에 자신들을 선택했다고 믿었다. 따라서 미국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선민사상을 한국인들에게 강제적으로 주입시키고, 한국인의 고유 문화와 전통과 정신을 이방인의 야만적인 것으로 폄하하고 말살했다.
미국 선민사상은 미국을 세계 중심으로 보고, 모든 국제 정세를 통제하는 것이 핵심이며 오늘날 미국 정부의 대외정책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한국인들은 미국의 불량신학과 국제정치를 수호신으로 착각하고 있다. 더욱이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세뇌된 한국 개신교는 한국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버리고 미국의 시녀노릇을 자처했다. 또한 한국 개신교는 자신들만이 옳다고 하며 다른 종교들을 배척하고 있다. 미국 선민사상을 잘못 받아들인 한국 개신교의 교단들은 각기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정통이고 다른 것들은 이단이라는 억측으로 오늘 수백개의 교단들로 분열되어 난립하는 추악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 반지성주의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이성과 지성을 폄하하기 때문에 진화론을 반대하고 왜곡한다.)
선교사들이 한국 근대화와 고등교육 발전에 큰 토대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미국 청교도주의자 선교사들은 비성서적 지성을 절대 금기하는 종교적 차원의 반지성주의를
표방했다. 그들은 성서 기록을 문자적으로 읽고 직역적으로 믿는 것을 절대화하고, 성서 내용에 대한 해석과 이성과 지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정죄했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과 교육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그 결과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과 유신진화론과 같은 사이비 과학과 사이비 종교가 한국 개신교에서 환영받고 자리잡게 되었다.
반지성주의는 종교적 측면을 넘어서서 정치사회적으로도 나타난다. 이는 유럽에서 미 대륙으로
건너와 식민지를 개척한 계층들의 특징으로 잘 설명된다. 목숨을 내걸었던 항해로 척박한 미대륙 광야를 개척하며 살아야 했던 초기 미국인들은 유럽에서 경제 사회 종교적으로 박해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유럽에서 상류 엘리트층의 고상한 지성에 억눌려 살았던 이들은 지성에 대해 깊은 반감이 있었으며, 이것이 구체적으로 미국의 반지성주의로 표출됬다. 그 현상은 오늘도 미국 정치계에서 과학을 폄하하고 기후위기를 무시하며, 여성낙태 금지와 동성애차별의 증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미국식 반지성주의는 종교적 측면에서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직역적으로 믿는 성서문자근본주의가 미국 보수 교회들의 신학과 신앙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것이 선교사들에 의해 한반도에 도입되었다. 반지성주의와 근본주의는 오늘까지 한국과 미국 개신교에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으며 심지어 사회를 분란에 몰아넣고 있다.
3. 문화적 배타주의 (한국의 고유한 종교와 전통적인 문화와 정신을 말살했다.)
미국 주류 개신교 내부 깊숙이 자리한 문화적 배타주의도 선교사들이 가져온 속물들 중에 하나이다. 온전히 자신들 문화만 옳은 것이라는 우월적 분리주의에 사로잡힌 미국 백인들은 한국인의 전통적인 문화와 정신을 이해하지 못했고, 야만인의 행위로 치부했다. 미국인들의 이러한 만행은 한반도에서 뿐만 아니라 전세계 곳곳에서 원주민들에게도 저질렀다. 선교사들은 한국인에 대한 관심을 더불어 함께 살면서가 아니라 한국인들로부터 분리된 자기들만의 세계 속에서 보여주려고 했다. 예수를 믿지 않고 한국의 전통의식과 풍습을 지키는 한국인은 선교사들에게 야만인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오직 교회당에서 행하는 예배만이 종교라고 우겨댔다. 원주민과 철저히 분리된 삶을 지키고자 했던 미국 백인 선교사들은 한국문화를 한국인의 시선에 맞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준과 틀 안에 감금했다. 이러한 그들의 분리주의는 오늘까지 한국 개신교 교회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비기독교적인 교회 밖의 사회는 징벌받아 마땅한 더러운 세상이고, 교회 안은 선택받고 구원받은 깨끗한 곳이라는 분리주의가 믿음의 핵심이다. 한국 개신교가 한국인의 전통과 정신을 경멸하고 정죄하는 것은 미국 선교사들의 우월적 배타주의에 아부하는 비굴한 사대주의의 소치이다.
미국 선교사들이 외롭고 낯선 환경 속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며 사랑을 전하는 데 애썼을 것이라는 한국 개신교인들의 생각은 막연한 환상이다. 미국 백인 선교사들은 사실상 조선인들과는 철저히 분리된 삶을 지키고자 했다. 선교사들에게 비기독교인 조선인들은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고 야만인이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지 않았다. 그들의 선교는 단지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한국인들과 더불어 살기보다는 한국인들로부터 분리된 자기들만의 세계 속에서 살았다.
한국인들에게 조상을 생각하고 추모하는 제사행위 자체는 하나의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전통이다. 미국 선교사들은 오직 교회당에서 행하는 예배만이 종교라고 강요했다. 원주민과 철저히 분리된 삶을 지키고자 했던 미국 백인 선교사들은 한국문화를 한국의 시선에 맞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준과 틀안에서 봤다. 이러한 그들의 분리주의는 당연히 우리 문화에 대해 편견과 오만과 멸시로 대했다. 결과적으로 제사와 조상들 앞에 무릎꿇고 절하는 한국인의 고유 전통에 대해 철저히 금지시켰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제사는 예와 효를 중시하는 한국인의 고유한 문화이다. 조상들을 추모하며 나의 뿌리를 생각하고, 나의 존재가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겸손의 문화이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 시초를 찾아가는 것은 성스러운 종교의식이다.
4. 황금만능주의의 자본주의 (물질적인 성공은 하느님의 축복이고 가난은 징벌이라는 기만)
미국 선교사들 미국 선교사들이 가져온 또 다른 속물은 자본주의 가치관이었다. 미국식 자본주의적 개신교를 그대로 복사하는 한국 개신교회들은 오늘도 일반 기업체들의 운영방식으로 각종 선동주의와 물질주의적 홍보를 통해 교인 수를 늘리고 교회 성장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
19세기 미국 개신교인의 특징 중 하나는 자본주의 가치관이었다. 개신교인들이 경제적 활동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현상에 대해 연구한 하나는 막스 베버의 <프로데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언급한대로, 돈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여기는 성서를 경전으로 믿는 개신교인들이 어떻게 돈을 벌거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리는 데 혈안이 되어 열심히 중상류층으로 자리 잡은 것을 성서의 가르침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한마디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한국에 온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직간접적으로 무수한 상행위를 통해 재정적으로 큰 이익을 챙겨 떠났다.
이처럼 미국식 자본주의적 개신교를 보고 받아들인 한국의 개신교회는, 오늘날 여느 기업들과 다를 것 없이 각종 포퓰리즘과 물질주의적 홍보를 통해 교인 수를 늘리고 교회를 크게 성장하게 한 후, 자식에게 세습하기에 이르렀다. 미국도 여전하다. 유명 가수들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각종 찬양, 설교 집회의 미국 전역 투어를 통해 돈을 모으고 교회를 키운다. 한국과 미국의 개신교가 믿는 사랑의 예수와 하느님은 찾아보기 어렵다. 돈과 부와 성공이라는 황금만능주의의 자본주의가 그들의 신이다.
결론적으로, 한국 교회들은 미국 선교사들이 파놓은 캄캄하고 좁은 우물 안에서 나와야 한다. 과학시대에 새로운 눈으로 광활한 우주세계를 새롭게 보아야 한다. 스스로 세상과 분리하여 안일한 온실에 안주하지 말고 담대하게 온실 밖에 척박한 광야로 나가야 한다.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때문에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에게 의존하던 수동적이고 부족적이고 차별적이고 우월적인 이분법적 교리와 믿음에서 자율적인 깨달음에 나아가야 한다. 종교인이 되기 보다 먼저 참된 인간이 되어 사람답게 사는 길을 탐구해야 한다. 성전의 하느님을 떠나 보내고,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내야 한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지금 성서문자근본주의라는 신앙의 우물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어둡고 좁은 우물 안에서나 가능한 폐쇄적인 신앙적 독단으로 인해 교회는 이미 사회와 소통부재라는 중병을 앓고 있다. 또한 과학자들이 경고하는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극복과 한반도 평화통일이라는 국가적 현안들을 무시하고, 근본주의 믿음과 내세적인 천국의 망상에 안주하는 한국교회는 비만증 환자가 되어 이제 질병 저항력이 약해져 무균실이 아니면 살 수 없는 병약한 기독교인들이 머무는 온실이 되었다. 한국교회는 바람 한 점 없는, 도전과 비전도 없는, 생기도 없는 우물 안으로부터 새로운 생명과 삶을 위해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세속적인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건강하고 참된 인간의 삶을 위해 온실 바깥에 척박한 광야로 나가야 한다. 광야와 같은 세속적인 세상이 기독교인들의 성전이고 교회이다. 오직 그곳에서만 하느님과 생명과 인간과 세계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21세기에 기독교인들의 경전은 138억년의 우주 이야기이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